커버스토리 / 이성부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박형준
“이성부가 뛰어난 시인이드라.”
“……”
“이군에겐 미당다운 데가 있드라. 전연 생각지도 않는 것을 해치워버린 것처럼, 그렇게 대담하게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걸 이군은 몇날 며칠이고 달라붙어 해치웠을걸.”“……”
“좋은 시는 그런 의외의 힘을 가져야만 되는 게야.”
최하림 시인이 자신의 시를 뽑아준 박목월 선생을 회고하는 산문의 한 대목이다. 1964년 1월 선생댁을 방문하면서 시작되는 이 산문의 인상적인 장면은 ‘가난의 상상력’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교감이다. 그 첫째는 최하림 시인의 결혼식장에서 생긴 일이다. 선생은 새처럼 가슴이 뛰는 어린 신부를 앞에 두고 “시인은 가난하니, 가난을 축복처럼 달게 받으면서 살아야 된다.”고 주례를 했다. 또 하나는 6·25로부터 4∼5년 뒤 선생이 《학생계》에 연재했던 〈소녀의 서〉라는 글에 실린 남쪽 지방의 어느 여학교 교장의 이야기다. 6·25 직후의 폐허 위에 세워진 바라크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장 선생은 학생들이 이런 거친 환경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파 꽃씨 한봉지씩을 나눠준다. 고교시절 이 연재산문의 애독자였던 최하림 시인은 그 꽃씨가 엉뚱하게 소녀들이 아닌 자신의 가슴에 뿌려져, “그 꽃이 가난한 시인으로 나를 성장시켰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란 것이 가난을 먹고 사는 동물은 아니다. 위 글에서 최하림 시인 역시 “시인이 가난하고 고독한 자임엔 틀림이 없지만 시인의 시는 그 가난과 고독을 자기로부터 밀어내어,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물건처럼 조명해야 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이런 가난의 의미를 67년이든가 68년, 관철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박목월 선생과 음식을 들면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성부가 뛰어난 시인이드라.”
“……”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인 삼선교 입구역으로 가는 동안 십수 년만에 최하림 시인의 에세이집 《붓꽃으로 그린 시》(문학사상사)를 펼쳐들고 위 대목이 포함된 산문을 읽었다. 최하림 시인은 내 대학시절 은사였고, 나는 선생을 통해 이성부 시인을 알게 됐다. 약속장소로 마중나온 이성부 시인과 그의 직장으로 가기 위해 차를 잡았다. 그는 작년 8월, 근 30여년 동안 근무했던 한국일보사를 그만 두고 성북동의 《뿌리깊은 나무》로 직장을 옮겼다.
차 안에서 성북동은 축대로 이뤄진 동네라고 생각했다. 길 양 옆으로 높다랗게 펼쳐진 견고한 축대들…… 저들도 무릎이 아플까. 계단으로 이뤄진 빈민촌 산동네의 축대들에 비하면 저건 견고한 성채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란 무릎이 비어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물이 차는 무릎을 밤마다 앓는 소리를 하며 만지는 사람들의 비명은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란 기껏해야 낮은 울타리 너머로 훤히 보이는, 남루의 일상을 헹궈낸 빨랫줄의 작업복으로 간신히 가린 삶이다.
택시 안에서 이성부 시인은 탈옥수 신창원이 턴 데가 이 동네라고 얘기한다. 이곳의 삶을 들여다 보려면 ‘성북동 비둘기’들이 모두 떠난 자리를 향해‘월담’하여 ‘침입’할 수밖에 없다. 서로 상반된 두 곳의 축대는 계급간에 서로 합일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를 운명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전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내 청춘 한자락을 짙게 물들였던 이성부 시인의 봄. 이 시는 그늘과 빛의 합창, 혹은 낙관과 비관이 절망과 희망이 한뿌리로 올라오는 신새벽의 들녘 같은 생기를 담고 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 학번의 문청세대들은 이 시가 포함된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로 나온 그의 시집 《우리들의 樣式》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깜깜하고 혹독한 세월 속에서 어둠을 초극하여 사랑으로 껴안고자 하는 열망이 행간에 가득한 이 시의 강렬한 생기에 감전되지 않은 문청이 있었을까. 고독을 자기로부터 밀어내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물건처럼 조명해야 된다는 ‘가난의 상상력’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성북동의 축대여, 네 밑자락에 흐르는 어둠의 긴 뿌리에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길이 흐르고 있음을, 앓는 사람들의 무릎이 울고 있음을…….
