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태양을 보며 새삼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생각했다. 인디언 모호크족의 추장인 제이크 습지는 ‘새해맞이 감사의 인사말’을 이렇게 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해주신 위대한 신령의 산물에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멋진 인사말이 아닌가. 새 아침 이 마음 여여(如如)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일출을 함께 본 지행교 교주들과 근처 꽃지기님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 와중에 언제 준비했는지 뜨끈뜨끈한 떡국을 내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반주로 산삼주까지 얻어마셨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보다 더 행복한 새해 아침은 이전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채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다시 남해에서 일출을 보았다. 첫날을 바닷가에서 인연을 맺어서인지 이번에는 무인도에서 본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금남면 노량에 사는 ‘낚시 고수’ 이철수씨에게 전화가 왔다.
“행님, 내일 새벽에 학꽁치 잡으러 갈까요?”
“뭐라꼬, 학꽁치? 그것 확 땡기네. 어디로?”
“일단 새벽 6시까지 우리 집으로 와보이소.”
“오케이, 몇 시간 뒤에 봐.”
단 10초 만에 통화는 끝났다. 낚시가 그렇듯이 감이 오고 입질이 왔을 때 바로 잡아채야 하는 법, 그것이 인생 아닌가. 인생이 뭐 별것인가. 우물쭈물하다가 평생 못 만나고, 못 가고, 못 먹고, 못 주고는 문득 ‘대문 밖이 저승’인 곳으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달뜬 마음에 채 세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나 중무장을 하고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해 바닷가로 달려갔다. 뜻밖에 어둠 속에 이철수씨 집 앞에서 꽃지기 이세정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교에서 출발한 어르신 다섯 명과 함께 여명의 남해 상주해수욕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낚싯배를 탔다. 생애 처음으로 무인도 일출까지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배가 나아가자 동남쪽 하늘도 여명의 커튼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무인도인 목도의 갯바위에 닿자마자 태양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무인도에서 일출을 본 것이다. 학꽁치 낚시는 뒷전인 셈이었다. 새해 일출을 보고 1주일 만에 다시 보다니, 그리 덕을 쌓은 일도 없는데 참 후안무치하게도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이철수씨는 순식간에 학꽁치 13마리를 낚아 올렸다. 겨울바다의 ‘은빛 손님’ 학꽁치가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며 날렵한 몸매를 흔들어댔다. 너무 아름다워 차마 먹기에 미안한 학꽁치, 그러나 겨울철 소주 안주로는 가히 ‘별 다섯 개’를 넘어설 정도다. 흰 살에 담백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맛이라니, 그것도 무인도에서 일출을 보며 식전의 석 잔 소주에 곁들이는 횟감으로는 최고가 아닌가. 마구 폭음을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무인도 갯바위이다 보니 간신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떠오르자 추운 날씨마저 풀려 마치 봄날의 동화 같은 무인도 바닷가였다. 거북손을 뜯어 삶아먹고 라면을 끓여먹으며 오후 3시까지 잘 놀다 돌아왔다. 아니, 잘 돌아온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태우러 오기로 한 낚싯배가 깜빡하고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무인도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 즐거운 일이었으니, 학꽁치의 몸짓으로 다가오는 한파마저 거뜬히 넘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새해 첫날부터 바다에 깊이 마음과 몸을 주어서인지 공교롭게도 환한 달빛 또한 바닷가에서 보게 되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서해안 태안반도에 자리한 오지의 자드락 펜션 앞바다에서 섣달 열이튿 날의 달빛이 교교하게 내리는 밤바다를 본 것이다.
지리산에서 만난 동갑나기 남자친구들, 지행교 네 명이 오래 전부터 함께 겨울여행을 하기로 다짐했었다. 지난해 겨울에는 강원도 정선의 오지마을 덕산기계곡에 다녀왔고, 여름에는 서해 대천앞바다 작은 섬 녹도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지난 1월 11일 출발해 하동~순천~해남~진도~목포~고창~변산반도~군산~태안반도 등 서해를 일주하는 2박3일의 여정이었다.
