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6.10. 하순
참석자: 통통한토끼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 옥천 > 영동> 지례면> 성주 무흘구곡> 33번국도> 고령 > 26번국도> 화원
> 청도 풍각> 20번국도> 매전면> 삼족대> 선암서원 > 운강고택 만화정> 운문사>
69번 국도> 베내고개 > 신불산 휴양림> 24번국도 언양, 울산> 14번국도, 904번지방도>
양남> 경주 주상절리> 경주 문무대왕릉, 이견대, 감은사지> 14번국도 골굴사> 포항 오천>
포항 기계면> 영천 보현산 천문대> 908지방도> 의성 춘산면> 금성면> 28번 국도> 상주>
보은> 옥천> 대전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오늘은 오롯이 혼자 맘 내키는 대로 달려 봅니다. 신불산 간월재도 한번 가보고 동해바다도
구경하고 보현산에서 딱 트인 조망도 기대하며 달려봅니다만 뭐 인생사 맘 먹은대로 되지
않는걸 다시 한번 느끼며 겸손하게 다음을 기약하는 투어였습니다.
혼자 달리면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싶은 맘에 주유하고 기름떨어지때까지 딱 2번 쉬었네요
총 주행거리 807km를 달리면서도 시간이 짧고 못 보고 온 곳들에 대한 미련이 남는걸 보면
아직 해탈할려면 멀은거 같습니다. 다음은 또 어딜 구경가나.......????!!!!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보은 마로면 원정리 느티나무, 이제 막 추수를 시작하고 있다>
문간 안에 느티나무를 세 그루 심어 놓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특히 서남 간에 심으면 도둑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동구 밖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 하여 자식을 못 가진 아낙네들의 소원목이
되기도 했다. 또한, 봄에 잎이 피는 모습으로 그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는데, 느티나무 잎이 한꺼번에 피게 되면
풍년이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이와 같이 느티나무는 예로부터 우리 가까이에서 늘 보아왔던 우리 삶의 모든 것들과 연관 지어진 정감 있는 나무다. 든든한
억센 줄기는 강인한 의지를, 고르게 퍼져 있는 가지들은 조화로운 질서를, 단정한 나뭇잎은 예의를 상상할 수 있어 예로부터
충과 효와 예의 나무라고 했다. 가을이 되면 붉은색 또는 황금색 단풍이 더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나무다.
옛날 중국에서는 왕이 느티나무 조각을 마찰시켜서 불씨를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 목재는 조각품을 만드는데 특히
목조불상의 주된 재료가 되었다.
우리의 삶 속에 항상 가까이 있는 느티나무는 국립산림과학원에서 그 쓰임새에 따라서 보다 더 가치 있는 품종을 육종해
나가고 있다.
가구재나 무늬판, 조각재로 쓰이는 질 좋은 느티나무 품종을 만들기 위해서 우수한 수형목을 선발하여 채종원을 만들어,
앞으로 그곳에서 생산된 종자로 양묘를 하여 심겨지게 될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단풍색과 우아한 수형을 갖는 조경수로
적합한 느티나무도 연구 개발해 나가고 있다.