대개 이성부 시인의 출발점에 대해 평자들은 ‘전라도/백제/광주’라고 말한다. 이 무렵의 그의 시는 6∼70년대의 혹독한 어둠을 응시하고자 하는 자세가 고난과 초극이라는 주제로 나타나 있다. 69년에 이근배, 김현 등 친구들이 돈을 모아 3백부 한정판으로 간행한 《李盛夫詩集》(시인사)을 필두로, 70년대에 절판된 첫시집의 시들이 상당수 포함된 《우리들의 糧食》(민음사), 《百濟行》(창작과비평사)을 냈고, 81년 《前夜》(창작과비평사)를 출간한, 그러니까 70년대를 전후로 집중적인 시작활동을 펼친 시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모더니즘 취향의 초기시에서 민중의 고난, 혹은 서민의 정한을 담은 리얼리즘으로 이향한 것으로 평가받는 〈전라도〉연작, 〈백제〉 연작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아침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짐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전라도 2〉에서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머지 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
노인은 다만
성난 사랑을 퍼올린다
(…중략…)
불은 짊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
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전라도 7〉에서
어떤 帝王도
죽은 농부의 아내를 꺾을 수는 없다
삼베 찌든 몰골로
유복자를 기르고, 이마의 땀을 닦고,섞이는 눈물
코 풀고 손등으로 닦아내지만,
─〈百濟 1〉에서
이와 같이 이 연작들은 고향 광주, 영산강을 무대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넘어서서 변두리로 밀려난 소외된 서민들의 정한을 담아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한이 응결된 결핍의 상징”(정한용, 〈새벽에 다 부르지 못한 노래〉)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정한용씨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아침 노을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니…… 아침이면서 노을이라는 모순 어법 속에는, 시인이 의미하는 바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침이 새로운 활력으로의 탄생을 말한다면 저녁은 끝나가는 죽음의 시간을 상징한다. 시인은 바로 전라도에 그런 모순의 두 가지 역사적 속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어둠’이라는 중심이미지를 둘러싼 역사적, 시대적, 현실적 고난의 장소가 전라도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라는 또다른 중심이미지를 둘러싼 고난의 능동적 수용에 의해 그 극복을 ‘꿈’꾸는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지적한 것은 타당해보인다. “노여움의 푸른 잠”(〈전라도 1〉)이라는 모순된 시구도 이러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하다. “아스팔트는 부릅뜬 눈, 붉디붉은 입술, 팔뚝 휘젓는 끈기의 힘, 꿈틀거리는 고요하고 다시 소리치는 胴體…… 아스팔트는 아직 굳센 핏줄을 가지고 있다.”(〈아스팔트〉)는 것 역시 서민의 힘에 대해 낙관적 믿음을 표출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80년대 광주의 참상은 그로 하여금 ‘언어에 대한 절망과 배반’을 경험케 한다. 그순간 광주에 있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허위를 옹호하는 참람한 언어 앞에서 그는 긴 침묵으로 대응했다. 89년에 간행한 《빈 산 뒤에 두고》(풀빛)에서 그가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죽음을 그토록 노래했음에도 죽지 않았다./나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流配詩集 5)고 자신의 상처를 후벼파는 것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그렇다고 비겁함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까운 죽음에 눈돌리는 시들이 있다”(〈寓話〉)며, 해설을 쓴 김현의 지적대로 “고향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은 바로 태어남,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가 80년 가을부터 산에 몰입한 것도 ‘언어에 대한 회의’와 ‘무자비한 세계의 폭력’에 대해 자신의 몸을 굴림으로써 그리고 스스로를 고난에 빠뜨림으로써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맞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또 한 차례의 7년간의 침잠 끝에 96년 출간한 여섯번째 시집 《야간산행》(창작과비평사)의 첫머리가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성부 시인은 1942년 전남 광주시 대인동 23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대에는 요즘처럼 ‘역’이라고 하지 않고 ‘정거장’이라고 부르는, 광주 정거장에서 3백미터쯤 떨어진 초가집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철길 너머로는 끝이 안 보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철길 아래의 굴다리를 지나 길게 뻗은 둑길을 조금 걷다보면 넓고 깊은 경향저수지가 나타났다. 