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태사령에 임명된지 10년째이자 47세가 되던 BC.99년에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이릉(李陵) 변호 사건> 또는 <이릉의 화>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이릉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명장 이광의 손자로서 흉노를 토벌하여 빛나는 공을 세웠었는데
어느날 전쟁터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흉노(匈奴)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donga.com%2Fsjdhksk%2Ffiles%2F2013%2F01%2F17947066631359316408.jpg)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습니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릉은 병사 5천으로 수만명을 상대해서 승리하라는
한무제의 과욕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때 답답했던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여기서
침묵은 금이라는 명언을 새겼어야 되는데 그만 이릉을 변호하는 발언을 한거지요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힌 것인데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과
변호하는 말이 한무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지요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광리를 지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장군
이광리(李廣利)는 한무제의 처남입니다
그러나 마누라가 미우면 처남도 미워지기 마련이지요 한무제의 속셈은 이릉을 핑계로 이광리를 제거
하려는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분노한 한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요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태도가 못마땅
했는데 마침 황제의 下問이 있어서 이릉을 변호했던 것이 상황을 더 악화되게 한거지요
이에 분노한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
하기에 이릅니다 이거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서 목숨을 잃게 된 겁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이자
필생의 사업인 史記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일을 맞이하고 보니 어쩔 줄 몰랐습니다
go→
첫댓글 조선왕조 실록등, 實錄이라 불리우나 이 기록은 왕조를 이은 勝者의
기록이므로 실록이 아님이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재평가 받기에 이릅니다.
예로서,,,광해군'입니다. 이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관 하거나
방조한 서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명과 후금 (청나라 ) 과의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이 통치 하였더라면
인조의 '삼전도에서의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는 淸과 군신관계를 맺게 됩니다.
임진왜난의 정국이 수습단계에 있었으나 혼돈은 계속 됩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사마천의 '사기'는 한 인간의 시각으로 기록 되었으며
사실성과 정확성이 높다 하니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살피려면
많은 고뇌가 있을 것입니다. 수고 바랍니다.
엊그제 사기열전 사서 읽고 있는데....2500년의 인물들이 모두~
나오니~ 조악한 머리가 원망스럽습니다요 ^^
@류우천(거창) 덕분에 공부 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