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함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가라피*의 밤/이상국-
가라피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 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는데
이 산속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세월과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하가 되었다
날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산을 내려오는 시커면 밤에게
구렁이처럼 친친 감겨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서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옷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니고는 했다
*양양 오색에 있는 산골 마을.
-봄 밤/이세기-
환한 소리가 꽃을 피우는가
마당 언저리
천둥이 울다 간 자리
환하게
꽃이 열린다
저 스스로 몸을 내맡겨
낙화하는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그 무엇도 수락하지 않을 듯
방심도 없이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빗소리 들으며
나 흘러가 머물 곳을 생각한다
* 김수영 「폭포」에서.
-연애편지를 쓰는 밤/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건너뛰는 밤/권애숙-
5월 무논은 울음을 키우고
울음과 울음 사이에 길이 있다
울지 않고는 개구리밥처럼 벌어지는 나도
두 발 벗은 너도 걸어갈 수 없으리라
사랑은 울음통을 따는 것인가 캄캄하게
이 논에서 저 논으로 쏟아 붓는 소낙비처럼
한참을 와글거리다 이내 조용해지는 것인가
길섶에 멈춰 등을 구부리는 사람아
죽을힘으로 우는 것들 저 어룽진 무늬
들여다보려 애쓰지 말자
뒤집히는 바닥이 너무 척척하다
목 쉰 것들이 질펀하게 밤을 휘저을 때
길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이별은 이미
풀잎보다 얇은 귀를 열고 있다
한 생의 논두렁을 건너뛰며
누군들 속 시원히 울음통 한번 때려봤겠나
가릉거리는 나를 뭉개며 이지러지는 달이 멀다
-비파 타는 밤/조유리-
바람에서 생겨난 곡(哭)이 바람으로 돌아가 죽으려 할 때 산신각 시누대 숲 위패에 들어찬 망
자들은 뉘신가, 푸른 먹을 튕겨 혼(魂)을 부르는 손가락 끝에 여덟 괘를 얹고
떼를 입지 못한 밤 공기에 불려 나가 쌀점을 치는 처녀 보살 집 문설주 너머로 얼굴 없는 태아
들이 머리채를 흔드네 곡진한 어떤 쌀알이 축문을 불러 와 젖 보채는 혼백들의 인중에 체온을
바를꼬, 헛딛는 점괘마다 댓잎파리들이 제 목젖을 끊어 망월(望月)아래 신전을 차리네 우리를
벗어두고 간 꽃신 짝은 어느 산천을 떠도나요? 사위를 거두면 생시처럼
바람의 환대마다 갓난 애 울음 새파랗구나
-흰 밤/김선우-
밤의 길쭉한 씨앗을 너에게 줄게
내 오래된 영혼의 흰 머리카락
그것으로 탄생의 노래를
아기들은 전생의 기억이 명로하다 하였으니
대지에 차고 넘치는 색색깔의 귀신들에게
밥을 주어야지 명랑하게 울어야지
지구별에 환생할 운명을 가진 아이들이 흰 감자꽃 만발한 달에서 썩은 감자알처럼 죽어가는
지구가 슬퍼 흰 감자꽃 따주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더란다 오랫동안 달에서 구전되던
(꽃을 따네 구름이 울고 꽃을 버리네 열매가 자라고)
한 아기가 지구에서 태어나고
한 아기가 달로 건너가는
질기디 길진 흰 밤
미사포 속의 백골처럼 흰 노래
-바람을 읽는 밤/박주택-
가을은 저렇게 오는가
저수지에서 몰려오는 안개는 장례식장의 마당을 가득 메우고
울음과 울음 사이를 이어주던
자동차의 불빛도 끊어진 지 오래
술 취한 사내가 술병을 복도 바닥에 집어던진다
고요에서 발자국을 기억해 내는 사람들
그 발자국에 잠겨 문을 찾는 사람들
수많은 작별이 살아 있음으로 자신과 포옹하는 밤
저렇게 오는가 가을은
사람에게 붙잡힌 어둠이 잉잉거리고
산 중턱 모텔에서 반짝거려 오는
네온 불빛에 잠시 몸을 빼앗기는
이 모든 것들의 멀리 있지 않음처럼
울음을 더듬는 빛이
술병 조각에 베인 채
이제 돌아가라고 어서 도망가라고
자욱한 안개 속에다 피를 흘려놓는
귀뚜라미 우는 밤이다
-손금 보는 밤/이영혜-
타고 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
육십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양 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 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 사람과 물줄기가 내 생의 요약인가.