쉰 고개를 막 넘긴, 아직 크게 아프지 않고 살아남은 수컷들이 모처럼 의기투합해 나선 길이었다. ‘제발 아프지 말자. 너무 욕심내지 말자. 세상사 힘들어도 가끔은 즐기며 살자. 남의 눈치나 보지 말고 제멋대로, 제맛대로 살아보자’는 모토 아닌 모토를 걸고 만사 제쳐놓고 떠났다. 훠~얼~훨~ 철새처럼 행복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섬진강에도 달빛이 교교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늑대처럼 최면에 걸리기에 참 좋은 밤이 아닌가. 달빛을 보며 돌이켜보니 여행과 더불어 지나온 삶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3년 전에는 나도 처음으로 ‘마이 아파’ 내 몸에도 달빛이 고이다 못해 흘러 넘쳤다. 10년간의 전국 도보순례 등 반노숙자생활로 얻은 훈장인 결핵성 늑막염을 앓고 난 뒤에야 늑막(肋膜)이라는 글자 속에 달월(月)자가 들어 있는 이유를 처음 알았다. 2년간 치료하고 지난 1년 동안 야생화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완쾌됐다. 그러고 보니 천지간의 약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면 20대에는 나이 스물아홉을 넘기지 않겠노라는 치기의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30대를 맞으며 서른셋을 넘기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다가 어느새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마흔아홉을 넘기고는 마침내 지천명의 때를 막 넘어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
앞으로도 내 목숨 내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어쩌면 이미 덤으로 사는 인생일지도 모르니, 다만 그때가 오면 달게 받아들여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물론 스물아홉 이전의 정신, 그 순수함을 어찌 다 지키겠는가마는 그래도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서른세 살 정도의 열망과 열정만이라도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겨울 바닷가 벼랑 끝에 둥근바위솔
지난해 12월, 바닷가 벼랑 끝에서 만난 둥근바위솔도 인상적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는 한겨울 바닷가 벼랑 끝에 마지막 둥근바위솔이 피어 있었다. 남도의 해안가를 돌아다니다 만난 이 야생화가 경이롭다 못해 눈물겨웠다. 이미 11월 말에 졌어야 할 둥근바위솔이 하루 종일 먼 바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사막의 삶을 살고 있었다.
척박한 벼랑 끝에서 거름기도 없는, 바위틈의 흙도 아닌 돌 부스러기에 겨우 뿌리를 내린 채 어쩌다 내리던 빗물과 밤이슬만 마시며 염천 사막의 낙타처럼 푸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찔하고 열악한 곳에서 혹한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정신의 깃발’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둥근바위솔의 눈으로 휘휘 둘러보면 노란 산국은 폭설 속에도 마지막 얼굴을 내밀고, 청미래덩굴의 빨간 열매 또한 얼었다 녹으며 ‘붉은 투혼’을 보여 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도에는 한겨울에도 꽃이 피고 있다. 은목서나 금목서와 닮은 구골나무가 흰 꽃을 피우고, 성질 급한 동백꽃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양지바른 땅바닥에는 광대나물과 큰개불알꽃과 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머지않아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봄은 이미 아주 가까이 와 있다. 그리하여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
동백꽃을 줍다
이원규
이미 져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쳐지는 추억이 있느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우며, 예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 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것을 경아 혁아 화야 산아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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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無… 南無… /글·사진 이원규 시인 산과 절·바다, 베이징을 넘나들다 - ▲ 가을이 되면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는 순천만 갈대밭에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무들이다. 힘들게 익힌 열매도 내려놓고, 마침내 붉거나 노랗게 물든 잎마저 모두 내려놓을 줄 아는 저 무소유, 저 알몸의 나무들이 매서운 죽비를 든다. 그래서 나무를 두고 나를 넘어선 나무(無), 나무아미타불의 남무(南無)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무, 나無, 南無!
