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낮달맞이꽃 필 무렵 / 정선례
알람 소리에 깨어났다. 6시에 이웃 마을 삼촌이 우리 논에 로터리치고 논둑 붙이러 온다고 어제 남편이 미리 말해서 알람을 맞추고 잠을 잤다. 곧이어 창문 너머로 “일어나”라고 외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어났어요.” 밖에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대꾸하고 이불속에서 창문을 바라보니 밖은 벌써 환한 대낮이다. 주방으로 가서 쌀을 담가 놓고 일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니 남편은 벌써 위의 큰 축사 일을 마쳤다. 남편이 들로 나가면서 말했다. 아래 축사일 얼른하고 전화하면 아침을 들로 내오라고.
세탁기를 돌리고 번식우와 송아지 사료를 한 바가지씩 구시에 붓고 볏짚을 한 아름씩 넣었다. 이때 진돗개 청룡이가 장대 높이 뛰기 선수인 양 시멘트벽을 훌쩍 뛰어넘어 내 발뒤꿈치에 바짝 따라붙는다. ‘깨갱, 갑자기 청룡이가 비명을 지르며 내 종아리를 물었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발을 떼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고의가 아니란 걸 저도 알았는지 이내 머리를 조아리며 바라보는 것이 짠해서 옥수수가 섞인 소 사료를 한 움큼 쥐어 손바닥을 펴서 코 앞에 들이밀었다. 발을 밟혔다는 걸 벌써 잊었는지 오도독 아그작 게 눈 감추듯 먹고 또 달라는 눈치다. 강아지를 가만히 입으로 물어 옮기는 것처럼 내 다리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놨다. “이녀석이 그 상황에서도 야생의 본능을 조절했군.”
축사 일을 마치고 빨래를 꺼내 볕 좋은 마당에 널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냇가 건너 논에서 도로가로 이동하고 있다며 밥을 내오란다. 밥과 국은 식지 않게 보온 가방에 넣고 반찬과 막걸리, 일회용품과 음식을 놓으려고 신문도 몇 장 챙겼다. 차 뒤에 자리를 잡고 상을 차렸다. 화물자동차는 앞을 지날 때 대부분 서행하는 반면 승용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아 먼지가 많이 나서 음식에 들어갈 것 같다. 배려가 없어서라기보다 도시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을것이다.
35년 차 농부 맞아? 아직도 일이 버겁다. 집에 돌아와 팥과 녹두 심을 두둑을 만들고 검은색 비닐 멀칭을 씌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이 방법은 햇볕을 막아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하고 보온 보습의 효과가 있다. 바람이 잔잔해서 비닐이 날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밭농사를 대량으로 짓는 집에서는 비닐을 씌우는 기계가 있어 수월하다는 말을 들었다. 일일이 삽으로 흙을 퍼서 덮지 않아도 피복 기계가 알아서 다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부럽다.
우리 집은 논농사와 조경에 필요한 묘목생산과 축사 일이 주업이고 밭에서 나는 작물은 자급자족하고 남는 양은 지인들에게 나눈다. 에구에구 힘들어. 나는 원래부터 일을 못한 데다 아프고 난 뒤로는 더욱 몸에 힘이 없고 쉽게 지친다. 끙끙대며 한 줄 하고 쉬느라고 절반도 마치지 못했다. 마침 논에서 돌아온 남편이 새벽부터 나가 논 고르느라 힘들 텐데도 도와줘서 후다닥 끝냈다. 가뭄에 단비처럼 고맙다. 감자 고랑에 심어 놓은 아삭이 상추를 툭툭 끊어와 수돗가 작은 통에 담아 물을 틀어놓고 밥솥에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주부 경력이 쌓일수록 일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익숙한데다 요령까지 생겨서일것이다. 고기 없이 절구에 찧은 마늘과 들기름을 넉넉히 부어 뒤적인 양념 된장에 상추 두세 장을 포개 갓 지은 밥에 싸 먹으니 꿀맛이다.
오후에는 대파 두둑에 잡초를 뽑고 북 주기를 했다. 어느새 네 시, 축사일 할 시간이다. 소만 키우지 않아도 일이 없을 것 같다. 매일 같은 일 반복하는 생활이 지겹다. 일기예보에 비가 들어 있어 화목보일러에 참나무 가득 넣어 불을 지폈다. 산속이라 밤낮의 기온 차가 커서 불을 넣은 뜨거운 방에서 푹 자야 낮에 쌓인 피로가 싹 풀린다.
주말인 내일은 지인과 산행을 약속했다. 주변의 산을 찾아 능선을 따라 걷는다. 그녀가 직장을 다녀서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다. 등산하고 목욕탕에서 두세 시간 머문 후 밥을 먹고 헤어진다. 나이는 다르지만 마음이 잘 맞아 자주 어울린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실수가 나올 수 있어 깍듯이 서로 존대한다. 저번에 만났을 때 그녀가 말하기를 농사일도 평일에 몰아서 하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주말에는 무조건 쉬란다. 내일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쓰리라.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설레고 벌써부터 기쁨이 차오른다. 정원의 노거수 소나무 아래 널따란 바위 주변에 낮달맞이꽃이 소풍나온 아이들마냥 분홍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