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중 가장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 가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애초에 영토는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원래 조그만 나라였는데 4세기 무렵부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미천왕 때 낙랑과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요동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영토가 넓어 졌다 그리고 5세기에 들어 광개토대왕이 강국으로의 기틀을 다졌고 그 아들인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선왕의 업적을 이어감으로써 동북아시아에 맹위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상황만을 보지 말고 실질적인 고구려사회를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통일을 할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그것은... 첫쨰: 비록 고구려 가 군사적으로 강국 이긴 하지만 중국처럼 국제정세를 자신들에게 맞추어 유도 나갈수 있을 만큼의 큰 국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주위 상황의 변화에 대처하는데 급급했지 대세를 이끌어 가지는 못했다 백제와 신라중 어느 한나라를 공격하려면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같이 대항해 왔고 백제와 손을 잡으면 신라는 중국과 동맹 관계를 맺어 두 나라에 대항 에 왔다 더구나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언제나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언제나 중국 측의 견제를 받아야 했기에 외교적으로 형식적인 대우를 받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는 백제나 신라처럼 직접적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견제를 받고 오해를 사기가 쉬웠다 둘째: 인구가 적어 큰 나라 로 성장하기에는 한계 가있었다 백제보다도 10퍼센트나 적어 그 커다란 땅덩어리를 직접 지배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으므로 일정한 성공을 거두더라도 이를 수호할 만큼의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넓은 국토의 반대 방향에 새로운 문제가일어나면 그곳을 방어하는데 온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확보했던 지역은 곧 다른 나라의 것이 되어 버리곤 하였다 셋쨰: 귀족연립 체제로 정권이 구성되어 있어 언제나 내분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처럼 내분이 끊이질 않아 국외 정세는 물론 국내 정세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이러한 정세 하에서 올바른 판단과 영도를 할수 있는 인물이 나타날 수도 없는 일이 어서 고구려는 결국 자멸하고 만것이다 넷쨰::군사적 전술상 성문을 꼭잠그고 대항하다가 먼 길을 온 적군들이 질병과 식량 부족에 허덕여 돌아가는 순간에 공략하여 이기는 전략으로 승리했지 정면공격을 한다거나 일 대 일 대결에서 는언제나 상대방에 밀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나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라의 병참 도움을 받으며 평양을 공격할 때 고구려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다섯째: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했다 는 점이다 귀족들의 내분은 자기들의 정권 유지에 필요한 세금만을 추징하는 데 급급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고 각종 요역 .군역은 더 이상 백성의 호응을 받을 수없을 정도로까지 되어 있었다. 이상 제가 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 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2. 인구가 적었다니요? 조사를 하셨다는데 제대로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용만 선생님이 비정한 인구만으로도 500만명에 이르렀고 고구려 말기의 병사가 30만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 인구가 말기 무렵에도 최소 300만명 이상이었다는 말입니다. 백제가 76만호였다고 합니다. 1호당 5명씩만 잡아도 380만명입니다. 고구려가 백제에 비해서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만 -_ -
참고적으로 고당전쟁시 요동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구려군이 1만명 당군이 사로잡은 고구려군사가 1만명 그리고 남녀 4만명이었습니다. 요동성만해도 무려 6만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습니다 -_ -.. 요동성 함락 이후 항복한 백암성에도 고구려군 1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안성 같은 경우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_ - ..