가을은 참회와 용서의 계절이며, 무소유 무집착의 날들이다. 지리산 반달가슴곰과 뱀과 개구리는 여태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단식과 묵언정진의 동안거(冬安居)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이 산중에 사는 큰 기쁨은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봄이면 내 몸의 잎과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내 몸 그늘 아래 누군가를 쉬게 하고, 가을이면 무성한 잎과 열매를 모두 나누어 주는 한 그루 무욕의 나무로 섰다가 겨울이면 누군가의 온돌방을 위해 장작불이 되는 것!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의 기생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이니 그리 조급해하거나 탓할 수만도 없는 일 아닌가. 어찌됐든 직립보행의 인간의 자세로 돌아가 10월 중순부터 설악산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남도를 향해 매일 걷는다면 날마다 단풍을 볼 수 있으며, 4월 초순에 남해에서 민통선을 향해 매일 걷는다면 또 내내 진달래꽃을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나 사전 지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직접 해보지 않고는 또 제대로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듯이 책이나 교육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과 직접 몸속에 저장되는 지혜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일단 오래된 나무를 스승으로 삼기로 했다. 틈이 날 때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남해군 창선면의 오백년 된 왕후박나무를 찾아가고, 송광사의 천년된 쌍향수, 뱀사골 와운리의 천년송 등 이 땅 도처에 살아 있는 신목(神木)들을 한 번 찾아가보는 것이다. 그 나무들의 온 몸에 입력되거나 활자화된 지수화풍의 시절들을 엿보며, 그 뿌리를 베개 삼아 하룻밤이라도 잠을 자는 날이면 나의 온몸에 수많은 나이테가 들어서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늦가을의 노란 은행나무 잎은 그대로 수천 년 동안 누군가에게 배달된,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엽서요, 나뭇가지는 집배원의 손이며, 몸통은 그대로 우체국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이미 살아 있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집이요 책이지만, 죽어서도 집이 되고 책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올 가을은 상생의 날들을 꿈꾸며 “나무, 나無, 南無!” 주문을 외며 동서남북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 시인 300여 명이 시를 바친 천태산 은행나무
충북 영동의 천태산 영국사에서 수령 1,300년의 은행나무를 만나고, 경남 삼랑진의 만어사에서는 천연기념물 제528호인 암괴류를 만나고, 전북 완주군의 옥련암에서 하룻밤 묵기도 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 때마다 소울음 소리로 밤새 운다고 해서 유명한 나무다. 천연기념물 제223호인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1m, 가슴 높이 둘레만 11m일 정도로 거대한 천년수다. 절 입구 고갯길을 넘어서며 채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첫눈에 확 다가서는 은행나무의 신비로운 수형과 거대한 풍모에 눌려 나도 모르게 합장부터 해야 했다. 과연 ‘천태산 영국사의 부처님’으로 불릴 만했다. 아직도 해마다 은행이 세 가마니 정도 열리는 데다 가지 한 가닥이 늘어져 땅에 닿았다가 거기서 다시 순이 돋아 또 한 그루의 새끼나무로 대를 잇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영동 출신 시인이자 영국사 바로 옆마을에 거처를 마련한 양문규 시인(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대표)이 주도해 해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올린다. 아마 한 나무에 300여 명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바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일 것이다.
영국사에 은행나무가 있다면 삼랑진 만어사(萬漁寺)에는 천연기념물 제528호 암괴류가 있다. 엄청난 크기의 돌들이 거대한 너덜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 이곳까지 와서 미륵바위가 되고, 용과 1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따라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수많은 돌들을 두드리면 천태산 은행나무처럼 우는 소리를 낸다. 쇠소리, 옥소리, 종소리로 우는 돌들을 1만 마리의 물고기로 비유한 것 자체가 참으로 기발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은 시집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를 펴낸 동갑내기 시인 조용미씨가 자주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를 읽고 만어사의 가을을 자세히 둘러보니 전설이든 풍광이든 시의 원형질 그 자제였다.
