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隋煬帝)
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우창(愚昌)·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곳에 살았도다.(행록 1장 1절)
수양제(隋煬帝: 569~618년)인 양광(楊廣)은 중국 수나라의 2대 황제로 후대에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수나라를 개국한 문제(文帝) 양견(楊堅)과 독고황후의 차남이다. 그는 수왕조의 탄생과 멸망을 함께 한 비운의 왕으로 불린다. 본래 수나라에서 제시한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明)이나, 당(唐)나라에서 비하하는 의미로 올린 양(煬)을 대신 붙여 주로 양제(煬帝)로 불린다. 여기서 양(煬)은 방탕하여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수나라는 진(秦), 한(漢)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곳곳에서 패업을 꿈꾸던 할거 정권들을 정복하는 과정을 거쳐 통일된 중앙집권적 봉건제국을 건설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 양견은 북주의 고위관리였다. 581년 2월 양견은 북주(北周)의 정제(靜帝)01에게 퇴위를 압박하여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황위를 넘겨받았다. 양견은 자기 아버지의 수국공02 자리를 이어받았고 또 수왕이라 칭하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의 국호를 수(隨)로 정했다. 그러나 수 자에 책받침 변 辶이 있어 ‘가다’의 의미와 같아 불길하다고 생각한 양견은 수(隨)를 수(隋)로 고치고 연호를 개황(開皇)으로 정했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내정을 혁신하고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남방을 통일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이때 양견의 아들 양광은 군사 50만 명을 이끌고 남쪽의 진(陳)나라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다. 이로써 수나라는 589년 남북을 통일하고 북방의 돌궐을 견제하면서 수백 년 동안 분열과 대립, 동란으로 얼룩진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양제의 황제등극
수문제(隋文帝)는 황제로 등극한 후에 그의 큰아들인 양용(楊勇)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후 수양제가 형을 대신하여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독고황후의 덕택이었다. 독고황후는 평소 매우 금욕적이고, 질투가 심한 사람이었다. 태자인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눈 밖에 났다. 이에 비해 양광은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사생활이 방탕하지 않아 어머니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양광을 후대에서는 패륜아와 이중인격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문제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양광은 사후의 일을 논의하는 문서를 신하인 양소(楊素)에게 보냈다. 그러나 양소의 회신이 궁인의 실수로 문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를 본 문제는 대노했다. 때마침 문제가 총애하는 선화부인이 병환의 시중을 들었는데, 선화부인을 양광이 희롱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두 사건으로 격노한 문제는 양광을 태자로 책봉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미 폐위된 양용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양광은 양소와 모의하여 아버지 문제를 시해하고 그 형마저 죽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수서(隋書)』03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것은 수문제가 죽을 때 양제가 그 자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에서도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의 내용이 서로 다른데, 일부에서는 수문제가 죽을 때 양제가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고도 한다. 기록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선화부인을 자신의 여자로 삼은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이에 대해 패륜아의 관점과 다른 해석도 있다. 수당 초기 황실의 외척은 대부분 유목민족 출신이다. 유목민족은 아버지가 작고하면 자식이 아버지의 처첩을 아내로 맞이한 풍습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여하튼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다는 수양제 등극의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역사는 망국(亡國)의 천자였던 그를 위해 변명조차 만무했을 것이다. 604년 진실과 곡해로 얼룩진 문제의 죽음과 함께 수나라의 2대 황제로 등극한다.
수양제 업적의 빛과 그림자
수양제는 황제에 즉위하면서 지방행정기관을 모두 군과 현의 2개 행정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진사과(進士科)를 처음으로 시행해 인재를 선발하는 길을 넓혔다. 또한, 문제 말기의 가혹한 법률을 수정하여 「대업률(大業律)」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일련의 혁신을 통해 수나라의 국력과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문제시기의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만리장성, 수도(首都)와 궁전, 대운하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였다.
