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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글방 스크랩 밥 딜런 (Bob Dylan) 미국의 팝, 포크 싱어송라이터, 시인
자운영 추천 1 조회 127 16.10.18 16: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밥 딜런 (Bob Dylan) 미국의 팝, 포크 싱어송라이터, 시인

 

Bob Dylan - Azkena Rock Festival 2010 2.jpg


밥 딜런(Bob Dylan, 1941년 5월 24일~)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시인,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Robert Allen Zimmerman)이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비공식 작자와 저항음악의 대표로서 사랑을 받았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그리고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가 중 한명으로 꼽힌다.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딜런은 10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61년에 중퇴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우상인 포크 가수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


뉴욕에 도착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의 클럽들을 전전하며 연주하던 그는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


 


그 후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 의 성공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닉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적인 가사는 대중음악에서의 가사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치도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언론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며,


당시 비틀즈를 위시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일렉트릭 사운드에 자극을 받아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록 밴드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키보디스트 알 쿠퍼를 대동하고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인 사건은 수많은 대중과 포크 팬들의 야유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지만,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전환을 확고하게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창조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반으로는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가 있다.


1966년 7월, 오토바이를 타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딜런은 록 밴드 더 밴드와 함께 잠적하여


주로 루츠록(Roots Rock) 장르의 음악을 만드는데, 이때 만들어진 곡들은 부틀렉 형식으로 떠돌아다니다가


1975년 The Basement Tapes라는 이름으로 음반화된다.


또한 1967년 즈음에는 컨트리로 전향하여 컨트리의 본고장인 내슈빌에서 컨트리록 음반 John Wesley Harding(1967),


 Nashville Skyline(1969)을 녹음해 발매하며 이후의 컨트리록 유행을 선도한다.


 


1970년대 초반에는 주로 더 밴드와 함께 작업했고, 친구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1971년에 주최한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Concert For Bangladesh) 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아내와의 불화와 이혼을 겪으며 Blood on The Tracks(1975), Desire(1976)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활발한 공연 투어를 벌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는데, 당시의 음악은 대부분 종교적 주제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미국 연방법원이 판결문에 그의 가사를 인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 폴라음악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다수 참가한 자선 프로젝트 'USA for Africa'에 참가하였으며,


1988년, 조지 해리슨, 로이 오비슨, 제프 린, 톰 페티와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하였다.


 


1999년 타임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밥 딜런을 선정했다.


 


2000년에 영화 《원더 보이스》에 나온 그의 노래 "Things Have Changed"와 함께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으로 퓰치처 상의 표창장을 받았다.


2004년 10월에 출판된 회고록「Chronicles: Volume one」(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은


뉴욕 타임스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19주간 머물렀다.


 


2009년 4월 28일 딜런은 그의 33번째 스튜디오 앨범 Together Through Life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와 '가장 많이 팔린 200개의 앨범'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UK앨범 차트에서는 발매된 지 1주 만에 1위에 올랐다.


2010년 3월 31일, 데뷔한지 48년 만에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2016년 10월 13일,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미국 포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이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존 바에즈와 피터, 폴 앤 메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밥 딜런이 지은 곡들 가운데 "Restless Farewell"은 더 클랜시 브라더스가 부른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파팅 글래스를,


"Ramblin' Gamblin' Willie"는 블넌 온 더 모어를, "Farewell"은 잉글랜드 고전 포크송 리빙 어브 리버풀을,


"Pretty Paggy-O"는 메이드 어브 파이프-이-오를 패러디한 곡이다.


밥 딜런이 지은 반전평화 가요인 "Blowing in the Wind"는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


피터, 폴 앤 메리 등등도 불렀다.


한편 대한민국의 19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은 미국 포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김민기, 양희은등의 가수들은 모두 통기타를 사용하는데, 미국 포크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호너사의 하모니카 시그네춰가 있는 뮤지션이다.


 


웨일스 시인 '딜런 토마스'에서 스스로 개명하였다고 보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서부극 《건스모크》의 등장인물 '마샬 맷 딜런'의 어간에서 차용하였다는 설도 있다.