사람은 거대하고 장수하는 어떤 생명체에 대해서 무한한 힘이 있는 것으로 믿고, 그 원력으로 닥치는 화를 몰아내고
복을 불러올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수령이 천 년 이상인 느티나무는 대부분 당산목으로 마을 사람들의 숭배 대상이 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느티나무 (우리 생활 속의 나무, 2008. 3. 25.)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첫번째 휴식>
< 삼족대>
[삼족당 김기유]
공의 휘는 대유(大有)이고, 자는 천우(天祐)이다. 금관가락국(金官駕洛國)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자호(自號)는 삼족당(三足堂)이고, 향년은 74세였다. 친구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 같은 분은 가히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는 영웅이라 할 만한데, 당곡(當谷) 운문(雲門)에 지금은 없으니, 아! 애석한 일이로다. 선대부(先大夫) 제학공(提學公)이 사도시 정(司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는데, 그 휘는 준손(駿孫)이다. 왕부(王父, 조부) 집의공(執義公)은 휘가 맹(孟)이고, 증왕부(曾王父)는 김극일(金克一)이니 절효 선생(節孝先生) 바로 그 사람이며, 숙부는 김일손(金馹孫)이니 탁영 선생(濯纓先生)이 바로 그 사람이다. 연산군(燕山君)의 정치가 문란하여 탁영 선생이 저자에서 베임을 당하자 가화(家禍)가 아울러 일어나서 공과 제학공이 다 함께 호남으로 귀양 갔다가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반정(反正)이 있자 은사(恩赦)되어 돌아왔다. 이듬해인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공이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진사과(進士科)에 직부(直赴)되었으나 영영 시골로 돌아가서 선묘(先墓)를 받들었다. 직장(典牲署直長)이 되었다. 이해에 드디어 등과(登科)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배(除拜)되었고 호조 좌랑 겸춘추관 기사관(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으로 옮겼으며, 또 옮겨져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칠원 현감(漆原縣監)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어 석 달 만에 교화가 행해지니 고을 사람들이 신명(神明)처럼 여겼으나 이내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에 군소(群小)들이 권세를 잡으니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여 관작과 과제(科第, 등과(登科)한 자격)를 모두 몰수(沒收)하였고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홍패(紅牌, 교지(敎旨))를 다시 내주었다가 미구에 도로 거두었는데, 마침내 병으로 운문산(雲門山) 우연(牛淵)의 삼족당(三足堂)에서 생을 마치니, 이해 즉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에 삼족당의 북쪽 금곡(金谷)에 장사지냈다. 섬기듯이 하였고 노복(奴僕)들을 대함에는 모두 그 환심(歡心)을 사서 집 안팎이 항상 화목하였으니, 향당(鄕黨)까지 다스리게 된 것은 사실 집안에서 모범을 보인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측실(側室)에 두 아들이 있었으니 김성(金成)과 김생(金生)인데, 모두 집안일을 맡아 할 만한 재간이 있었으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김생은 오래 살지 못하였고 김성은 꺼꾸러졌으니 슬픈 일이다. 김성은 첨사(僉使) 이세전(李世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으니 김진(金津)이고 딸은 군수 이학서(李鶴瑞)에게 출가하였다. 김생은 좌찬성 이장곤(李長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니 김일양(金一陽)이고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 대아(大雅)로서 경사(經史)를 토론하는 홍유(弘儒)이고, 을(乙)이 보면 헌걸차고 키가 크며 사어(射御)에 틀림이 없는 호사(豪士)이다. 서당(書堂)에 혼자 있으면서 길게 노래하고 느릿하게 춤을 추는데도 집안사람이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천성을 즐기면서 영가(詠歌)하고 무도(舞蹈)할 때여서이고, 임천(林泉)에 몸을 의탁하여 낚시와 사냥으로 보내지만 당시 사람이 호방(豪放)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세상을 숨어 살면서 자신을 숨겨 드러내지 않는 것에 민망함이 없어서이다. 우리 동덕자(同德者)로서 본다면 문호(門戶)를 다스림이 크고 깊으니 인(仁)을 함에 부지런한 것이요, 언론이 격앙(激昂)하니 의(義)를 지킴에 굳센 것이다. 선(善)을 좋아하되 혼자 선을 행하고, 널리 증제(拯濟)할 만하되 자신만을 증제하였으니, 천명인가 시운인가? 키나 비를 든 여편네는 빛나는 곤의(袞衣, 곤룡포. 또는 관복)에 수(繡)를 놓을 수 없듯이 용(龍)을 말하면서 뱀을 그리는 것은 나의 졸(拙)함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명(銘)하는 것도 얼굴 두터운 일이다. 명에 쓰기를, 금곡(金谷)에 언덕이 있나니 운문(雲門)의 골짜기로다. 학문 깊은 훌륭한 사람 화산(華山)1)처럼 싣고 있었네. 이름은 만장(萬丈)이나 높지만 무덤의 높이는 4척(尺)이라네. 그곳을 지키는 것 뉘런가? 양양(襄陽)의 한 편석(片石)이라네. [네이버 지식백과] 김대유 [金大有]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행의(行誼) 있는 선비를 구하는 참이었는데, 고을에서는 공을 첫째로 추천하여 전생서
