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예고편 / 정해원
나무들 고뇌를 벗고 알몸으로 일어서고
바람은 3악장의 선율로 퍼지는 날
빈 공원 먼 혀고 위로 철새 한 쌍 날고 있다.
찬바람 한 자락이 목덜미를 스쳐 간다.
노인의 흰머리에 붉은 노을 젖는 저녁
회색의 짙은 실루엣이 일렁이며 다가온다.
마지막 남은 온기溫氣 식어가는 계절의 끝
다 낡은 필름처럼 떨고 있는 내 목소리
자막도 음향도 없는 겨울 예고편이 시작된다.
겨울 플라타너스 / 정해원
모든 것 얼어붙은 도시의 포도鋪道에서
한그루 가지 잘린 나목으로 울고 선
청청한 여름의 영광 벗어버린 이 엄동.
분노처럼 질주하던 스무 살의 그 가로街路에
수만 개 푸른 잎으로 환호하던 내 목소리
오늘은 싸락눈 내리고 발가락이 시려온다.
창을 닫고 숨죽이고 눈물로 혼불 끄고
살면서 다친 상처 다독이는 이 저녁에
한겨울 알몸이 되어 혼자 떨고 서 있다.
겨울 그림자 / 정해원
가을은 절전을 넘어 떠날 채비 하고 있고
허허한 바람벽에 허상으로 뜨는 계절
희미한 겨울 그림자가 일렁이며 오고 있다.
문밖에 서성이며 헛기침하고 하고 있다.
펄럭이는 회색 깃발 나직한 동천冬天에는
펼쳐 든 그 하늘 위로 철새 한 마리 날아간다.
침묵의 숲속에는 겨울새 울지 않고
절망의 이 시대에 말을 잃은 나를 본다.
오늘은 눈 귀를 막고 겨울잠이 들고 싶다.
하단에서 / 정해원
말없이 죽어가는 바다여! 강물이여!
나직이 내려오는 잿빛의 하늘이여!
회심곡 구슬피 부르던, 그날의 노인이여!
천만년 그 역사도 휘감아 흐르는 강
회한의 지난 시간 가려주는 출렁임이
떡버들 휘어진 가지에 잠깐 머문 바람이여!
바닷가에서(8) / 정해원
파도가 달려와서 자빠지는 모래톱에
스무 살 적 새겨뒀던 내 젊은 발자국의
그 흔적 찾아 헤매는 부질없는 어느 하오.
정적에 싸여있던 오막살이 집 한 채는
세월에 휩쓸려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해당화, 꽃 같은 웃음 이빨 하얀 계집애는.
아직도 내 가슴에 출렁이는 그 바다와
활동사진 필름처럼 뇌리에서 돌아가고
수평선 먼바다 향해 고함 한 번 질러본다.
동백꽃 / 정해원
소금기 묻은 바람
울타리를 넘어오면
발갛게 윤이 나는
꽃잎은 뜨거웠다.
꽃바람
불러주는 회심곡
내 문물도 빨갛다.
길 / 정해원
무명의 풀꽃들이
살아나고 쓰러지는
세상의 시작에서
끝나는 그곳까지
내 영혼
지향도 없이
외롭게 걸어간다.
바둑을 두다가(2) / 정해원
묘수만 찾으면서
살기만 급급했다.
세파에 부대끼다가
사양斜陽의 비탈길에
끝끝내
축으로 몰려
생을 마감해야 하나?
- 『겨울을 탁본하다』(2024. 한글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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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겨울을 탁본하다』_정해원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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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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