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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즐거음 스크랩 <무시로>가 <남자라는 이유로>로 바뀐 사연
mnsk49 추천 0 조회 175 13.08.25 18: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시로>가 <남자라는 이유로>로 바뀐 사연

 

 

 <무시로>에서<바람불이>가 되었다가 <길어야 백년인데>로 바뀌고 다시 <남자라는 이유로>로 제목과 가사 내용과 가수가 서너번은 바뀐 이 노래는 여러 사람의 희비가 교차하는 곡절이 숨어 있다.

 1983년 겨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나훈아 집에서 나훈아는 작곡가 임종수에게 *임선생, 메이저곡이 터지면 마이너곡보다 더 슬프고 감동도 크며 생명력이 오래 가는데 좋은 메이저 멜로디 하나 없어요* 명일동 집으로 오는 동안 임종수는 지금의 <남자라는 이유로>의 전반부인 <미솔라라라 도라솔미~>를 만들고는 한동안 잊었다.

 그러던 중 모지방 노래자랑 심사를 가는 길에 차안에서 마저 그리지 못했던 후반부를 완성시켰고 상경하여 나훈아에게 달려갔다.

 

 두사람은 오선지를 펴놓고 <이미 와버린 이별앞에 슬퍼도 울지 말아요/이미 때늦은 순간인데 미련을 두지말아요/ 가슴속에 흘러 내리는 눈물 감추고/ 가는 님은 오죽 하겠소/마음이나 편하게 웃는 얼굴로/눈물은 빗물에 감추어요>

 나훈아 작사 임종수 작곡의 <무시로>가 탄생했다. 제목은 <무시로>라고 좀 생뚱했지만 기가 막히게 곡과 잘 어울렸다.

 

 나훈아의 사촌 동생인 나진기는 가수를 열망했고 형에게 날마다 졸랐다. 원래 건축사인 나진기는 나훈아의 복제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창법이나 음색, 제스츄어 까지도 흡사했다. 나훈아는 가수의 길이 험난하다고 적극 만류했지만 나진기의 집요한 매달림에 항복하고 임종수에게 예의 그 <무시로>를 한번 맞추어 보라고 부탁했다. 

 여의도에 있는 나훈아와 이자연의 메니저였던 윤중민 사무실에서 임종수는 나진기를 불러 연습을 시켜보았다.

 이무렵 이자연은 나훈아 작사 작곡의 <당신의 의미>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무시로>란 곡에 반해서 윤중민과 함께 탐을 내며 나진기의 <무시로>는 어떤 그림이 나오려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진기는 나훈아 아류를 극복하지 못했고 마치 나훈아가 부르는 것 같았다. 피아노를 치던 임종수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찢어버렸다. <세상에 2등은 필요 없다. 이럴바엔 나훈아가 불러야지 넌 안돼!>.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임종수는 최진희에게 작품을 비즈니스 하던 중 말미에 <진희야, 이 곡은 남자가 불러야 되는 노래인데 한번 들어나 볼래>.곡을 다 듣고난 최진희는 흥분하며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딱 제 노래인데요 뭐>.

 지구레코드사에서 최진희는 이 노래를 취입하였고 제목을 <미워도 미워 말아요>로 ?다. 2절에 미워도 미워 말아요란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나훈아가 <무시로>란 제목이 너무 아까우니 그 제목은 양보해 달라며 돌려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아무튼 음반은 무사히 출반되었건만 <미련때문에>에 밀려 썩히고 있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김지애가 임종수를 찾았다. 모 방송 PD의 소개로 <미워도 미워 말아요>를 원했고 반주음악을 떴다. 취입날 한국음반으로 날아간 작곡가는 실망하고 말았다. 김지애는 취입 전날 지방에서 공연을 하고 목이 간 상태였는데 편곡마저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이 샌 임종수는 취입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결국 <미워도 미워 말아요>는 기박한 팔자를 겪다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래저래 일이 꼬이자 나훈아는 <미워도 미워 말아요>의 전반부 가사를 넣어 본인이 직접 작곡까지 펑키곡으로 지금의 <무시로>를 발표하여 공전의 히트를 쳤다. 가사의 절반이 잘려나간 <미워도 미워 말아요>는 반병신이 되어 임종수를 울렸고 한때는 설운도에게 시켜 보려고 작사가 장경수에게 악보가 넘어갔다.

 장경수는 <바람불이>란 제목의 새로운 가사를 붙였지만 궁합이 맞질 않아 폐기되고 말았다.

 

 어느날 여의도 사무실에서 임종수 선생은 나를 찾았고 내민 악보는 바로 문제의 그 곡이었다. 나는 가수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길어야 백년인데>란 타이틀의 가사를 넘겨주었다.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같다.

 <길어야 백년 사는/나그네 길을 와 놓고/가네 못 가네 길을 막고/매달려 울지 말아요/돌아서면 내가 먼저 찾을 거면서/바보처럼 보내지 말아요/기껏해야 백년도 못 사는 인생/이별은 몰라도 괜찮아요>.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광주에서 권토중래를 외치며 <천리먼길>의 박우철이 천리 먼길을 달려왔다.박우철은 작곡가 신대성형과 나와 가까이 지냈는데 다시 가수로 활동하는 걸 반대한 형수께서 광주에서 올라와 형이 어딨느냐고 나를 닥달하기까지 할 무렵이었다.

 

 임종수는 다시 노랫말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부초>의 콤비 작사가 김순곤을 불렀다.앞부분의 박자를 16분 음표로 쪼개서 자수를 늘인 뒤 지금의 <남자라는 이유로>가 만들어졌다.

 박우철은 열심히 홍보를 하였다.임선생의 기억으로 <전국노래자랑>은 물론이고 <도전주부가요 스타만 >해도 다섯번은 섰다고 한다. 뭐가 안될려고 그랬을까. 이 무렵은 3김이 대선에서 맞붙었고 DJ의 골수 지지자였던 박우철은 신곡 PR은 내팽개치고 대선에 투신 유세장을 따라 다녔다.

 

 다시 세월은 흘러 IMF가 터졌다. 조항조는 그때까지도 찬불가나 부르는 한미(寒微)한 가수에 지나지 않았다. 박우철의 취입을 옆에서 지켜봤던 조항조는 강남터미널에 있는 야간업소 <청록>에서 이 노래로 단단히 재미를 보자 내가 부르면 더 잘 부를 수 있겠다며 임선생을 졸랐고 박우철이 아닌 조항조의 회심의 <남자라는 이유로>가 떠오르고 있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에 욱일승천(旭日昇天)이었다.

 

 나훈아에서 나진기로 최진희에서 김지애로 다시 박우철에서 조항조로 가수가 무려 여섯명이 덤벼들었던 이 노래는 나훈아 작사에서 장경수작사로 다시 김병걸작사로 갔다가 김순곤 작사가 되기까지 네번을 바뀌면서 명곡을 다듬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목(注目)하는 것은 이 노래는 어느 가사가 붙었어도 곡이 좋았기 때문에 히트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아 ! 중간에 나의 <길어야 백년인데>와 장경수의 <바람불이>와 박우철만 볼이되고 만 기믹힌 사연을 마친다.<김병걸의 가요천국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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