먼저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서쪽 유림(楡林)에서부터 시작해 동쪽으로 자하(紫河)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새롭게 쌓았다. 또 양제는 지리적으로 서북쪽에 위치한 장안(長安)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를 낙양(洛陽)에 건설하였다. 농민 200만 명을 동원하여 일 년 만에 완공한 낙양은 전국의 중심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낙양은 산동과 강남을 쉽게 통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공물을 거두기가 쉬운 곳이다. 이 때문에 국가정치의 중심이 중앙으로 이동하고, 물자가 전국으로 고르게 확산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양제는 낙양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장안에서 강도(江都: 양주)에 이르기까지 강 연변에만 40개소나 되었다고 한다. 또 낙양의 서쪽에 서원(西苑)이라는 큰 황실정원을 지었는데, 그 규모와 웅장함이 베이징의 황실정원인 원명원(圓明園)을 초과한다. 그 안에는 인공 바다와 봉래·방장·영주 3개의 삼신산을 만들었다. 서원 곳곳에 여러 정자와 누각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역사서에 ‘하루도 빠짐없이 궁을 짓는 바람에 전국 곳곳에 화려한 행궁들이 생겨났다.’고 기록한다.
양제는 아버지가 중단시킨 대규모의 운하 공사를 재개한다. 이 대운하는 오늘날 북경에서 항주까지 연결하는 대공사였다. 중국의 대하천이 여러 개 있지만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상 동서 간의 교통은 편리했지만 남북 간 교통은 불편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수양제는 천연으로 생성된 하천과 하천 사이를 굴착해서 서로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다. 대운하의 대상이 되었던 강은 하북성 북쪽에서 발원하여 천진(天津)에서 황해로 흐르던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전당강(錢塘江)과 그 지류들이었다. 수양제가 건설한 운하는 장안에서 수로를 별도로 뚫어 하곡부(河曲部)에서 황하에 연결한 광통거(廣通渠), 황하의 강구(江口)와 탁군(북경)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 서원(西苑)에서 낙양을 관통하고 회하의 회음(淮陰)을 연결한 통제거(通濟渠), 회음에서 양주까지 연결한 한구(邗溝), 양주에서 소주와 항주까지 연결한 강남하(江南河) 등의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단, 이 운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건설한 것은 아니다. 일정 부분은 방치되었던 예전의 운하를 새롭게 준설하여 서로 연결한 것이다.
대규모의 영토 확장과 고구려 침공
수양제는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607년 8월 수양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돌궐과 서역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여 각국의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남방으로는 임읍(林邑: 베트남 하노이의 이남)에 이르기까지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양제는 3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입한다. 612년 정월에 양제는 100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이때 수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인 강이식 장군이 고구려에 귀화한다.04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 군대 30만 별동군은 살수에서 수장되고, 그해 10월 퇴각한다. 결과적으로 수양제의 1차 침입은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사 수를 동원한 전쟁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적인 군사 수를 보면 전쟁의 범위와 정도가 짐작된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613년 3월 양제는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그러나 수나라에서 양제의 폭정(暴政)을 지켜본 수나라의 양현감(楊玄感)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와 함께 장수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급히 퇴각을 결정한다. 국내에서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614년 3차 공격에 나선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수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눈치 채고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전쟁에 지친 수양제도 이를 구실로 군사를 철수시킨다. 이로써 3년에 걸친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엄청난 국력을 낭비했지만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나라가 황제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입하였지만 무리한 원정으로 인해 황제의 권력은 더욱 추락하였다.
수나라의 멸망과 최후
수양제가 이룬 성과의 이면에는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무리한 고구려의 원정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여기에 수양제의 폭정과 사치가 날로 심해져 백성들의 삶 또한 더욱 피폐해졌다.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차라리 불구의 몸으로 살지언정 죽음에 이르는 노역과 징집은 면하고 싶어 했다. 백성 중에는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 하여 스스로 팔과 다리를 자르는 자가 속출했다고 하니 당시 양제의 학정(虐政)을 짐작게 한다. 617년 결국 수나라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이 반란은 120여 건이나 되었고, 그 규모도 엄청났다. 618년 수양제는 수나라 38년의 영욕과 함께 그의 나이 50세에 생을 마감했다.
[출처] 수양제(隋煬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