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道, 장자의 道, 부다의 道
1, 노자의 道
老子는 2500년전에 태어났다. 그는 헛된 有爲와 作爲로부터 우리 존재를 지켜주고 가장 가까운 곳에 道가 있음을 말해 유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존재의 해방자로 세계의 구원자로 불리어 지고 있다.
천지만물 중에 노자가 가장 사랑했던 사물이 바로 '물'이다 물에게는 아무 고집이 없다. 둥근 그릇에 들어 가면 둥글게 네모그릇에 들어가면 네모가 된다. 물은 주변 만물에 많은 혜택을 주지만 다투지 않는다.물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물에게는 억지가 없고 作爲가 없고 有爲가 없다.
老子는 우리 에게 정신적 선물을 주었다. 그 선물이 다름 아닌 無爲다. 노자가 처음으로 '無爲自然'을 말했을때 그는 이 우주가 어떤 흠결도 없는 궁극의 조화와 질서 속에 있음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노자의 무위란 이 우주 천지만물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 우주는 有爲를 필요로 하지않고 우주는 無爲自然속에 있다.이것이 노자의 '無爲自然說'이다.
노자의 세계에는 神이 존재하지 않는다.그는 어떤 人格神이 우주 바깥에 있어 그 자신의 의도된 계획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우주만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있을수없다고 하였다. 이 우주에는 우리가 알수없는 놀랍고도 어마어마한 神的인 기운이 가득 차 있어 그로 부터 천지만물이 샘처럼 솟아나고 있지만 그것은 神的인 것이기는 하지만 人格的인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神이 아니라 神性이다.이 신성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비인격적인 다름 이름이 필요하다. 노자는 이를 도(道)라고 하였다.
노자에게는 신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계념으로서 도가 있는 것이다.
道可道非常道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고
名可名非常名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 이름 없는 것, 그것이 천지의 근원이고
有名萬物之母 이름 붙인것, 거기서 만물이 생겨난다.
故常無慾以觀其妙 그러므로 영원한 無로써 그 근원을 볼수 있는 것이며
常有欲以觀其邀 영원한 有 로써 그 현상을 볼수 있는 것이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이 둘은 한 곳에서 나와 이름만 달리할 뿐
同謂之玄 둘 다 동일한 것을 가리키니,
玄之又玄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衆妙之門 모든 신비의 문이있다.
2. 석가의 道
참 道는 언어를 넘어서 있다. 우리 인간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진리탐구에 있어서도 언어에 의존해 살아간다. 그러나 實在는 언어가 아니며, 달은 손가락이 아니고,영토는 지도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이름을 붙여도 이름은 결코 사물이 아니다. 언어는 하나의 상징이며 관념이다.
붓다가 우주의 大道를 깨친후 설법을 시작하자 인도의 각처에서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설법을 구했으며 붓다는 그렇게 몇 년동안 법을 설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진리에 대한 언어적 설명에 매달릴뿐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한다는 것을 붓다는 알게 되었다.
어느날 붓다는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기로 예정되 있었다. 그러니 그날따라 붓다는 말문을 열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한참이 흐른 후 어느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붓다는 말없이 고요히 앉은체로 좌중에게 꽃을 한송이 들어 보였다.이것이 그날 설법의 전부였다. 그러자 장내는 웅성웅성하다가 이내 조용해 졌다. 아무도 붓다의 행위를 아는 사림이 없었으나
그 때 마하가섭이 조용히 일어나며 붓다에게 미소를 지으며 합장하였다. 오직 마하가섭만이 붓다의 뜻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왜, 붓다는 말없이 고요히 앉은 채로 좌중에게 꽃은 한송이 들어 보여 주었을까!
붓다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참다운 진리--(道)는 언어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하가섭이 알아차렸고 그리하여 붓다는 자신의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어떤사찰에는 무설전(無說殿)이라는 전각이 있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으로 말 할 수없으니 마하가섭처럼 불법을 께달으라는 전각이다. "설하였으나 설한바 없다."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老子의 道와 부다 비교
노자는 붓다처럼 운이 좋지 못하였다.께달음을 얻고 난 사람의 인생행로는 자신의 교단을 열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감추어 진리가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붓다는 전자의 경우이고 노자는 후자의 경우이다.
그러나 노자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도를 깨우쳤으나 불행이도 그 도를 알아들을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였다. 만약 노자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다면 지금의 ‘도덕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설법하고 가르치려면 그의 수준에 맞는 언어와 방편으로 제자들 귀에 달콤한 말로,때로는 세상의 평판 따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노자는 자유로운 위치에서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하면 되었다.
