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대 긍정의 종교 입니다
불자들은 적극성도 없고, 신념도 없고, 뭉치는 힘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
있는 설명도 못한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으로 되어 있는것 같아요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애매 모호한 이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불교에는 부정과 긍정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것 같아요
얼른 보기는 나와 세계가 영원한것 같지만,그렇지 않다는것 아닙니까 ?
그러나 나와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그 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성이 함께 하고 있으므로,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부정할것은 부정해야 지만,참나가 전개하는 대 긍정의 세계를 살아 갈수
있다고 봅니다그렇다면 지금부터 생각 나는데로 불교가 긍정해야 하는것을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는 부정해야 할것이 너무나 분명 합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한 고 집은 분명하게 부정하는 것이 불교 입니다 반면에 일체를 하나로 돌리고 있는
법성자리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고 유지 하며 살려 가야할 멸도의 길 입니다 이는 철저히 긍정해 가자는
종교가 불교 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이 해 내야할 절대적인 과제 이지요
영원한 생명으로 살고자 하는 수행자는 반드시 부정할것과 긍정할것을 철저하게 구분 지어 살지 않으면
자기 구원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일단 수행자로 들어선 이상 스스로 가혹 하다 할 정도로 이 원칙을 지켜 가야 합니다
(2)
불교에서는 나란 없습니다 따로 따로 하는 불교 수행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따로 따로 하는 불교는 부정해야 하지만 서로 상의적으로 살아가는 불교는 긍정 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모여서 재가 신행회를 만들고 불교를 생활속에서 실천 해가는 사람이 불교를 긍정하는
수행 자 입니다
이 원칙은 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듯이 수행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민주적인 기초 신행단체가 대단히 부족한 불교를 하고 있는게 문제 입니다
사찰이나 포교당을 중심으로 생활불교를 해야 불교가 살아 나는데 생활 불교는 출세간 불교에 너무 예속
되어 있습니다 신행회 불교를 대안으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3)
살생 도둑질 애탐(음)거짓말 과음 탐진치는 철저히 부정 해가야 할 일입니다
상생 나눔 화합 참된말 불음 계정혜는 철저하게 긍정 해 가야할 절대 명제 입니다
그러나 부정보다는 긍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부정이 물러 나게 해야 합니다 부정에다가 초점을 너무
맞추어 가는 수행은 좋지 않습니다
계박이 되는것은 안됩니다 긍정 하기 위해서 부정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한 계행이지 계행 그 자체가 절대는 아니라는 생각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마음을 법성에 계합 되도록 성심성의를 다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루 하루 이 점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었는가 되돌아 보고 반성하고 참회 하여야 하는것 이지요
법성에 비추어 볼때 혹시라도 마음에 어긋남이 없었는지 마음에 혼란은 없었는지 마음에 어리섞음은
없어는지를 반성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를 긍정적으로 굴리는 불자들의 수행 입니다
(4)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서로간에 정한 규약이 있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있더라도 모두를 위해서는 누가 지적
해서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 지키고 살려가는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불교를 긍정하는 수행자 입니다
불자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는 수행자는 불교를 부정하는 수행자 입니다
그저 불교를 관용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자비나 하심등을 잘못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고 남의 자비나 바라고 남에게 하심을 권하는 이런 사람은 올바른 수행자가
아닙니다 자기부터 먼저 입니다 남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를 구할 사람은 남이 아닙니다 자기 이외는 없습니다
(5)
적당히 처신 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태도로
그저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 듣는 불자는 불교를 부정하는 사람 입니다이런분은 처세 하는 사람이지 수행자는
아닙니다 해야 할일과 안해야 할일을 알아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 불교를 긍정 하는 사람입니다
호리 유차라도 천지 현격인지를 알아야 하지요 빕새가 황새 흉내를 낼수는 없습니다 내서도 안됩니다
불보살님들도 가피는 해 주시지 만 자기를 구해주지는 못 합니다 자기를 구 하고자 하는 불자가 자기에게
엄격한 잣대를 드리데지 않으면 도저히 구원 받을수 없습니다
재가 신자라도 도를 위해서는 위법 망구의 정신이 필요 합니다
