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에 詩를 두고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 이성선 詩人
산에 모자를 두고 돌아왔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다 詩를 써두고 돌아왔네
어느 풀포기가 그걸 밑거름으로
바람에 흔들리다가 꽃을 피울까
산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속에 또
얼굴마저 빠뜨리고 돌아왔네
달처럼 돌에 부딪히고 일그러져서
어디쯤 흘러갈까
# 이향감정(離鄕感情)과 귀향의지(歸鄕意志)의 충돌과 대립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암벽등반가로 유명한 정승권씨의 말이다.
그가 산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동양학자 조용헌님은 연하(煙霞)가 있다고 한다.
연하는 연기와 노을이다. 그의 입산론을 들어보자.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 오른다.
8부 능선쯤에 올라가서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안개가 솜사탕처럼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 절로 없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녁노을도 있다.
산모퉁이에 서서 들판 저 너머로 붉게 물들어 있는 석양(夕陽)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긴다.
이러한 광경을 과도하게 좋아하다 보면 세속을 떠나서 입산(入山)하게 된다.
입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하벽(煙霞癖)’이 있는 사람들이다.
‘연하벽’ 환자(?)들이 좋아하는 전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1년 사계절 중에서도 칠월 백중(百中)이 지나고 4~5일쯤 되는 시점이
지리산의 운무(雲霧)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한다”
산꾼들이나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본성을 해부하는데 있어 향수(鄕愁)라는 말은
예리한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
종교학자이자 문학가인 엘리아데(M. Eliade)에 의하면 향수라는 말에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지’와
미지의 세계나 옛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서의 ‘이향감정’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귀향과 이향의 이중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적 없는 비경을 찾아내려는 산꾼들의 ‘이향감정’은 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곧 탐험정신으로 연결된다.
질풍노도와 같은 탐험 정신 앞에서 처녀지들은 속속 베일을 벗고,
자신의 신비로운 속살을 보여 주었다.
‘이향감정’이 폭발적인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동반한다면, ‘귀향의지’는
차가운 냉철함과 균형감각으로 발현된다.
산꾼들은 ‘귀향의지’보다는 ‘이향감정’의 수치가 월등히 높은 사람들이다.
‘이향감정’은 그 특유의 폭발성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만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럭비공처럼 튀는 ‘이향감정’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귀향의지’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
어디 은밀하고 빼어난 계곡 없을까?
어디 인적없는 좋은 오지가 없을까?
매년 여름이면 계곡 산행을 즐기는 산꾼들은 특유의 ‘이향감정’을 발동한다.
매혹적인 ‘이향’ 앞에서 ‘귀향의지’를 발동하여 균형감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산꾼들이나 역마살낀 사람들이 종종 귀향하는 못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면 발동되는 ‘이향감정’이 오늘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마야계곡으로 이끈다.
태고의 비경을 간직한 원시림이자 오지산행인 것이다.
#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 추성리...
새벽 1시에 대전을 출발한다.
덕유산 휴게소를 앞둔 고속도로엔 짙은 운무가 드리워져 있다.
속도를 높였다, 늦추었다를 반복한다.
갑자기 저 앞에 검은 물체가 눈에 띈다.
고라니 새끼였다.
안개속에 방향을 잃고 고속도로에서 서성거리는 거였다.
우리는 옆으로 비켜 지나왔지만, 행여 길에서 로드 킬(road kill)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다행히 한참 동안은 뒤따르는 차가 없다.
통영고속도로에 이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지리산의 품속에 빠져든다.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산내면을 지나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이다.
남원군 산내면이 뱀사골·달궁계곡을 끼고 있다면, 함양군 마천면은 한신계곡·
백무동계곡·광대골과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을 품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지리산이 만들어주는 물로 농사를 짓거나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생활을 영위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 지리산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임천강을 따라가다가 추성리로 접어든다.
추성리는 칠선계곡·국골·어름터계곡 물줄기가 만나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3시 무렵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추성리는 옛 가락국의 기운이 서린 지리산마을이다.
▲ 추성리 마을 전경 ( 2007.6.16맞은편 서암정사에서 촬영)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쫓겨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역시 가락국 군사가 체류하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실제로 추성리 주위로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난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남아 있다.