원효가 변역한 책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 ‘대승기신론’이다. 이책의 원작자는 인도의 ‘이수바고사’라는 사람인데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책이다. 바로 노자가 말하였던 것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一切言說 假名無實” 일체의 언설은 거짓일뿐 실체가 없다.
아무리 스승의 진여(眞如-진리, 또는 道 )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그 언어적 설명을 따라가서는 진여를 얻을 수 없다. 궁극의 이치는 이름을 떠나 있는 것이다.
“離言說相, 離名字相” 말을 떠나 있고, 이름을 떠나 있다.
그러면 처음부터 진리나 도가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것을 굳이 이름지어 ‘진리’나 ‘도’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마명(이수바고사)은 이렇게 말하였다.
“言眞如者, 亦無有相" 眞如라고 말한다 해서 또한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謂言說至極 因言遣言“ 그것은 이른바 언어의 극한이며 말로써 말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노자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사람들의 행동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도만이 진정한 도이며 자신의 神만이 진정한 神이며 자신의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하고 외치고 있다.
궁극의 실체를 가리키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 다르다. 어디서는 道라고 하고 어디서는 眞如라고 하고 어디서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한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며 거기에는 어떤 실체도 없다. 그것들을 다만 보다 고차원의 실체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우리가 수백,수천의 이름으로 부르는 우주의 저 근원적 一者는 본디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노자가 하는 말은 그것이다.
“無名天地之始 “이름 없는것,그것이 천지의 근원이요,
有名萬物之母” 이름 붙인것, 거기서 만물이 생겨난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는 도가 아니다. 도는 말로써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경의 마지막 구절은 신비로움이 가득한 글귀로 끝을 맺는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어둡고 또 어두운 가운데 모든 신비의 문이 있다.
그것이 道라고...
3. 莊子의 道
가. 요약: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안에서
좋은 것 나쁜것, 선한것, 악한것, 없다.
나. 내용 장자는 2천여년 전 전국시대 사람이다. 그는 평생 적막무문(寂寞無門)한 삶을 살면서도 높고 깊은 문화사상을 수양한 고대 현인이다. 장자는 그 저서에 비교적 완전히 그의 학술사상을 체현했다. <장자>의 ‘자연의 도’에 대한 이해는 <노자>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풍부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도의 본체에 대해 말해보자. “道는 들을 수 없으니 들린다면 道가 아니다. 道는 보일 수 없으니 보인다면 道가 아니다. 道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 있으면 道가 아니다. 道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 있으면 道가 아니다. 그 형체를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형체가 아니다. 道는 마땅히 이름지을 수 없다.” “대개 道는 ....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다. 얻을 수 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대개 道는 .... 태겁에 앞서 있으나 높지는 않으며 육겁의 아래에 있으나 깊지는 않다. 천지보다 앞서 생겼으나 오래된 것이 아니며 상고에서 성장했으나 늙지는 않았다. ” “대개 道는 스스로 근본인 것이며 천지가 있기 전에 예부터 확고히 존재했다.” “대개 도는 큰데서 끝나지 않으며 작은 데서 귀하지 않는다. 고로 만물을 갖추고 있으며 넓고 넓어서 담지 않는 것이 없다. 또 깊고 깊어서 측량할 수가 없다.” 혼원(混元)의 도로서 말하자면 “道는 하나에 통하며 그것을 나누고 이룬다. 그것이 이루면 훼(毁)한다. 대개 물(物)이 이룸이 없으면서 훼하면 다시 하나로 통한다.” “천하통일기(天下統一氣)이다.” “氣는 텅비어 있음으로서 물(物)을 대한다.” 