공은 현감 이양(李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4년을 지나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부인마저 서거하니,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부인은 본래 지혜롭지는 못했으나 군첩(群妾)이 모시기를 비아(婢兒)들이 엄한 상전을
나 노부(老夫)는 사람을 허여(許與)함이 대체로 적으나 유독 천하사(天下士)로 허여한 것은 공뿐이다. 갑(甲)이 보면 여유 있는
<서원 옆으로 흐르는 동창천과 소나무가 옛 영화를 대변해주는듯 꿋꿋히 서있다>
[운강고택]
지도상에는 동창천(東倉川)이라 나와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비단내, 금천(錦川)이라 부르기를 더 좋아하는 넓은 시내가 휘도는 금천면 신지리, 곧 섶말은 예로부터 밀양 박씨들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비단폭 같았다던 금천은 운문댐에 막혀 그 이름이 무색하게 바닥을 드러낸 채 탁하고 가는 물줄기로 변해버렸고, 그 위에 가로놓인 긴 시멘트다리와 마을 허리를 관통하는 아스팔트도로는 안 그래도 옛 자취가 사그라든 이 마을의 풍경을 한층 데면데면하게 만드는데, 그나마 다행히 옛집 한 채가 보존되어 묵은 내력을 내보이니 중요민속자료 제106호로 지정된 운강고택이 그 집이다. 이곳에 처음 터를 닦은 박씨들의 조상은 선조 때의 박숙(朴琡)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운문산 하길부(下吉夫)에 진출한 바 있으며, 결혼한 뒤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1595년의 일이었다. 당시는 초가이던 집이 대를 거듭하면서 기와로 바뀌고 규모도 점차 커져갔다. 호를 운강(雲岡)이라 썼던 박시묵(朴時默)은 1829년 옛집을 중건하고 금천가 벼랑 위에 별서(別墅) 만화정(萬和亭)을 새로 지었다. 운강고택이란 집 이름은 그의 호에서 유래한다. 그는 퇴계학파에 속하던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었다. 그뒤로도 1912년 사랑과 안채를 크게 중수하고 가묘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한 또 하나의 튼 ㅁ자형 건물군이 이어지며 사당채가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합하면 집채가 9동에 80칸이나 되는 큰 규모이다. 대지도 1,700여 평이나 되어 두 개의 넓은 마당과 사당 앞의 백류원(百榴園)터, 안채와 사랑채의 뒤뜰 등 널찍한 공간을 여유 있게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강고택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주택 전체의 건물 배열은 평평한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튼 ㅁ자형 건물군이 앞에 나서고 그 왼쪽 뒤편으로 안채를 중심으로
<운문산을 배산하고 동창천을 임수로 선암고택과 도일고택, 그리고 운강고택이 자릴 잡고 있다. 그중 운강고택의 일부인 만화정에 들러본다.>
[만화정] 운강고택말고도 섶말에는 몇몇 고가와 정자와 서원이 있다. 도일고택(道一古宅), 명중고택(明重古宅), 섬암고택(剡巖古宅), 운남고택(雲南古宅) 등은 모두 박씨들이 대를 이어온 고가들이다. 운강고택에서 분가한 탓에 규모나 짜임새가 그만은 못하지만 섶말의 뿌리깊음을 내보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정자는 몸체에서 꺾여 남쪽을 향한 부분이 누마루로 되어 있어서 주변 경치를 조망하기에 알맞다. 누마루 창방의 안팎에는 기문(記文), 제영(題詠)이 새겨진 작은 현판이 스무 개도 넘게 걸려 여기서 바라보는 옛 경치가 빼어났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강이 마르고 다리가 가로질러 그 경치는 변해버렸고, 이제는 오히려 주인 대신 늙은 벚나무가 혼자 지키는 이 정자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집 앞에는 300년쯤 자란 물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다. 엷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늙은 물버들의 가늘고 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만화정은 뒤편 언덕의 짙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그림이 된다. 늘 닫혀 있기도 하지만 그 아니라도 만화정은 밖에서 보는 모습이 좋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강고택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금천을 오른쪽으로 낀 벼랑가에는 만화정이 있다. 운강이 지었다는 별서가 이것이다. 1856년 지어졌으며 ┌형의 정자와 몇 채의
<이렇게 멋지고 기품있는 만화정에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을 위해 머물렀다니......쩝 쩝...웬지 씁슬합니다.>