그 외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이 있고, 칠선계곡 옆으로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가야국 병사의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왕등재는 구형왕이 올랐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왕산이라는 이름 속의 왕은
구형왕을 가리킨다.
왕산 아래의 돌무덤 또한 구형왕릉으로 추정하여 전(傳)구형왕릉으로 부른다.
추성과 인근 의탄 마을로의 접근은 1472년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잘 나타나 있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에 이른다.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한 뒤 서속·기장·
삼·콩 등을 심고 살면 저 무릉도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거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지리산 최대의 溪谷美...칠선계곡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으면서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이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1964년 부산의 대륙산악회에서 첫 개척하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대륙폭포이고, 마지막 폭포에 도착해서는 경상도 말로
“마, 그냥 폭포라고 하자!” 라고 해서 마폭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1976년 실종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님이 유명을 달리한 곳도 이곳을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 훈련
등반을 할 정도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놓고 발길을 둘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 초입 왼쪽에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왼쪽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때
산돼지를 집어 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 칠선계곡이 자연휴식년제 적용구간이 된 덕분에
산행 들머리 추성리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어찌 칠선으로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졸지에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칠선계곡을 개방하라는 플랭카드가 사방에 나붙어 있다.
열려진 등산로는 고작 몇㎞도 안 되는 선녀탕까지 이다.
보통 일반인들은 산행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짧은 그 길을 오가며,
또 추성리와 두지터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오를 수 없고 보듬을 수 없는 칠선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곤 한다.
추성리에서 중산리까지 도상거리 약 20km.
평균적으로 12시간 소요된다.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마야계곡과 칠선계곡은
두 계곡을 연계하면 그 길이만도 장장20km에 달하는 먼 거리이다.
당일산행으론 무리한 코스여서 그동안 일부 산악 전문인들만 찾아드는 곳이었다. . .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은은하고, 울창한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청량하다.
비좁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면 곧 매표소가 나오는데,
추성리에서 계곡을 따라 2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곡길과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이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다.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고도 500m 안팎의 두지터는 지리산 북쪽이지만 동향이어서 아침 해가 궁색한 마을은 아니다.
현재 두지터에는 모두 다섯 가구 뿐.
그중 허정가(虛精家)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꾼들이 모여든다는 바로 그곳이다.
지난 1999년 9월 두지터로 들어온 김성언(39세)씨의 허정가 툇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흘러내린 초암릉과 두류능선과 벽송사로 내려서는 능선이 보이고,
창암능선의 기운도 등 뒤로 가깝게 내려앉는다.
그중 절반이 넘는 세 가구가 김씨처럼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울산이 고향인 김성언씨가 차도 다니지 않는 두지터 산골로 들어온 건 순전히 지리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두지터 주민이 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미친 듯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토굴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봄, 본격적으로 두지터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집수리에 들어갔다.
허물어진 집을 손보는 데도 무려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모든 걸 지게로 지고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칠선이 자연휴식년제로 묶이면서 산행객들의 발길은 한없이 뜸하지만 김씨의 허정가는
산꾼들을 맞고 보내는 일로 주말이 분주하다.
민박을 해 돈을 벌려면 손님들이 훨씬 많아야 할텐데도 그이는 두지터에 살면서 좋은 점을
“사람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 허정가 민박집... 전경
허름하고 낡은 옛집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밤과 아침은 도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자연환경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 허정가 (055-962-8014 / 011-851-1143)
# 일곱선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
골짜기는 능선을 나누고, 능선을 골짜기를 가른다.
그래서 창암능선은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가르고, 초암능선은 칠선계곡과 국골을 가른다.
그리고 두류능선은 국골과 허공다리골을 나눈다.
이렇듯 능선과 골짜기는 서로를 의지하며 산이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체를 이룬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두지동을 지나면 울창한 숲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한 산 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쉼 없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새소리, 풀벌레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선녀탕까지는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서 걷는다.
일곱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을 만난다.
▲ ↑ 선녀탕 / 두지통에서 2km 거리
옛날 일곱 선녀가 살았다는 선녀탕은 작은 폭포의 물을 끌어들여 옥빛의 길쭉한 탕을 만들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는 가지를 뻗어 물위를 비춘다.
지금은 크고 작은 돌등으로 많이 메워졌다.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조금 초라한 모습이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가 등장하는
동화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 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때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 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 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