陰陽의 道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陰陽이란 氣의 큰 것이다.” “天地에서 形에 비하여 유양에서 氣를 받는다.” 충합의 도를 말한 것은 “陰陽은 교통성화(交通成和)해야 비로소 萬物을 生成한다.” “陰陽이 잘못 행하면 천지는 커다란 뼈만 남는다.” 萬物의 道로 말한다면 “道를 뭐라고 말하는가? 天道가 있고 人道가 있다.” “무릇 道란 萬物을 재패하고 있다.” 道의 生化를 말하자면 “天地가 비록 크지만 그 변화는 균일하다.” “萬物의 모든 종류는 그 形象이 서로 다르며 시작과 마침이 마치 둥근 고리와 같아서 그 처음과 끝을 정할 수 없으니 이래서 천균(天均)이라 한다.” “만물의 생은 빨리 달리듯 하나 갑작스럽게 끝나니 움직임이 없으면 변함도 없다. 시간이 없으면 평온하지도 않으니 어찌 그러하다 하며 어찌 그러하지 않다 하겠는가? 확실히 스스로 변화하는 까닭이다.” 道를 인식할 때 시공관(時空觀)을 말하자면 “나는 천지 사이에 있고서 작은 돌과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다.” “무궁한 문으로 들어가 무겁(無极)의 들판에서 노닌다. “내가 근본을 관찰했더니 그 가는 것이 무궁하며 내가 그 결말을 찾아보았더니 그 오는 것에 멈춤이 없다.” “실재로 있는데도 그 처한 곳이 없는 것이 우(宇)이다. 길게 늘어지지만 그 본래가 민첩하지 않는 것이 주(宙)이다.” 이 일체를 가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없이 도에 대한 이해를 깊어지게 했는데 이는 장자사상의 주체가 아니다. 장자의 핵심부분은 자연의 도를 근본인생철학으로 삼는 것이며 이는 현실생활에서 어떻게 이상을 추구할 것이며 어떻게 인도와 천도를 평형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출생하면 죽음의 도전을 받는다. 누구라서 죽음을 면하랴. 누구라서 ‘태어남과 죽음의 고리’로 이뤄진 울타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겠는가? 이것이 현실이다. 죽음과 생이 명(命)이다. 밤과 아침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천지(天地)다. 사람이 얻어가지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 모두 물(物)의 정(情)이다.” “천하의 대계(大戒; 큰 약속)가 둘 있다. 그 하나는 명(命)이며 또 하나는 의(義)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명(命)이다. 마음에서 긴장을 풀면 안된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의(義)다. 적합하지 않으면 임금이 아니다. 천지에서 도망갈 곳이 없으니 이것이 대계(大戒)다.” “죽고 살고 존재하고 망하고 궁(窮)하고 달(達)하며 가난하고 부유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 훼손됨과 영예로움,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등등 이러한 변화는 명(命)의 행(行)이다.” “그것을 위하여 구하는 자는 얻지 못하니 그러므로 이 겁(极; 길마)에 이르는 것이 명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서 태어나 만물의 하나가 된다. 사람도 기의 한가지 존재형식이다. 만일 사람이 생사를 하나로 여기고 생사존망을 일체로 여기면 천하일기에 통하고 남음이 있으며 천지와 내가 더불어 생하는 경지까지 올라가며 만물이 나와 하나로 되는 경계에 도달한다. 이것이 이상이다. “옛날의 진인(眞人)은 생을 좋아할 줄 모르고 사를 싫어할 줄 몰랐다.” “지인(至人)이 마음을 쓰는 것은 거울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응하며 숨기지 않으니 물(物)을 능가할 수 있으면서 물을 손상하지 않았다.” “성인은.... 불생불사의 경지로 들어갔다.” “맥고사산(貘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살았는데 피부가 얼음과 눈 같으며 부드럽기가 처녀아이 같았다.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마시며 이슬을 먹었다. 구름을 타고 나는용을 부렸으며 사해(四海) 밖에서 노닐었다.” “지인은 신이다. 큰 연못같은 불길에서도 뜨겁게 느끼지 않으며 큰 강물 같은 곳에서도 추위를 모르며 우뢰가 산을 부수고 바람이 바다를 뒤엎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풍운을 타고 일월을 말타듯이 타며 사해 밖에서 노닌다.” “옛날 진인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떨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물에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는다. 이것이 이상(理想)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슬픔과 즐거움, 이해(利害)의 욕망을 피하여 지나가지 못한다.” “사람의 생은 근심과 더불어 함께 일어난다.” “슬픔과 즐거움이 오면 우리는 제어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면 멈추게 할 수 없다. 