 


1962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총 35장의 앨범을 발표.....(비정규 앨범, 컴필레이션, 라이브 앨범 등은 제외)


 


밥 딜런 (Bob Dylan) 노벨문학상 수상에 따른 각종 기사 모음


 


노벨문학상 116년만의 파격, 미국의 대중가수 '밥 딜런'에...
노벨위원회,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네” -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중에서
 

[한국NGO신문]은동기 기자=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위원회가 반전과 평화, 저항과 자유를 노래한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 밥 딜런(Bob  Dylan)을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노벨위원회는 음유시인이자 대중가수인 밥 딜런의 노멜문학상 수상 이유에 대해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


(“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고 밝혔다. 
 
실로 파격적이고 의외의 일이었다.


노벨문학상 116년 역사상 시나 소설 등 순수 문학 장르를 벗어나 대중 가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례가 없었기에


밥 딜런의 수상은 그래서 국내외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심지어 논란이 일고 있기까지 하다.


노벨문학상 사상 116년 만에 최초로 문학 작가들을 제치고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인 연세대 국문학과 정과리 교수조차도 14일 CBS라디오 프로그램, ‘신율의 출발 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


“한 10여 년 전부터 이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정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정 교수는 “아무래도 일단 순수 문학이 아니니까 무의식적으로 제외하고 있었던 셈”이라며 


“ 노벨상 위원회가 문학의 영역을 단순히 문학작품에서가 아니라, 문학이 들어나는 모든 문화적인 생산물들에서


그 문학을 찾겠다고 그 영역을 확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략 12세기 전후로 해서 유럽에서는 투르바두르 투르베르라고 해서 음유시인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그 음유시인들이 사실상 오늘날 문학의 기본 토대를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실 밥 딜런은 음유시인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고 그걸 발전시킨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어느 시인이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문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표현할 때 그걸 감동적으로나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그게 다 문학적인 것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노래도 역시 그런 문학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번 노벨문학상의 결정은 이제까지의 문학서적을 잣대로 평가하던 전통적 방식을 탈피,


다른 장르인 대중음악과 가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노벨문학상 심사의 외연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밥 딜런의 음악과 시 세계

‘Blowin' in The Wind’, ‘Knockin' on Heavens Door’, ‘Like A Rolling Stone’, ‘Visions Of Johanna’ 등에서 드러나는


그의 곡들은 밥 딜런의 시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그의 가장 큰 문학적 무기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이미 밥 딜런의 노랫말을 연구하는 강좌가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다의적이고 문학적 향기와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그의 시와 음악에 대한 관심은  국내.외를 불문코 진행 중이다.


대중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스타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던 관계로 이번 노벨상 수상은


결코 새삼스런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밥 딜런은 뮤지션으로 태생적인 오만함과 굴곡 많은 결혼생활이 말해주듯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의 전형이었다.


그의 이러한 캐릭터는 1960년대 반전운동과 청년문화, 기성세대의 낡은 질서에 저항했던 청년 문화를 대표했다. 


 




▲ Bob Dylan이 홈페이지를 통해 금년 가을, 그의 밴드와 함께하는 미국내 음악 Tour를 소개하고 있다.  ? Bob Dylan Home page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고은 시인도 일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은 시인은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시를 써왔고 그래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케냐의 응구기와 시응오, 시리아의 아도니스 등과 함께


강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밥 딜런은 그의 가사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거부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의 수록곡 ‘블로잉 인 더 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 대한 그의 분명한 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196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서 저항정신을 대변했다.

씁쓸한 일이지만, 시중에서는 이번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들 두고


1만여 명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자료가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는 이 땅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과 사회적 폐쇄성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게 읽혀지고 있다.

밥 딜런의 앨범은 현재까지 약 1억 3천여 만 장이 팔렸고 11개의 그래미상,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인정받아 퓰리처상도 수상했다.


2012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14일,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 후,


첫 공연 무대인 13일(현지 시간)의 미국 라스베가스 코스모폴리탄 카지노 안에 있는 첼시 극장에서


1960년대 반전과 평화의 상징 곡인 '블로잉 인 더 윈드'를 열창하자 객석에서 특히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왔는데도


묵묵히 노래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음유시인' 밥 딜런 처럼 '귀를 위한 詩' 노래한 한국 가수들


 



【서울=뉴시스】존 바에즈·밥 딜런(사진=존 바에즈 페이스북) 16-10-14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두 번씩 생각 않는 게 좋아요.”(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1963)

미국 포크록 가수 밥 딜런(75)은 자신의 대표곡 제목처럼 홀로 고요했다.