스님들처럼 한소식 하는 수행만을 흉내내서는 안됩니다
재가자는 재가자 답게 먼저 팔정도만 이라도 제대로 굴리는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 말 하지만 우리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기에 기초한 생활불교를 해야 합니다
(6)
불교가 생활화가 안되어 있다면 그는 불교를 부정하는 수행자 입니다
우리의 삶 과 생활을 변혁 시키고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불교가 되도록 노력하는 불자가 불교를 긍정
하는 수행자 입니다
이것이 여태까지 우리가 주장하는 팔정도의 체계적인 이해와 생활화와 조직화 입니다
불교를 처음부터 너무 고답적이고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접근 하면
우리는 불교에 대해서 모호 해 져 버립니다
불교는 실천으로 말 하는 종교 이기 때문 입니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기초를 튼튼히 하고 그 위에 고층건물이 들어서야 하는데 우리현실은 이것이 모두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법 보다는 스님들의 경지를 쫒아다니는 페단이 생기고 있습니다
생활로 보면,세간의 올바른 삶을 위해서,출세간이 있어야 하는데,공부만으로만 보기 때문에 출세간을
위해서 세간이 있는것 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이 소홀한 불교가 되었습니다
(7)
수행자가 기초부터 튼튼히 해갈줄 알면 그는 불교를 지혜스럽게 접근하는 긍정적인 불자 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상만 높게 세우고 현실을 무시하는 수행은 사상 누각 입니다
이런 수행자는 불교를 부정하는 수행자 입니다
세간의 불교는 제도가 미흡하고 출세간 불교의 제도는 너무 과대 해 졌습니다
출세간 불교가 현실 생활은 멀리 하고 선정위주로 가다보니 불자들에게 고립주의를 가져다 주었다면
문제 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것을 시정해 가야 할때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팔정도가 스님들이 닦는 수행보다는 미흡한 길이라고 생각 하면 큰 착오 입니다
(8)팔정도가 세간의 불교지 출세간의 불교는 못된다는 불자는 불교를 부정하는 수행자 입니다
그러나
팔정도는 출,세간에 다 통하는 불교라고 아는 불자는 긍정적인 수행자 이지요
팔정도는 바로 진리의 길이기 때문 입니다
물론 처음과 중간은 고집을 멸하는 방편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가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 있는것 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길은 깨닫는자도 자동적으로 이길을 가야 하는 진리의
길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생심)을 100% 법성진리에 계합시키고 그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고 사는것이 팔정도
법륜행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면 이제는 마음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서 오온이라는 법에 주하여(법주) 같이 있게 되고
법계를 이루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9)
팔정도로 마음을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될수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법륜을 굴리는 불자는 긍정적인 수행자
입니다 그러나 팔정도로는 부처가 될수 없다고 하는 불자는 부정적인 수행자 입니다일체를 떠나 일체를
이루어가는 이
마음을 주인공으로 하여 법(오온)에 주하고 법계를 이루어 간다는 이 꿈같은 사실이
바로 팔정도에서 법성에 계합한 깨달은 마음으로 자기의 오온(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행하는 우리의
삶 입니다잘 이해가 안되시면,물을 마음으로 삼고 물결을 법과 법계로 삼아서 한번 생각 해 보세요
이런 깨달은 마음이 진짜 입니다 어듸까지나 법성이 본질이며 "체"고 법이 현실이며 "용" 입니다
본질 그대로가 현상이며 열반 그대로가 생사이고 보리 그대로가 번뇌 입니다
이말은 중생들이 이해 하기 쉽게 본질과 현상 열반과 생사 보리와 번뇌를 구분해서 설명의 필요상 구분
하고 있는것이지, 실재는 하나 입니다
(10)
그러므로 본질과 현상을 구분해서 보는 불자는 부정적인 수행자 입니다
본질과 현상은 분리 할수 없는 하나인 자리 입니다 이렇게 보는 불자는 긍정적인 수행자 입니다
실상자리에서 말 하면 제법이 모두 본질의 자기 활동이며 열반의 자기 활동이고 보리의 자기 활동인것
입니다
한마음의 자기 활동 이지요
일체가 유심조 입니다 이를 두고 심수 만경전(心隨萬境轉) 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나로 부터 출발 해서 생각 해 볼까요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무엇입니까?
법성이 법에 주하고 있는것이 지금 여기 있는 나 아닙니까?
이 법성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 합니다 이 놈이 이 오온을 만들고 지금 여기 있는 놈 입니다
이 놈의 이러한 활동은 끝도 갓도 없는 영원 무궁한 생명 활동 입니다
팔정도는 바로 이런 자리에 우리 마음을 갖다 놔 주는 역활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법성에
계합하는 그 찰라에 이루어 지는 한 소식 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 이지요
공덕 총림의 세계 덕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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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 행복 주시는 부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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