둑길에 펼쳐진 팽나무 고목들은 아이들의 몸이 들어갈 정도로 홈이 컸는데 어른들은 그것이 구렁이가 사는 구멍이라고 했다. 멀리 태봉산과 야트막한 야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저수지와 들과 함께 모두 번화가로 변했다. 이 들판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벼〉의 무대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해방과 관련된 유일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할머니 등에 업혀 광주역 광장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검은 얼굴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내들이었다. 나중에서야 이들이 일본군 패잔병들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 수창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경험했다. 북쪽 멀리 장성(長城) 쪽에서 대포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의 걱정스런 얼굴과 수근거림에 이어 “피난할 사람은 피난하라.”고 번복되는 다급한 마이크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해 여름 3개월여 동안 무등산 아래 ‘꼬두메’라는 마을과 잣고개 너머 ‘신촌’이라는 산골마을에서 가족들이 피난살이를 했다. 숨어 있던 아버지는 총을 든 인민군들에게 끌려갔다. 6·25가 일어날 때까지 광주소방소에서 불자동차를 운전했던 소방관인 아버지는 공무원이기도 해서, ‘공무원은 다 죽인다’는 인민군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끌려간 지 3일만에 아버지는 혼자 돌아왔는데 부둥켜안는 할머니에게 “도야지 고기를 잘 얻어먹고 왔소. 운전허고 불 끄고 다닌 것이 머시 죄가 되냐고 헙디다.”고 말했다.
그는 그해 여름 잣고개 너머에서 수박밭을 재배하는 농사꾼인 할아버지와 지내기 위해 20리 되는 산길을 걸어 시내의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수창 초등학교의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던 그는 한번은 시내로 나갔다가 미군의 B29편대가 광주역과 인근의 커다란 곡식창고를 폭격하는 것을 보았다. 공습경보가 울리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네거리의 하수도 맨홀 속으로 대피했는데, 말하자면 방공호인 이곳에 이미 많은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요란한 굉음과 폭음이 수십 차례 지나간 후 밖에 나와 보니 하늘이 온통 온갖 쓰레기와 검은 연기로 꺼멓게 덮혀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아우성이 거리를 메웠고 들것에 가득 주검들이 실려가고 있었다. “아홉살 때였다./목소리가 울려왔다./꼬두메에 올라 먼발치로/나는 은비늘처럼 빛나는 전쟁을 보았다./쌕쌕이는 푸른 하늘에 곡선을 그으며/광주를 때려 부쉈다./아홉살 때였다./나는 가까이서 처음으로 죽음을 보았다.”(〈그해 여름〉) 하지만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탓으로 어린 마음에 죽음을 소멸이나 슬픔으로 보기보다는 ‘어째 우리편은 비행기가 없을까.’하고 생각했다.
광주가 수복되고 그해 가을부터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 선수가 되어 공을 찼는데, 이때의 경험이 신문사 재직시절 아침마다 조기축구를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 고모가 읽다 만 연애소설들인 《순애보》 《청춘극장》, 훗날 레미제라블의 번안임을 알게 된 《아 무정》등을 몰래 훔쳐보며 책읽기에 불을 댕겼다. 고모를 통해 문학에 빠져들게 된 셈이었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교사가 되기 위해 광주사범 병설중학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축구부를 그만두고 ‘1일 3백 페이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책상 앞에 붙이는 등 책읽기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등의 시를 접해본 것도 이 때였다. 3학년이 되면서 진로를 문학에 돌렸다. 황동규, 이제하, 마종기 등의 시가 실린 〈학원〉지에 자신의 시를 투고하여 활자화되어 나온 것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결국 집안의 뜻을 져버리고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사범 본과 대신 인문계 고교인 광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문계 명문고이면서도 ‘시인의 학교’라고 부를 정도로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배출한 학교라 마음에 들었다.