[이승만의 피난 길]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40]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조선인민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유무형의 피해를 입게되었다.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자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조봉암이 끝까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하는 중입니다.>
<보통 굴뚝은 건물 뒷쪽에 있지만 만화정 뒷마루 돌에 연구구멍이 네모지게 만들어져 있어 연기가 저리 나옵니다.>
<만화정에서 바라보는 동창천>
< 그 옛날 저 무쇠솥 뚜껑을 뒤집이서 지짐이나 부침개를 부쳐 먹었는데.....생무를 꼭지를 만들어서 기름을 휘휘 드루고
장작불에 기름이 지글지글하면 밀가루 반죽을 돌돌 넣어서 만들어 먹던 제사상 음식이 생각납니다.>
<만화정에서 주인 기다리는 애마>
<뭐 큰 기대는 안했지만 역시나 운문사에 오토바이는 못들어 갑니다. 시끄럽고 위험하다나....뭐래나...차들은
그렇게 들어가는데 왜 바이크가 못들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민원을 넣어봐야 겠습니다. 휴양림에도
못들어각고.....>
< 저렇게 차는 들어가고 바이크는 못들어가는 불공평한 세상~~~>
<69번 국가지원지방도를 타고 신불산 자연휴양림에서 쉬었다 갑니다. 원래 간월재를 올라볼려 했지만 베네고갯 방향에선
모두 차단봉이 쳐져 있어서 못가요~~ 못가....휴양림쪽은 차단봉이 있지만 3개까지는 어찌 넘어 갔지만 그 이후 혼자는
무리라서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커피 한잔 그리고 경주로 발머리를 잡습니다.>
< 빗방울이 한두방을 떨어지는 흐린날이지만 달리기에는 더없이 좋습니다.>
<신불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가을>
<단장천과 배네골 전경>
<울주를 버리고 경주로 고고씽~~>
<울주에서 24번국도를 따라 울산으로 다시 14번 국도 타고 치술령을 넘어 경주 양남 주상절리에 도착합니다.>
<동해바다의 바람과 파도가 높습니다.>
[주상절리]
주상절리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되는데 이때 식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용암은 표면부터 식을 때 균열이 육각형 모양으로 형성되고 점점 깊은 곳도 식어가면서 균열은 큰 기둥을 만들어낸다. 용암이 식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주상절리의 모양과 크기가 결정된다. 화산암(火山岩) 암맥이나 용암(熔岩), 용결응회암(熔結凝灰岩) 등에서 생긴다. 절리(joint)는 암석의 틈새기나 파단면(破斷面)으로서, 암석의 틈새기나 파단면을 따라가면서 일그러짐(변위)이 없거나 또는 거의 일그러짐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면(面)에 평행한 일그러짐이 있는 것을 단층(斷層)이라고 한다. 화강암이나 두꺼운 괴상사암(塊狀砂岩) 등과 같은 균질의 암석의 경우에는 일그러짐을 인정할 실마리가 없기 때문에 절리와 구별하기가 어렵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상절리 [columnar joint, 柱狀節理] (두산백과)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릉>
[이견대]
이 이견대는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곧바로 바라볼 수 있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한 문무대왕의 호국 정신이 깃들인 곳이다. 옥대와 대나무를 얻게 되었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고, 적병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돌거나 가뭄 등 나라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이를 불어 모든 어려움을 가라앉게 한 만파식적의 전설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복원한 것으로, 마루에 오르면 곧바로 대왕암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견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초판 1994., 개정판 23쇄 2012., 돌베개)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이 이곳에서 바다의 큰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합해 용을 시켜 보낸 검은
이견대라는 것은 중국의 주역 가운데 ‘비룡재천이견대인’이란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즉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게 크게
현재의 건물은 1970년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시대의 건물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신라 시대 건물 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문문대왕암 앞에서 나란히 앉아있는 갈매기 한쌍~~>
< 동해 용왕님에게 빈건지 문무왕에게 비는건지 알수 없지만 문무왕릉 앞에는 횟집도 많고 무당집도 많네요...