고대사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학설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고고학에서는 무덤의 분포와 규모, 개수를 기준으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인구를 판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현 일대에만 무덤이 약 12000여개가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가장 많은 수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상당히 큽니다. 또 평양성의 남쪽에 장수산성은 고고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10만여명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수도인 평양성의 경우 둘레 23키로이고 거주 인구가 거의 40~50만이 거주했다고 추정되며, 봉황성도 둘레 15키로의 거대한 성입니다.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군대의 숫자는 대략 30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대문예(무령왕님 덕분에 기억함.)의 입으로, 또 최영장군 기록, 최치원의 발언에서 확인되며, 실제로 수, 당과 전쟁을 할때에 고구려 군대를 추정해보면 30만 이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인구는 약 600만이 됩니다. 여기에 고구려의 복속민을 합치면 1천만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발해고 신하에 관한 고찰 대문예 편을 보면 대문예가 왕에게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나라와 등지는 일입니다. 당나라는 큰 나라로서 병사가 우리보다 만 배나 되니, 그 나라와 원수지간이 되면 우리도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 시절에 병사가 30만이나 되어 당나라에 대적하였으니 아주 힘센 나라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당나라 군대가 한 번 출동하여 고구려를 완전히 쓸어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무리가 고구려에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왕께서 이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했죠^^
1. 고구려가 당시의 국제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못만들었다구요? 장수왕~문자명왕 시기의 고구려는 막강한 유목제국인 유연과의 교류를 통해 유연을 아군으로 만들었고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사실상 제1의 가상적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북위를 군사력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군사력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만 -_ -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어느 날 갑자기 미천태왕 때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과 함께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대에 대국이 된 이유는 미천태왕~소수림태왕(중간에 고국원왕 떄 한 번의 시련이 있었지만.) 선태왕들의 뛰어난 내, 외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1대 1에서 밀렸다는 것은 어불상설입니다. 초기 고구려도 전한, 후한(좌원에서 명림답부가 궤멸을 시킵니다.)과도 단독으로 전쟁을 행할 만큼 1대 1에도 능했습니다. 1대 1에 능하지 않았다면 숱한 정복활동들을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광개토태왕만 해도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고, 남방의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공파해서 바다 건너 왜까지 추격한 일도 있습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못한게 아니라 시기를 놓친것 같습니다. 더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것은 서토 였습니다.고구려 발밑에 갖혀 있는 백제나 신라는 언제든지 공격해 멸망케 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있으나 국제정세가 시시각각 변하는 윗쪽 신경쓰기도 바쁜데 밑에 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겠죠. 거기에다 현실적으로 피 흘리며 전쟁해서 濟.羅멸망 시키기 보다는 조공같은 부차적인것을 얻는게 고구려 국력에 더 도움되었으리라 생각되었겠죠.삼국통일은 서토정벌을 끝내고 안정된 상태에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라당 연합군으로 인한 고당전쟁으로 그시기를 영원히 놓쳐다고 보여집니다.
명치호태왕님 참고로 덧붙여서...무덤의 분포와 수, 규모는 인구나 국력을 알려주는 지표가 아닌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구를 알기 위해서는 유구, 즉 주거지나 건물지와 같은 유구의 존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고로 유물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 한들 유구가 발견되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뭐 여담이었지만 그래도...알고 계시는게 낫다 싶어서. ^^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패배한 백제 아신왕은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재조지은'을 입어 그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깊이 예속되고, 가야의 맹주 금관가야는 멸망합니다. 이 이상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통일'일 수 있을까요?^^ 지금 중국인들이 동북공정하는식으로 5세기초 한반도 지도를 그린다면 죄다 고구려 땅으로 표시됩니다. ㅎㅎ
첫댓글 일단 글을 올리시기 전에 퇴고라는 과정을 한번 거치시는 것이 어떨런지 .. 띄어쓰기하고 맞춤법 좀 잘 지켜주시는 것이 ..
2. 인구가 적었다니요? 조사를 하셨다는데 제대로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용만 선생님이 비정한 인구만으로도 500만명에 이르렀고 고구려 말기의 병사가 30만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 인구가 말기 무렵에도 최소 300만명 이상이었다는 말입니다. 백제가 76만호였다고 합니다. 1호당 5명씩만 잡아도 380만명입니다. 고구려가 백제에 비해서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만 -_ -
신호웅교수는 그당시 가장인구가높은곳이 백제라고하였습니다 백제보다도 10퍼센트나 적었다고하였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시길 당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땅은 한반도에서 가장 알토란 같은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백제보다 몇배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토도 수십배는 넓었는데 백제보다 인구가 적었을까요?
참고적으로 고당전쟁시 요동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구려군이 1만명 당군이 사로잡은 고구려군사가 1만명 그리고 남녀 4만명이었습니다. 요동성만해도 무려 6만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습니다 -_ -.. 요동성 함락 이후 항복한 백암성에도 고구려군 1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안성 같은 경우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_ - ..
고대사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학설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고고학에서는 무덤의 분포와 규모, 개수를 기준으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인구를 판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현 일대에만 무덤이 약 12000여개가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가장 많은 수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상당히 큽니다. 또 평양성의 남쪽에 장수산성은 고고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10만여명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수도인 평양성의 경우 둘레 23키로이고 거주 인구가 거의 40~50만이 거주했다고 추정되며, 봉황성도 둘레 15키로의 거대한 성입니다.