입학하면서 문예반 활동에 들어갔는데 이때 김현승 시인을 뵙게 되었다. 조선대 교수로 있던 김현승 시인의 댁이 있는 양림동에 선배들을 따라 가면서 선생으로부터 사숙하게 되었다. “자췻방에서 젖은 톱밥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글을 쓴 문순태씨와 함께 일요일마다 찾아가 대학노트에 그동안 쓴 시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보여드렸다. 〈문학단체 무용론〉을 발표할 만큼 대쪽 같던 선생의 성품과 인생관, 문학관 등이 사숙하면서 은연중에 배어들었다.
전국 규모의 고교현상문예를 휩쓸며 기고만장해 있던 고교 3학년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이훈’이란 이름으로 시를 투고해 1석, 2석으로 당선됐다. 당선 1선작은 〈바람〉. 박봉우, 박성룡 등과 함께 3년 선배였던 박경석씨가 당선 3석이었다. 심사를 맡았던 김현승 시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놔야 할 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선생도 당선된 작품이 그의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1월 1일자 신문을 받아보니 자신의 시와 함께 “이훈씨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대단한 솜씨”라는 평이 실려 있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문예장학생으로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김현승 시인도 이 해에 서울의 숭실대 교수로 부임했다. 김광섭, 황순원, 조병화 선생이 포진해 있던 경희대는 말 그대로 문학의 요람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올라온 전상국과 단짝이 되었고 영문과에 다니던 김용성씨와도 어울렸다. 3학년 때 광주고교 후배인 조태일이 들어와 모두 지기가 되었다.
4·19는 교복을 찾으러 친구와 청량리역으로 나갔다가 맞게 되었다.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이문동 자췻방에서 걸어서 청량리역까지 갔는데 차도가 온통 사람의 물결이었다. 저절로 대모대의 일원이 되어 시내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종로 4가에 이르러 친구와도 헤어지게 되었고 동대문 경찰서 근처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다음날 일찍 학교에 가니 정문에 탱크와 군인들이 서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시국이 어수선해도 시쓰기는 게을리하지 않아 신촌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김현승 시인에게 시를 보여드렸다. 5·16이 나던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소모의 밤〉이 첫 추천을, 이어 〈백주〉로 2회를 받고, 3학년 때 〈열차〉로 추천완료했다. 추천은 모두 김현승 선생.
그런 다음 영장이 나오자 군에 바로 입대했다. 서울에서 더이상 버틸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2년간 철도 이동헌병대에서 중대행정병을 맡아 부산, 대구, 대전에서 복무했다. 제대해서 곧바로 광주집에 틀어박혔다. 집안이 어려워 복학할 형편이 아니었는데다가 시인으로 데뷔했다고 해서 어느 한곳에서도 청탁서가 날아오지 않았다. 66년에는 최하림 시인의 서울 장위동 자췻방에서 식객노릇을 하기도 했다. 지붕이 왼쪽으로 한참 기울어지고 툇마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폐가와도 같은 집에서 엄동설한에 오돌오돌 떨며 지냈다. 최하림 시인은 돈이 떨어지면 굶고 지내는 게 보통이었는데, 힘이 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이불을 펴고 누워 잠만 자는 그의 손목을 끌고 장위동 입구 외상 튼 선술집에서 같이 밥 대신 막걸리로 끼니를 때웠다.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가난한 화가들과 문인들이 모이는 금남로통의 ‘오센집’이라는 선술집에 매일 드나들며 막걸리에 취한 채 집에 돌아오곤 했다. 거기에서 인텔리의 젊은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벽초 홍명희를 비롯, 박태원, 이태준, 임화 등을 소상히 알고 있는 그와 격의 없이 친해져 그를 주인공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시가 67년 동아일보에 당선, 〈우리들의 糧食〉으로 게재된 〈노동자의 술〉이었다. 주인공이 된 그 노동자는 당시 광주에서 가장 높은 7층짜리 건물을 올리던 광주관광호텔 신축공사장의 인부였다. 투고 당시 결혼을 약속한 아내의 남동생 이름인 ‘한수현’을 빌렸다.