누군가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해봅니다.>
<감은사지에서>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681년에 승하하였는데, 문무대왕이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하기를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동해변에 가람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절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승하하니 그의 아들인 신문왕(神文王)이 부왕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그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은 감은사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동해바다의
대왕암(大王岩)에 매장한 것으로 믿어진다. 감은사의 금당(金堂) 밑에는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의 넋이 내왕할 수 있게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따라서 금당 밑은 교량구조와 같은, 돌로 된 기단을 형성하여 공간을 두고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려놓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감은사지에 대한 조사는 1959년과 다음해 초까지 서석탑의 해체복원과 더불어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바 있지만, 이때는
가람(伽藍)의 형식만을 확인하는 간이조사에 그쳤다. 그러나 1979년과 1980년 2년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조사되어 절터의 성격과 전모가 밝혀졌는데, 유구와 유물로 보아 이절은 고려 때까지도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람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남향을 하였는데, 남북축선상에 남으로부터 중문(中門)·금당(金堂)·강당(講堂)이 놓이고, 중문과
금당 사이 양옆에는 동·서 3층석탑이 놓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쌍탑식가람(雙塔式伽藍)을 보인다. 또
강당의 동·서 양측에는 보칸 3칸의 간살이 넓은 장방형 건물터가 동서축으로 놓여 이 양끝 남변에서는 동·서의 회랑(回廊)이
연결되어 있다. 이 강당터 양측의 장방형의 건물터는 규모로 보아 승방터(僧房址)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가람의 규모는 동·서 회랑간의 중심거리가 약 70m이고, 중문터에서 강당터까지의 중심거리가 63.7m로서 가람의 외곽선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초석은 금당터의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가 방형에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원형 쇠시리를 한 주좌가 있는
초석(礎石, 주춧돌)이다.
동·서 3층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구조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건축자료인데, 상·하층의 거대한 기단 위에 몇 개로 나누어진
석재를 조합하여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이루고 특히 하층 기단 주위에는 탑구로 보이는 시설을 대석으로 맞추어 깔고
있음이 다른 신라 석탑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초기적 수법을 나타내는 석탑이다. 1959년 1차 발굴조사후
실시된 서탑의 해체수리시 삼층 탑신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속에서 화려한 사리 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지난
1996년 동탑의 해체수리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주목을 끈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은사지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신라화랑), 2003., 한국콘텐츠진흥원)
< 우람한 탑의 기골에서 감은사지의 웅장함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감은사지 금당터>
<골굴사 마애블 아래서 이곳은 선무도로 유명한 사찰이며 불심이 유달리 깊었던 견공이 유명하다>
‘위빠사나’(vipasannā)라고 불리는 수행법으로 본래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전수되어 온
수행법이다.이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 방법으로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요가와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이다.