비(悲)는 세상사람이면 누구나 바로 거슬러 물리칠 수 없다.” “사람은 졸지에 이름을 날리고 이득 취하는 일을 일으키지 않는 자가 없다.” “좋은 소리와 모양 그리고 좋은 음식과 권세는 인간만이 추구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즐겁고 몸이 그것을 모양내려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평안해진다. 악을 피하려고만 하면서 스승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사람의 성품이다.” 이것이 생활이다. “만약 천지(天地)의 정(正)에 올라가 육기의 변을 다스리며 무궁하게 노니는 자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함께 생겨났으며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로 된다.” “만약 도덕에 편승하여 떠돌아니며...., 한 마리의 호랑이와 한 마리의 독사가 때를 만나 모두 변화하면 전일(專一)할 수 없게 된다. 한번 오르고 한번 내려가서 어우르는 것을 기량으로 하며 만물의 시조에서 떠돌아디며 각 물물마다 물에서 물이 아니게 되면 삿된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추구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커다란 차이점을 맞대하여 장자는 다음과 같은 처세 태도를 가졌다. 1) 순세(順世) : 인사(人事)를 순화하며 명철하게 보신했다. 허(虛)하여 물(物)을 응대하고 세상과 더불어 부침하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인도(人道)를 다했다. “어떻게 할지를 알 수 없으면 편안히 명을 따르고, 오로지 덕있는 자만이 가능할 일이다.” “오로지 지인(至人)만이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피하지 않고 남을 순종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2) 둔세(遁世) : 산 속으로 돌아다니며 인간 세상엣 잠잠히 숨는다. 사물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세상에서 은거하며 주동적인 태도로 인도와 천도 사이를 다닌다. “성인은 .... 스스로를 백성 앞에서 숨기고 호반에 스스로 숨으며 그 소리를 감추어 두고 그 뜻을 무궁히 하며 그 입은 말을 하나 그 마음은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긋나 있으면서 마음 역시 세상과 함께 할 가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은거하는 사람이다.” “지인이란 땅에다 먹을 것을 맡겨두고 즐거움을 찾으며 인, 물, 이익에 휘말리지 않고 괴이한 짓을 하거나 무엇을 도모하거나 일을 꾸미거나 하지 않으며 유연하게 가버리며 올 때는 성실하게 온다.” 3) 초세(超世) : 세상 밖으로 초연하여 도통으로 하나가 되며 물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티끌 세상 밖에서 노닐면서 적극적이며 주동적인 태도로 천도와 합한다. “지인(至人).... 가식 없이 깊이 살피며 물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명(命)과 물(物)을 변화시키지 않아서 그 종(宗)을 지킨다.” “진인(眞人).... 그 쪽에서 조물주와 함게하는 사람이 되며 천지의 일기에서 노닌다....” 순세와 둔세와 초세적 처세 방침을 실현한다. <장자>는 또 거기에 상응하는 수련사상을 제기했다. 1) 무욕하고 조용히 담담하게 살면 화는 없고 복은 있다. “평이하고 조용하여 담백하면 우환이 들어올 수 없고 사기(邪氣)가 침입할 수 없으니 그 덕이 온전하여 이그러지지 않는다.” “순수하여 때묻지 않고 정일하여 불변하며 담담하여 무위하며 동하여 천에 운행하니 이것이 양신(養神)의 도다.” 2) 지식을 잃어버리고 옛것으로 더불어 지내니 이에 하늘의 덕과 합한다. “지식을 잃어버리고 옛것으로 더불어 지내니 이것이 숨는 것의 이치인즉 하늘의 재앙도 없고 사물과의 연루도 없으며 사람의 시비나 귀신의 책망도 없다.... 그 신이 순수하며 그 혼이 파멸하지 않으며 허무하고 담백해서 하늘의 덕에 합한다.” 3) 형태를 잊고 허에 합하니 이것이 대도의 모양새다. “무사무려(無思無慮)하면 비로소 도를 알게 되며 재산이 없으면 비로소 도가 안정되고 따름도 없고 도(道)도 없으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 “뜻을 키우려면 형태를 잊어야 할 것이며 형태를 키우려면 이로움을 잊어야 할 것이며 도에 이르려면 마음을 잊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을 종합해보면 장자의 도는 자연에서 인생에 이르고 있다. 만물의 물질 기초에서부터 우주근원에까지 도달하여 광할한 이론 영역을 함양하며 멀고도 지루한 사유 여정을 밟아왔다. 그는 커다란 한 개의 개체적인 사람에서부터 자연 대도에 합하는 것과 무한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을 기술했으며 그 핵심은 도가적 인생철학이다. 그는 보다 광활한 우주적 자연적 각도에서 인생을 관찰했으며 유한한 인생을 무한한 자연의 도에 투입함으로서 도가 인생관의 주체적 골격을 이루었다. 출처 : http://www.tqg.co.kr/ling2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