은사 조병화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의 성문각 출판사에 취직하여 고입, 대입 국어참고서를 집필, 편집,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한림출판사로 직장을 옮겼던 68년 7년간 연애했던 한수아씨와 결혼, 남가좌동에 터를 잡았다. 남가좌동의 모래내에 보증금 만원에 월 천원짜리 사글세방으로 출발했는데, 모래내는 비만 오면 진창길이 돼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 만큼 변두리였다. 이후 지금까지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이때 김현, 염무웅, 김지하, 김치수, 김주연, 김승옥, 이문구와 자주 어울렸으며 고은 시인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혜화동에서 하숙을 하던 염무웅을 도와 그가 맡아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1년간 참여하고 김현, 김화영 등이 주도한 《68문학》에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후 독일의 젊은 작가들 모임인 ‘47그룹’을 연상시키는 ‘68그룹’은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4·19세대, 또는 한글세대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68문학》은 몇년 후 계간지 《문학과지성》의 모태가 되었다. 이외에도 박성룡, 박봉우 등이 주도한 《영도》 동인에 참여했고 권오운, 김광협, 최하림과 함께 《시학》 동인을 결성했다. 《시학》 동인은 최하림 시인이 표지디자인을 맡고 본문 종이를 중질지로 쓰는 등 호화판으로 볼륨있게 꾸며 선배시인들의 부러움을 샀는데 창간호가 끝내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어려웠던 시절, 호주머니를 털어 고급동인지를 만든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출판사들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그는 “어떻게 하면 직장을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일보에 기자모집 사고가 실린 것을 보고 근무하면서 한달여 동안 몰래 시험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여 69년 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신문사에 들어간 후 택시 운전수, 목수, 선생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모래내 서민들과 조기축구를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가끔 일요일에 고기를 잡으러다니는 등 애·경사를 같이 하면서 서민적 정서가 자신의 체질에 맡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언어들이 횡행하는 모더니즘 풍의 시를 버리고 서민의 정한에 뿌리박은 시들을 체질화하기 시작했다. 74년에는 유신체제를 거부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으로 사장실에 호출이 됐는데 사장이 양주를 클라스잔에 가득 따라주며 마시라면서, “대통령이 내 친구인데 그러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
70년대 말부터 신문에 인간문화재를 연재하면서 “조선 땅 구석구석 안 돌아다닌 곳 없는/제비 같은 쇠꾼 얼굴도 보이누나”(〈상쇠 崔씨〉), “크낙한 어둠 속의 어둠을 잡아 찔러, 두루 쓸모있게 만들어내는 친구가 있거니”(〈曺서방〉) 등 전통문화예인들의 버림받은 삶을 조망했다. 이러한 작업은 《前夜》 이후 9년만에 나온 《빈 산 뒤에 두고》에 나오는 연작 〈유배시집〉의 다산 정약용, 조광조, 허균, 송시열, 정희량 등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한 지식인의 초상을 그린 시들로 이어진다. 또한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하면서 만난 이름 없는 서민들에게 붙인 헌시들에도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에게서 올곧은 정신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그는 고은의 〈만인보〉에 한발 앞서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 봄 고향 광주에서 터졌던 비극으로 인해 언어는 그에게 깊은 절망감으로 각인됐다. 계엄령 하에서 활판교정쇄를 들고 시청으로 중위, 대위들에게 검열을 맡으러 다녔고 어떤 진실도 보도될 수 없었다. 광주의 진상은 언론에 의해 ‘빨갱이’와 ‘폭도’의 난동으로 매도됐다. 그는 “진상을 밝혀주는 것이 언어의 힘인데, 언어가 허위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일체의 시작활동을 중단하고 80년 가을 현실도피와 지기 학대를 겸한 등산에 몰입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지,‘저 산은 하눌산이여.’
‘하눌님이 계시는 집이여.’
산에 올라가서,하느님을 만나서,물어볼 것이 참 많았지만
부탁할 것도 참 많았지만
나는 훨씬 뒤에야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에야
이 산꼭대기에 오를 수가 있었지
입석대 끝에서 날고 싶었지.