노벨문학상 115년 역사에 처음으로 대중음악 가수가 이 상을 받으면서 온 세상은 떠들썩하지만 그는 정작 초연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에서 호명된 직후

13일 밤 (현지시간)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의 코스모폴리턴 호텔 첼시 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그는 노벨문학상과 관련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딜런다운 선택이었다.

그는 데뷔 48년 만인 2010년 3월31일 단 한 차례 내한공연했을 때 2시간 동안 막바지 멤버소개와 ‘생큐’를 제외하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로지 음악만 들려줬다.

대기실 요구 사항도 단출했다.

화이트 와인 한 병, 재떨이, 물이 전부였다.

본명 로버트 앨런 지머먼 대신 영국 웨일즈의 방랑 시인 딜런 토머스(1914~1953)의 이름을 따와 활동 예명을 삼은 ‘음유시인’은

대신 시 같은 노래로만 관객과 소통했다.

딜런과 과거 연인 사이로 그와 영향을 주고 받은 미국 포크계의 대모 존 바에즈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페이스북에

“반항적이고, 세상을 저버렸으며, 예측할 수 없는 아티스트·작곡인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에 알맞다”고 썼다.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전통속에서 새로운 시적을 표현을 창조해왔다"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처럼 딜런은 세상을 바꿨다.

사랑타령에 머무던 대중 음악에 예술성을 결합해 인권? 반전운동의 음악적 상징이 됐다.

미국의 대중음악은 물론 1960~1970년대 한국 포크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뉴시스】한대수, 가수(사진=하얀나무) 16-10-14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우리나라 1970년대 청춘 문화의 ‘영포크’ 역시 딜런의 영향을 받았다”며

“딜런은 장기간 활동하며 대중음악의 존재감과 무게감을 세상에 알리는데 공헌했다"고 말했다.

철학적이고, 저항정신이 강한 달런의 음악세계는 한국의 포크 1세대에 스며들었다.

"밥 딜런같은 록스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건 혁명적"이라며 '한국의 밥 달 런이라고 불리는 나도 노벨문학상을 줬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한대수 등 한국에서 '귀를 위한 시(詩)'를 부른 가수들을 꼽아봤다.

◇‘한국의 밥 딜런’ 한대수 '포크록의 대부'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 나뭇잎 사이 불어 가는 /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임”(한대수 ‘바람과 나’)

한국에서 딜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가수는 한대수다.

어릴 때 미국에서 생활하며 그의 음악을 접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포크록의 대부’가 됐다.

‘한국 히피 문화의 선구자’로 통하는 그의 노랫말은 딜런의 그것보다 착하고 서정적이다.

“장막을 걷어라 ‘ 나의 좁은 눈으로 / 이 세상을 떠보자 /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 한 번 또 느껴 보자”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라고 노래할 때 한대수의 얼굴은 그가 59세에 낳은 늦둥이 딸의 얼굴이 된다.

◇‘한국 저항 포크의 계보’ 김민기·양희은·서유석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양희은 ‘아침이슬’)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가 쓰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1970년대 운동권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었다.

딜런은 김민기과 양희은을 필두로 이 시대 활약한 저항 포크가수들은 딜런의 자장 아래 있었다.

이 곡이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해석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세상에 초연한 듯한 김민기의 태도와 정신은

오히려 저항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렸다.

“두 손가락에 끼이여 삶과 죽음의 허무를 일으켰다”(서유석 ‘담배’)

‘가는 세월’의 구수한 음색으로 유명한 서유석은 한 때 ‘한국의 밥 딜런’으로 통하며 197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3대 저항 포크가수로 불렸다.

특히 유신 정권의 대표적인 금지 앨범 ‘서유석 걸작집’이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김용호의 시에 김기웅이 곡을 붙인 ‘담배’는 그 섬뜩함이 절정에 달한다.

◇‘딜런의 저항을 선망한 이들’, ‘쎄시봉’ 송창식·윤형주·이장희

사실 쎄시봉은 딜런의 저항 포크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놓여 있지는 않다.

