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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고구려 토론방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지못했던 이유
이승수 추천 0 조회 501 07.03.27 22:08 댓글 2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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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3.27 22:30

    첫댓글 일단 글을 올리시기 전에 퇴고라는 과정을 한번 거치시는 것이 어떨런지 .. 띄어쓰기하고 맞춤법 좀 잘 지켜주시는 것이 ..

  • 07.03.27 22:38

    2. 인구가 적었다니요? 조사를 하셨다는데 제대로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용만 선생님이 비정한 인구만으로도 500만명에 이르렀고 고구려 말기의 병사가 30만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 인구가 말기 무렵에도 최소 300만명 이상이었다는 말입니다. 백제가 76만호였다고 합니다. 1호당 5명씩만 잡아도 380만명입니다. 고구려가 백제에 비해서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만 -_ -

  • 작성자 07.03.27 22:42

    신호웅교수는 그당시 가장인구가높은곳이 백제라고하였습니다 백제보다도 10퍼센트나 적었다고하였습니다

  • 07.03.27 22:44

    간단히 생각해보시길 당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땅은 한반도에서 가장 알토란 같은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백제보다 몇배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토도 수십배는 넓었는데 백제보다 인구가 적었을까요?

  • 07.03.27 22:50

    참고적으로 고당전쟁시 요동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구려군이 1만명 당군이 사로잡은 고구려군사가 1만명 그리고 남녀 4만명이었습니다. 요동성만해도 무려 6만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습니다 -_ -.. 요동성 함락 이후 항복한 백암성에도 고구려군 1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안성 같은 경우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_ - ..

  • 07.03.27 22:51

    고대사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학설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고고학에서는 무덤의 분포와 규모, 개수를 기준으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인구를 판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현 일대에만 무덤이 약 12000여개가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가장 많은 수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상당히 큽니다. 또 평양성의 남쪽에 장수산성은 고고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10만여명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수도인 평양성의 경우 둘레 23키로이고 거주 인구가 거의 40~50만이 거주했다고 추정되며, 봉황성도 둘레 15키로의 거대한 성입니다.

  • 07.03.27 22:52

    당시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적국들은 모두 남쪽이나 서쪽(서북, 서남)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고구려를 견제할만한 세력이 없었습니다.

  • 07.03.27 23:19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군대의 숫자는 대략 30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대문예(무령왕님 덕분에 기억함.)의 입으로, 또 최영장군 기록, 최치원의 발언에서 확인되며, 실제로 수, 당과 전쟁을 할때에 고구려 군대를 추정해보면 30만 이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말기의 고구려 인구는 약 600만이 됩니다. 여기에 고구려의 복속민을 합치면 1천만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 07.03.27 22:58

    호태왕님 발해 무왕이 흑수말갈을 정벌하려 할 때, 동생인 대문예가 형인 무왕에게 고하던 말로도 고구려의 군사력을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 07.03.27 23:00

    발해고 신하에 관한 고찰 대문예 편을 보면 대문예가 왕에게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나라와 등지는 일입니다. 당나라는 큰 나라로서 병사가 우리보다 만 배나 되니, 그 나라와 원수지간이 되면 우리도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 시절에 병사가 30만이나 되어 당나라에 대적하였으니 아주 힘센 나라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당나라 군대가 한 번 출동하여 고구려를 완전히 쓸어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무리가 고구려에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왕께서 이를 거스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했죠^^

  • 07.03.27 23:19

    네, 무령왕님 말씀대로 대문예가 고구려의 강병이 30만이라고 했었습니다.

  • 07.03.27 22:39

    4. 동천왕조 기록을 보시면 고구려가 야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텐데요. 어떻게 청야전술 등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고구려군이 야전에 능하지 않는다고 쓰시는지 -_ - ..

  • 07.03.27 22:43

    1. 고구려가 당시의 국제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못만들었다구요? 장수왕~문자명왕 시기의 고구려는 막강한 유목제국인 유연과의 교류를 통해 유연을 아군으로 만들었고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사실상 제1의 가상적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북위를 군사력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군사력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만 -_ -

  • 07.03.27 22:44

    5. 각종 노역이나 군역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그리고 심지어 중국의 여러 왕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찌 이런 것을 고구려 특유의 것으로만 국한시키려고 하시는지 -_ -

  • 07.03.27 22:55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어느 날 갑자기 미천태왕 때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과 함께 지속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대에 대국이 된 이유는 미천태왕~소수림태왕(중간에 고국원왕 떄 한 번의 시련이 있었지만.) 선태왕들의 뛰어난 내, 외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07.03.27 22:59

    그리고 고구려가 1대 1에서 밀렸다는 것은 어불상설입니다. 초기 고구려도 전한, 후한(좌원에서 명림답부가 궤멸을 시킵니다.)과도 단독으로 전쟁을 행할 만큼 1대 1에도 능했습니다. 1대 1에 능하지 않았다면 숱한 정복활동들을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광개토태왕만 해도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고, 남방의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공파해서 바다 건너 왜까지 추격한 일도 있습니다.

  • 07.03.28 18:53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못한게 아니라 시기를 놓친것 같습니다. 더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것은 서토 였습니다.고구려 발밑에 갖혀 있는 백제나 신라는 언제든지 공격해 멸망케 할 수 있는 군사력은 있으나 국제정세가 시시각각 변하는 윗쪽 신경쓰기도 바쁜데 밑에 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겠죠. 거기에다 현실적으로 피 흘리며 전쟁해서 濟.羅멸망 시키기 보다는 조공같은 부차적인것을 얻는게 고구려 국력에 더 도움되었으리라 생각되었겠죠.삼국통일은 서토정벌을 끝내고 안정된 상태에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라당 연합군으로 인한 고당전쟁으로 그시기를 영원히 놓쳐다고 보여집니다.

  • 07.03.29 01:39

    명치호태왕님 참고로 덧붙여서...무덤의 분포와 수, 규모는 인구나 국력을 알려주는 지표가 아닌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구를 알기 위해서는 유구, 즉 주거지나 건물지와 같은 유구의 존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고로 유물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 한들 유구가 발견되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뭐 여담이었지만 그래도...알고 계시는게 낫다 싶어서. ^^

  • 07.03.29 12:38

    아, 그렇군요. 덕분에 하나 배워갑니다.^^

  • 07.03.29 23:03

    삼국통일은 근래의 관점이지 삼국이 형성되었던 때의 관점이 아니지 않을까요? 신라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숙적관계였던 백제를 당과 함께 전략적으로 치고 당의 필요 조건에 의해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로 갔다는 게 옳은 표현이 아닐까요?

  • 07.04.02 15:54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패배한 백제 아신왕은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했고, 신라는 고구려에 '재조지은'을 입어 그 군대가 주둔할 정도로 깊이 예속되고, 가야의 맹주 금관가야는 멸망합니다. 이 이상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통일'일 수 있을까요?^^ 지금 중국인들이 동북공정하는식으로 5세기초 한반도 지도를 그린다면 죄다 고구려 땅으로 표시됩니다. ㅎㅎ

  • 07.04.02 22:24

    금관가야가 공식적으로 멸망당하는 것은 562년입니다만 .. 물론 고구려의 남정으로 인해서 금관가야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비실비실거라다가 결국에는 신라에게 항복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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