─〈무등산〉에서
이제 광주고교 다닐 때 건빵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섯 시간을 걸려 무등산의 정상에 올라 희망과 낙관의 메아리를 듣던 산행이 될 수가 없었다.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20∼30대 때에는 거의 산을 오른 적이 없던 그가 40대에 접어들어 고통으로서의 산의 세계에 탐닉했다. 중학교 다니던 아들과 함께 구례부터 세석평전, 증산 등지까지 지리산을 하룻만에 종주한 적도 있었다. 일간스포츠 산악회인 월악회의 일원으로 전국 산악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일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츰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과 사찰, 인물들의 흔적에 관해 공부를 하는 동안 자신이 산과 더불어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산을 탄 지 10년쯤 흐르니까 자연 《빈 산 뒤에 두고》에 담겼던 언어에 대한 불신과 비참한 패배의식도 조금씩 산의 넉넉한 품 속에서 씻기기 시작했다. 산시 등의 글이 그제서야 나왔다.”고 밝혔다.
90년대 초반부터는 암벽등반에 도전했다. 월악회에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코오롱 등산학교 강사를 초빙하여 인수봉, 선인봉 등지에서 암벽등반을 했다. “사람들은 20대 때 암벽을 타서 30∼40대에 그만 두는데 나는 50대 때 시작해서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직벽 1백미터의 높이는 공포감, 무서움, 팽팽한 긴장감을 주었다. 그러나 바위의 미세한 틈에 손톱 하나만 걸치고, 손톱의 힘으로 어려운 피치를 돌파해갈 때 쾌감이 증가되었다. 이렇듯 산과 온몸으로 조우하면서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젊은 시절의 급한 성격과 흥분이 가라앉고 참을성과 포용력이 생겼다.
예전에는 내 길 가로막는 것들은
모두 敵으로 여겼으나
산에 오르면서부터는 가로막는 것들이
나와 한몸으로 어우르는 것을 알았다
가로막는 것들은 그러므로 이미
나를 떨리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화강암 3〉에서
《야간산행》은 산시이면서도 그 흔한 꽃이름과 나무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전의 시에 보였던 남성적 강인함이 더욱 배가된 듯하다. 화강암, 숨은 벽, 바위타기 등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투성이 산정을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초극의 시어가 어디를 펼쳐봐도 자리잡고 있다. 그가 산을 타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도 계곡이나 바위로 된 험한 능선인 ‘리찌’를 돌아서 갈 때이다. “잘못한 일 너무 많아서 저리 땀 흘리며 안간힘을 쓰나 그래도 살겠다고 저리 부비적거리나 어거지로 올라와서 두 팔 벌리고 푸른 하늘 읽어본들 무슨 소용이더냐 올라오는 과정 이미 바르지 않았으니”(〈부끄러운 등반〉) 그는 지난 해 한국일보를 그만 두고 암벽등반을 같이 할 사람이 없어 백두대간을 등정하고 있다. 한달에 두번 둘째 셋째 토요일 밤 세시부터 야간산행을 한다. 지리산 천황봉에서 출발해 현재 속리산까지 와 있다. 내년 휴전선 향로봉을 정복하면 끝이 난다. 이미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란 연작시를 20편 가량 써놓은 상태며 앞으로도 2∼3백 편은 더 쓸 작정이다. 또 《전야》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여순사건 주동자들의 이야기를 형상화할 장시도 구상 중이다.
“자연을 구경하러 다닌다는 유산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산에 전적으로 빠져들어간 사람들과 친하게 되다 보면 그들이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손가정이거나 부모, 형제가 없는 등산에 빠져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다.” 앞으로 그의 시가 이 세상에서 추방된 쓸쓸하고 외로운 영혼들에게 초점이 맞춰질 것임을 예견케하는 대목이다. 불우한 사람만이 시대의 아픔과 배를 대고 강인한 정신으로 어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숨어 있다. “나는 민족문학의 구호주의에는 늘 한발 비켜 서 있었다. 내가 시를 쓴 것은 사랑과 관용으로 껴안을 수 있는 서민들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시는 그들과 나의 동질성을 확인케해주는 작업이었다. 이젠 인간 삶, 정한, 그 깊이와 원형을 찾아가는 데 관심이 있다.”그는 또 자기의 생각, 노여움, 슬픔이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라는 형식으로 배어나오는 것이지 시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전력투구하는 것에도 회의한다.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운명이다.” 그러니 시인이여, 산을 타서 더욱 외로워지시라,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니.(199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