물길 어디쯤에서 아직 합수하지 못한
그 누구 만나기도 하겠지.
누설되지 않은 천기 한 줄 훔쳐보고 싶은 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보름달이
화투장 같이 잦혀져 있다.
-눈 오시는 밤/정이랑-
산의 등줄기를 덮고 나서, 그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듯
마을로 엉금엉금 내려오고 있다
숲속 어디쯤에서 놓아버리고 싶었던 길,
발끝에 부딪치는 어둠 지게로 짊어지고
딱딱한 담벼락 모퉁이 얼굴 문지르면
그제서야 몸뚱아리 뒤척이는 돌멩이들
이 한 몸 섞여질 수 없는 것일까
푸르름 피해 떠나온 그들
발등 핥으며 드러누울 즈음,
구경나온 불빛마저 포개지는 밤
포갤수록 하나의 빛깔로만 노래하는 그들
저마다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부푸는 마당가에 마음 끌어내어
사람들아, 한바탕 웃어젖혀 보아라
이승 다녀간 누군가의 숨결소리
산비탈 거머쥐고 꿩이 알 품은 듯
그처럼 솟은 한 채 집
오늘밤 몰래 몰래 품어보려 했음인가
-미사리 강변의 밤/양월희-
어둠 속의 강은 고요했다
불꽃 같은 도시의 피곤이 엄습함에도
강의 참을성은 나를 금세 평온하게 만들었다
하찮은 빛에도 만개한 달맞이꽃은
은은한 모습으로 강변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무엇으로 난 이 어두운 강변에 서 있는가
건너 불빛은 흐르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그의 긴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있다
나는, 저렇게 눈부시고 긴 뿌리로 서 있어 본 적이 있던가
사람의 뿌리는 사람 속에 박는 법
내 뿌리는 어디에 박혀 이리 흔들리고는 하는가
낚시꾼의 밤참이 다정해 보였고
오래된 듯한 연인이 앉아 도란거리고 있다
늘 그리던 고향 같은 강변에 떨어진
한 조각, 내 영혼의 포자는
한 쪽 어깨를 내준 친구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더 바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시간 속에서
난 작은 평화를 가졌다
삶은 살아 갈수록 가슴이 시려워
끝 없는 일탈을 요구했고
난 설레이면서도 언제나 두려워 떨곤했다
붕어들은 그 야밤에도 미끼를 노렸고
잠든 듯 살아있는 강변은
내 의식의 밑바닥으로 흘러 들었으며
귓가의 노래가 곧 뒤를 이었다
-망각된 밤/주원익-
당신은 말을 닫습니다
그 나무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꿈들은
밤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홍예처럼 구부러진 나뭇가지들 사이
당신은 우리에게 남은
말을 닫습니다
그 나무들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입맞추던 시간들은 멀리 꽃을 피우고
열린 문 앞에서 우리는
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 남겨진 공백으로 우리는
당신의 말을 닫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아닌 기억으로
당신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영원을 잊은 나무들이 밤을 꿈꾸고
흰빛 속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호랑지빠귀 우는 밤/안상학-
호랑지빠귀는 왜 우나
원고 마감 코앞에 두고 시는 없고
지나간 일기장을 들추다가
한 줄짜리 끼적거린 메모에 눈이 먼다
-기적소리를 듣고 슬피 우는 새가 있다
내가 쓴 글일까
아니면 어느 책에서 옮겨온 것일까
출처도 없고
검색창에 물어봐도 딴전이다
취중에 쓴 글일까
머릿속 가슴속 다 뒤져도 낯선 이 문장
시 한 편은 참하게 감추고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새
슬쩍 깃털 하나 뽑아본다
-기적소리를 듣고 슬피 우는 시가 있다
원고 마감 독촉 전화를 받고 진짜 시는 없고
하, 거, 참,
기적도 없는데 호랑지빠귀는 왜 저리 울어쌓나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