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여행 신지도 원교 이광사의 흔적 동자꽃 ・ 2024. 1. 31. 14:43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원교 이광사 #신지도 #금곡마을 #이광사거리 #나주괘서 사건 #동국진체 #원교목 나주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객사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은 금성관(錦城館)으로 나주의 옛 이름이다. 2m가 넘는 큰 현판의 글씨를 쓴 주인공은 원교 이광사로 보물지정과정에서 결론지어졌다. 원교와 나주는 어떤 인연의 끈을 잡고 있을까? 나주의 객사 현판을 이광사가 썼다고 한다. 나주 모산마을의 문화류씨와 결혼하였다. 나주괘서 사건으로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청년들에게 서어ㅖ와 학문을 가르치던 중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세상을 비방하고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유배, 이후 신지도로 이배되었다 나주괘서사건은 경종이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자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노론은 왕세장의 대리청정까지 강행한다. 소론은 노론의 4대신을 4흉으로 몰라 권력을 빼앗는다. 이때 이광사의 큰아버지 이진유가 상소를 올린다. 대사헌과 대사성, 이조참판의 요직을 지낸다. 연잉군이 왕(영조)으로 즉위한다. 노론은 권력을 장악하고 소론은 몰락한다. 이진유는 귀양길에 오르고 곤장을 맞고 죽는다. 이광사의 부친 이진검도 강진에 유배된 뒤 죽는다. 이광사는 과거를 볼 수 없을 것이고 당시 신학문이었던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글씨에 매진한다. 무신난으로 나주에 유배되었던 소론의 윤지가 노론을 비방하는 괘서를 나주 금성관 망화루에 붙인다. 나주괘서사건이다. 지금의 대자보같은 것이다. 주동자들은 영조의 친국을 받고 사형을 당한다. 이때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에 연루되어 이광사는 유배를 당한다. 부인 류씨는 의금부에 하옥된 이광사가 참형되었다고 소문을 듣고 자결한다. 이때 이광사의 나이 51세였다.. 원교서결이라 쓰여진 이광사거리의 상징물 원교서결은 이광사의 서예이론서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법에 관하여 저술한 책이다. 신지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한국적인 서체의 모태가 된 '동국진체'와 서예의 체계적인 이론서인 '서결'을 완성했다. 이광사거리에서 전체적인 안내를 볼수 있다. 인근이라 한적한 거리를 유유자적 걸어볼 수 있다. 신지중학교 담장에서 이광사의 친필을 만나볼 수 있다. 원교 이광사 문화의 거리는 일반인의 접근성을 위해 신지면 소재지에 만들었다. 소재지에서 신지중학교 방면으로 들어가면 문화거리가 나오고 중학교 담에는 이광사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을 표현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송으로 이광사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원교목이라 부르고 있다. 금곡마을 초입에 이광사의 흔적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머나먼 바닷가에 처한 이광사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소나무는 완도군의 보호수로 지정외더 있다. 수령은 201년정도이다. 전체적인 수형은 균형이 잡혀있어 소나무 특유의 고고한 자태가 돋보인다. 고달펐던 유배지에 찾아온 지인들은 원교이 글씨를 받아서 갔을 것이다. 오고갔던 지인들을 지켜봤던 산증인이다.
서인의 노론에 속했던 집안은 나주괘서 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부인은 자결을 하고 본인은 절해고도로 유배를 당한 심정을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신지도 바닷가 금곡마을 전경 사진의 금곡마을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이광사의 유배지가 나온다. 그가 거처했던 집에서 신지도 바다가 보인다.
새롭게 단장된 유배지의 모습과 당시의 고샅길의 느낌은 살아있다. 삭막할지 모를 배경이지만 찾아오는 이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기억하고 유배지에서 희망을 품고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서결을 지은 이광사의 정신은 남아 있음을 느꼈다. 신윤복의 아버지이자 도화서 화원이었던 신한평이 이광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제작연도가 영조 50년(1774)임을 초상화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광사의 나이 70세, 돌아가시기 3년전의 모습니다. 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모사할 때 화공으로 참여, 신지도 만호로 제수 되었다. 이때 이광사를 만나 초상화를 그린것이다. 옥동 이서가 정립하고 공재 윤두서를 거쳐 소론계학자인 백하 윤순에게 전해지고 이를 계승한 원교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동국진체는 성리학이 우리고유의 사상으로 뿌리를 내기게 되자 우리문화에 대한 자존감과 우수성을 자각하면서 고유의 서체를 발현한것이다. 원교 이광사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신지도 유배생활로 인해 동국진체는 알려지지도 평가도 제대로 받지못하였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은 교과서에서 많이 들어보았다. 이광사의 아들이다. 이대목에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전라도 일대 이광사의 글씨 유홍준교수는 획이 삐짝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꺼진 황토색 짙은 작품이라 평했다. 서예가 김병기교수는 원교의 글씨는 신지도 앞 바다의 잔잔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거친 파도를 닮아 노기(怒氣)를 띠고 있다고 평했다. 해남 대흥사 - 극락보전, 명부전, 침계루, 천불전, 해탈문 강진 백련사 - 대웅보전 구례 천은사 - 일주문, 극락보전, 명부전 고창 선운사 - 정와, 설선당 부안 내소사 - 대웅보전 김제 금산사 - 천왕문 태그#원교#신지도#금곡마을#이광사거리#나주괘서#동국진체#원교목 [출처] 신지도 원교 이광사의 흔적|작성자 동자꽃
|
첫댓글 신지도에 이광사 거리가 생겼군요.
여기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