1960년대 양익(兩翼)스님이 흩어진 관법수련을 체계화하여 이를 승가에만 전수하였는데, 1970년대에 이를 설적운스님이 전수받아
대중포교(大衆布敎)를 위해 1985년도부터 ‘선무도’라고 칭하게 되었다. 선무도의 수련방법에는 선요가, 좌관법, 입관법, 행관법이
있다.현재 선무도는 해외보급과 전문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골굴사와 국내 대학에 특강 및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또한
사단법인 세계선무도협회 산하에 국내외 지원과 지부를 두어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무도 [sunmudo, 禪武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골굴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는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법당굴은 굴 앞면은 벽을 만들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굴과 다른 굴들은 한사람이 겨우
들어앉을 수 있는것부터 서너명이 들어앉아도 넉넉한 큰것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위엄이 넘치는
노스님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 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골굴 석굴도]에는 마애불상과 12처
석굴이 모두 목조와가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 전실은 모두 소실되고 바위굴만 남아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 정도의 마애불상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돼 있다. 모래기가 많이 섞인 화강암에 새긴
터라 보존상태가 썩좋지 않고 오랜 풍화 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 유리 지붕을 씌어 놓았다.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골굴사(경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포항 기계면 읍내에서 늦은 점심으로 곱빼기 해물칼국수를 따듯하게 먹습니다.>
<오늘 투어의 마지막 기착지인 보현산 천문대에 도착합니다. 도착시간이 오후 17시.....날이 또 흐려서 구름이 잔뜩
낀 탓에 이슬비에 흠뻑 젖습니다.>
[보현산]
경상북도 포항시의 죽장면 두마리와 영천시의 화북면 정각리, 청송군의 현서면 무계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 : 1,124m).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에 주변이 한눈에 조망되며, 현재 정상에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보현산천문대가 들어서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영천)에는 고을의 진산인 모자산(母子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등성이의 동쪽과 서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고을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합쳐져, 고을이 두 물줄기 안에 있는 까닭으로 영(永)이라는 한자를 고을 이름에 사용하였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천)에는 모자산이 고을의 진산이며,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90리에 있다고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뒤쪽에 보현산(普賢山)이 또 적혀 있는데, "혹 모자산이라고도 하며, 신녕현의 북쪽 3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녕현이 잠시 폐지되어 영천군에 합해져 있었는데, 동일한 산을 두고 영천군에서는 모자산, 신녕현에서는
보현산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해동지도』(영천)와 『영남지도』(영천)에는 보현산과 모자산이 서로 다른 산인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는 문헌 기록의
내용을 잘못 파악한 결과이다. 『조선지도』(영천)에는 보현산은 없고 모자산만 있는데, 자모산(子母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해동지도』(영천)이나 『영남지도』(영천)의 내용처럼 보현산과 모자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대동지지』(영천)에는 "보현산은 일명 모자산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현산 [普賢山, Bohyeon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혼자 신나게 가을을 느끼면서 이슬비도 맞고 바람도 맞고 그렇게 800km를 즐거이 달린 하루였습니다. 간월재와 운문사
소나무를 못본건 아쉽긴 하지만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을 기약하는거 아니겠습니까??!!! 혼자 달리는 탓에 간식과 커피
그리고 해물칼국수 한 그릇에 행복함을 느끼면서 그간 못가본 경북과 경남의 2016년 가을을 느껴봅니다.
영남이 백두대간의 남쪽에 있다해서 영남이라지만 영남 나름의 멋진 영남알프스가 그 꼿꼿한 기개를 만들어 주는
나름의 문화화 지맥이 흐르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주912지진으로 큰 피해와 고통이 있었다 하여 경주를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투어 당일에도 진도
2.0대의 여진이 있었지만 느낄수는 없었는데, 자연재난에도 대비해야하는데 우리나라는 자연재해보다는 인재가
더 큰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 문화재를 보고 여행을 다니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만들어가고자 함인데 최근 시국과 세태를 보자면
창조적 여행이기보다는 현실도피적 여행이 아닌가 반문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절에 이렇게 유람을 다니느것도 호사라 느끼며 나 하나로 다른사람들이 힘내고 즐거워 할수 있는 그런
기회만들어보기로 다짐하며 가을저녁 어두어 지는 청송에서 서둘러 대전으로 야간 복귀길을 재촉하며
투어를 마무리 합니다.
첫댓글 주상절리 저길 몇번 가려고만 하다 지금까지 못가보네요.
원래 풍경사진 싫어 했던터라.
원정리 느티나무보다 좋은곳 많은데....
가까이 좋은곳 있는데 , 가깝다 보니 안 가집니다.
느티나무는 시골마을 어귀에 많이 있죠..영화와 사진으로 유명해진..그런곳중 하나...ㅋ 경주 주상절리는 제주도 해안 일부분을 따 옮겨놓은듯 합니다. 그것만보러 가기엔 아쉽고 경주 토함산 과 동해바다 그리고 역사기행이 어우러지면 딱 좋을듯 합니다
역사 탄방에 가을 라이딩 너무 좋슴니다
너무 좋습니다 머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