화음 위주의 부드러운 포크의 이 팀은 딜런과 미국에서 같은 시기 활동한 ‘브러더스 포’의 감성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엄혹한 1970년대 딜런의 저항 정신이 이들을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다.

당시 의대생의 모범적인 이미지의 윤형주는 특히 그에 대한 선망이 강했고

송창식과 활동한 ‘트윈폴리오’ 시절 딜런의 ‘블로잉 윈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바람 속에’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딜런을 한국어로 부르다’ 양병집·김광석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 하늘로 나는 돛단배/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 위로 오늘도 애드벌룬 떠 있건만/”(양병집 ‘역’)

양병집은 1970년대 저항 포크를 이끈 한 축이었다.

그는 1973년 ‘전국포크송콘테스트’에서 딜런의 ‘돈트 싱크 트와이스, 잇츠 올라이트’를 번안한 ‘역(逆)’이라는 노래를 통해

3위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이듬에 발매한 앨범 ‘넋두리’에 이 곡을 실었는데 원곡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는 대신 한국 시대상황을 풍자한 가사로 공감을 샀다.

이후 요절한 후배가수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제목으로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누렸다.

“그대 웃음소리 파도가 되어 / 어두운 바닷가 밤비가 되어 / 바위 그늘 밑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 거기에 있네”(김광석 ‘그대 웃음소리’)

‘가객’ 김광석은 1970년대 포크 선배가수들의 계보를 이어간 적자로 부를 만하다.

 ‘그대 웃음소리’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 시적인 작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특히 견줄 수 없는 애끓는 목소리로 ‘음유시인’으로 통했다.

realpaper7@newsis.com

 

2016년 노벨문학상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케냐 출신의 응구기 와 시옹오 사이의 경합 구도로 점쳐졌다.

영국의 도박 사이트인 래드브룩스에서는 수상자 발표 전날까지도 두 작가의 이름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막상 무대에서 호명된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은 소설가가 아닌 사람에게 돌아갔다.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록 가수 밥 딜런이었다.

밥 딜런은 네 번째 비(非)문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이에 따라 밥 딜런과 관련된 서적, 음반의 판매량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모 서점에서는 밥 딜런의 수상을 맞아, 운영 중인 중고 서점 전 매장에서 밥 딜런의 음악을 틀어놓기도 했다.

밥 딜런의 수상 사실은 1953년 수상한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경우와 비슷하다.

나머지 두 사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많은 저술 활동을 한 바 있고,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구토'와 '닫힌 방' 등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남겼다. 자서전 이외의 저서를 가지지 않은 밥 딜런의 내력은 처칠과 유사하게 여겨진다.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대의 수여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처칠은 문학과 가까운 인물은 아니었다.

단, 처칠의 수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저지했다는 데 대한 인사에 가까웠다.

밥 딜런의 수상 사실 또한 일종의 "인사"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밥 딜런이 전적으로 문학의 영역과 무관한 인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음유시인'은 밥 딜런을 수식할 때 종종 쓰이는 이름이다.

밥 딜런 자신도 시인의 이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문인인가보다는 그저 '음유시인'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만 해두면 될 것 같다.

포크 록 가수 밥 딜런의 시는 노래 없이 외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던 까닭에. 

 

 

그렇다면 밥 딜런이 "인사"를 받을 이유는 무엇인가.

답을 찾으려거든, 밥 딜런의 이력을 되짚어보는 게 좋겠다.

밥 딜런은 영국 출신 가수들이 미국 등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시기에 활약한 미국 가수다.

그리고 그 시기, 브리티시 인베이젼으로 대표되는 비틀즈 같은 음악가들이 대개 예외 없이 취하던 태도가 있다.

반전운동이다.

밥 딜런 역시, 당대 반전운동의 중요한 인사였다. 

지나간 시대, 그리고 인류사의 '음유시인'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으로, 자신의 노래와 언어에 대한 인사를 받았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의 수상에서 "인사받을 만한" 가치를 떠올려낼 수 있는 것은 밥 딜런이 그 시절을 살아가는 '음유시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서가 아닐까.  

 

이제, 밥 딜런의 "인사받을 만한" 몇 곡을 소개한다.

여태까지의 노벨문학상 수상 사례와는 달리 책이 아닌, 노래로 기억해야 하는 수상자라는 점에서 2016년 노벨문학을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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