당시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적국들은 모두 남쪽이나 서쪽(서북, 서남)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고구려를 견제할만한 세력이 없었습니다.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군대의 숫자는 대략 30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대문예(무령왕님 덕분에 기억함.)의 입으로, 또 최영장군 기록, 최치원의 발언에서 확인되며, 실제로 수, 당과 전쟁을 할때에 고구려 군대를 추정해보면 30만 이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인구는 약 600만이 됩니다. 여기에 고구려의 복속민을 합치면 1천만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호태왕님 발해 무왕이 흑수말갈을 정벌하려 할 때, 동생인 대문예가 형인 무왕에게 고하던 말로도 고구려의 군사력을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발해고 신하에 관한 고찰 대문예 편을 보면 대문예가 왕에게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나라와 등지는 일입니다. 당나라는 큰 나라로서 병사가 우리보다 만 배나 되니, 그 나라와 원수지간이 되면 우리도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 시절에 병사가 30만이나 되어 당나라에 대적하였으니 아주 힘센 나라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당나라 군대가 한 번 출동하여 고구려를 완전히 쓸어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무리가 고구려에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왕께서 이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했죠^^
네, 무령왕님 말씀대로 대문예가 고구려의 강병이 30만이라고 했었습니다.
4. 동천왕조 기록을 보시면 고구려가 야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텐데요. 어떻게 청야전술 등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고구려군이 야전에 능하지 않는다고 쓰시는지 -_ - ..
1. 고구려가 당시의 국제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못만들었다구요? 장수왕~문자명왕 시기의 고구려는 막강한 유목제국인 유연과의 교류를 통해 유연을 아군으로 만들었고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사실상 제1의 가상적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북위를 군사력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군사력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만 -_ -
5. 각종 노역이나 군역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그리고 심지어 중국의 여러 왕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찌 이런 것을 고구려 특유의 것으로만 국한시키려고 하시는지 -_ -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어느 날 갑자기 미천태왕 때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과 함께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대에 대국이 된 이유는 미천태왕~소수림태왕(중간에 고국원왕 떄 한 번의 시련이 있었지만.) 선태왕들의 뛰어난 내, 외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1대 1에서 밀렸다는 것은 어불상설입니다. 초기 고구려도 전한, 후한(좌원에서 명림답부가 궤멸을 시킵니다.)과도 단독으로 전쟁을 행할 만큼 1대 1에도 능했습니다. 1대 1에 능하지 않았다면 숱한 정복활동들을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광개토태왕만 해도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고, 남방의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공파해서 바다 건너 왜까지 추격한 일도 있습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못한게 아니라 시기를 놓친것 같습니다. 더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것은 서토 였습니다.고구려 발밑에 갖혀 있는 백제나 신라는 언제든지 공격해 멸망케 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있으나 국제정세가 시시각각 변하는 윗쪽 신경쓰기도 바쁜데 밑에 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겠죠. 거기에다 현실적으로 피 흘리며 전쟁해서 濟.羅멸망 시키기 보다는 조공같은 부차적인것을 얻는게 고구려 국력에 더 도움되었으리라 생각되었겠죠.삼국통일은 서토정벌을 끝내고 안정된 상태에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라당 연합군으로 인한 고당전쟁으로 그시기를 영원히 놓쳐다고 보여집니다.
명치호태왕님 참고로 덧붙여서...무덤의 분포와 수, 규모는 인구나 국력을 알려주는 지표가 아닌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구를 알기 위해서는 유구, 즉 주거지나 건물지와 같은 유구의 존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고로 유물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 한들 유구가 발견되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뭐 여담이었지만 그래도...알고 계시는게 낫다 싶어서. ^^
아, 그렇군요. 덕분에 하나 배워갑니다.^^
삼국통일은 근래의 관점이지 삼국이 형성되었던 때의 관점이 아니지 않을까요? 신라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숙적관계였던 백제를 당과 함께 전략적으로 치고 당의 필요 조건에 의해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로 갔다는 게 옳은 표현이 아닐까요?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패배한 백제 아신왕은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재조지은'을 입어 그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깊이 예속되고, 가야의 맹주 금관가야는 멸망합니다. 이 이상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통일'일 수 있을까요?^^ 지금 중국인들이 동북공정하는식으로 5세기초 한반도 지도를 그린다면 죄다 고구려 땅으로 표시됩니다. ㅎㅎ
금관가야가 공식적으로 멸망당하는 것은 562년입니다만 .. 물론 고구려의 남정으로 인해서 금관가야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비실비실거라다가 결국에는 신라에게 항복한 것이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