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에서 *
나는 왜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는가 나는 왜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기차에서 뛰어내려 울고 있는가 이곳은 종착역이 아나다.
내가 기차에서 뛰어 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내 비록 평생 조약돌 갈아 당신에게 바칠 맑은 손거울 하나 만들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달리는 기차를 사랑하라
고요히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모내기를 말 끝낸 무논의 푸른 그림자를 바라보라 내가 기차에서 뛰어 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인생은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
나는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강연 등의 일로 기차를 자주 탄다. 예전에는 주로 서울역에서 탔지만 요즘은 집 가까운 수서역에서 탄다. 어떤 때는 어디 가야 할 일이 없어도 그냥 기차를 타고 멀리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기위해서가 아니라 기차를 타는 그 자체가 마냥 좋아서이다.
기차를 타면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먼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내가 내려가야할 목적지 역에 기차가 도착해도 굳이 내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요즘 내가 타는 기차는 대부분 고속철도를 달린다. 가끔 환승할 때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기도 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다가 저속으로 가는 무궁하호를 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궁화 열차의 느린 속력이 내 인생의 속〈〉력마져 느리게 전환시 것 같아 갑자기 내 인생의 시간의 양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서역에서 기차를 타면 환승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환승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갈아탈 기차가 진입해 들어오는 승강장을 환승 대기 시간 내에 제대로 찾아가야 한다. 만일 내가 목적지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고 다른 방향의 기차를 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번은 다른 승강장에 서 있다가 환승 기차를 놓치고 만 적도 있다.
목적지라는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느낀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주요한 것은 속력보다 방향인 것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인생도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어도 아직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공연히 속력만 내는 청년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하지만 그 속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못 들어선 산길에서 아무리 빠른 속력으로 걸어도 목적한 산정에 다다를 수는 없다. 내빅이션을 따라 운전 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방향을 놓치고 그 사실을 모른다면 아무리 달려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비행기도 방향 없이 속력을 내지 않고, 배도 방향 없이 달려가지 않는다.
만일 그 배가 돛단배라면 바람의 방향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돛단 방향에 의해 움직인다. 돛단배의 방향은 바람의 방향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돛의 방향에 달려 있다. 내 인생의 방향 또한 타의에 의해 정해진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의해 정해진다.
내 인생의 방향은 무엇보다도 성실한 방향이어야 한다. 선한 방향이 아니면 인생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물론 그 방향은 남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설정해야 한다.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 방향을 잘못 잡아 쉰이 될 때까지 무척 고생한 적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 〈월간조선〉을 그만둔 것은 소설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중학생 때 청소년 잡지 〈학원〉에서 주최한 학원문학상에 〈석의 심정〉이라는 산문이 우수작으로 당선된 후 나는 소설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물론 시인의 꿈도 키웠지만 문청시절엔 시보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서른 두 살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단편소설〈위령제〉가 당선되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나는 그때뿌터 열심히 소설을 쓰며 소설가로서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소설은 쓸 수 없었다. 조선일보사 출판국에 출근해서 매달 〈월간조선〉 만드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야근도 해야 했고, 마감 때는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다 3월호 마감이 완전히 끝나면 바로 그날 4월호 편집회의가 열리는 식이였다. 숨 쉴 틈이 없었다. 소설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10년 뒤에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그때 소설을 쓰자' 하는 결심을 하고 소설 쓰기를 뒤로 미루고 말았다.
참으로 잘못된 결심이었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하든 하루에 원고지 한 장이라도 소설을 쓰자' 하는 결심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마흔하나가 된던 9년 뒤에 〈월간조선〉을 그만두고 집필실을 따로 마련해 그곳으로 출퇴근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쓰기는 어려웠다. 어떤 서사에 대해 늘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글을 쓰다가 막상 문학적 입장에서 글을 쓰려하자
그 구성과 전개에 한계가 있었다. 현실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문장 또한 기사 쓰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어 개성적인 문제를 지닐 수없었으며, 소설의 구조 또한 뼈대만 있고 섬세한 서정적 잔가지나 물기가 없었다.
그래도 각고의 노력 끝에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출간했다.지금은 절판된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가 바로 그것이다.이 책이 출간된 뒤 한동안 무척 기뻐했지만 곧 슬픔에 빠져들었다. 누가 이사를 가면서 버렸는지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세 권이 내가 사는 아파트 쓰레기장에 그대로 버려진 일도 있었다.
"여보, 당신 소설책이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어!" 아내의 말을 듣고 얼른 달려가 보니 내 책이 쓰레기더미 속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마치 내 심장이 버려져 있는 것같았다. 나는 책을 집어들고 툭툭 먼지를 털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나 자신이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책을 가져와 내 방 책꽂이에 소중히 꽂아놓았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더 이상 소설을 쓸수 없었다. 몇번 시도해보았으나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작가마다 타고난 문학적 기질이 다 다르며,그 기질에 맞는 문학적 장르 또한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바로 시라고 생각되었다.
그동안 내가 설정한 문학의 방향이 틀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문학적 기질이 시 쪽에 있는데 소설 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소설 쓰기에 대한 내 속력도 문제가 있었다.
소설을 쓰더라도 단편부터 한 편 한 편 차근 차근 써나가야 했으나 당시 유행을 좇아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내었으니 그것은 올바른 소설 쓰기의 속력이 아니었다. 삼보일배三步一拜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밟아야 할 과정을 무시하고 과속해 질주를 한 거였다.
나는 과감히 소설쓰기를 포기했다,직장까지 그만두고 소설 쓰기를 열망했으나 그것은 내가 열망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이아니었다.이러다가 시도 제대로 못 쓰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나는 시를 버리지 않았으나 시가 나를 버렸다면 그거야말고 큰일이었다.
나는 다시 시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동안 틈틈이 언젠가는 시를 쓸때 필요할 것이라고 여기고 메모해둔 노트를 펼쳤다. 메모는 대학노트 한 권 분량쯤 되었다.그 메모노트를 바탕으로 밥도 적게 먹고,잠도 적게 자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시를 썼다.
그래서 7년 만에 다시 시집《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내게 되었다. 제대로 걸어가게 되었다. 방향이 틀리면 속력이 무의미해지고,속력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
첫댓글 방향이 틀리면 속력이 무의미해지고,
속력 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정호승 님의 산문집 감사합니다
주일 평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