전북의 단출한 암자 옥련암에는 일감 스님이 있다. 그는 불교TV에서 ‘일감 스님의 내비둬 콘서트’를 진행해 왔다. 지난 11월 2일에는 이 콘서트의 100회 특집을 서울의 스튜디오가 아니라 이 옥련암에서 녹화했다. 나도 2년 전에 이 콘서트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100회 특집이자 마지막 고별방송 콘서트에 초대됐다.
그동안 출연했던 모든 이들이 모여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중 암자에서 1박2일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녹화와 더불어 일감 스님이 출연진들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밥 한 끼 공양으로 대신했다. ‘내비둬 콘서트’는 말 그대로 최소한의 각본으로 출연자와 일감 스님이 ‘꼴리는 대로’, ‘지맘대로’ 진행해 편집한다.
그날도 녹화 중 시낭송을 해달라더니 갑자기 노래를 한 곡 청해서 난감하기도 했지만, 금세 “술도 안 주는 절에서 무슨 노래냐”며 뽕짝 한 곡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은 “아래채에 밤새 곡차가 준비돼 있다”며 껄껄 웃었다. 그야말로 전국의 다양한 괴짜들이 함께한 유쾌한 우중 산중의 가을밤이었다.
마치 불교 신도들이 ‘3사 순례’를 하듯이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절을 둘러본 셈이다. 그 와중에도 내가 가장 자주 찾아간 곳은 바로 우리 집 뒷산인 지리산 형제봉과 순천만 갈대밭이었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순천만도 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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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쓰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용담의 모습. 2 가을에 피는 녹차꽃과 달이 만났다. 녹차에 걸린 달빛이 마치 어느 게 꽃인지 달인지 구분이 안 된다. 필자가 다중 촬영으로 렌즈에 담은 작품이다. 3 지금은 지리산 녹차꽃이 한창 필 때다. 차꽃이 피는 동안 지난해 핀 꽃은 열매를 맺는다. 4 천연기념물 제528호인 삼랑진 만어사의 암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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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봉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꽃향유 등 올해의 마지막 야생화들이 피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보랏빛 용담꽃이 눈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약초로 알려진 그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쓰다고 해서 용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름지기 인생의 본맛은 용의 쓸개보다 더 쓴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행복과 기쁨은 지속적이지 않고 짧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으려고 발버둥칠수록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는 더 깊고 넓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쓴맛의 정면에 서서 즐기다보면 어느새 쓴맛 뒤에 슬슬 침샘으로 우러나는 단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쓰디쓴 용담의 청보라 빛이 푸른 하늘과 어울려 달달하기만 했다.
바로 그 청명청명 푸른 하늘 아래 형제봉에 지리산행복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이 소풍을 가기도 했다. 이른바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자기 세계관의 교주인 지리산행복학교의 교주들, 줄여서 ‘지행교 교주들’이 가을산행을 한 것이다. 주로 하동과 구례에 사는 ‘누구나 교주들’인 ‘선녀와 나무꾼’(신도웅·박경애), ‘이슬비와 여울비’(이상주·장숙남), ‘꽃지기’ 이세정·정중석 부부, ‘여수 회천사’ 김현대, ‘노량진 회천사’ 이철수, 구례로 귀촌한 ‘지구인’ 우종남, 막내 ‘시우’ 조한수씨, 구례의 농부 등과 화개동천 의신골의 최도사가 동행했다. 나무꾼님이 해발 1,100m의 형제봉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저마다 준비한 다과와 술 한 잔씩을 곁들이며 지리산 형제봉에서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가을’하고 살짝 발음만 해도 떠오르는 곳이 있으니, 바로 순천만이다. 언젠가 ‘지리산 편지’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 불어 내 마음도 마구 그대에게로 쏠리는 날이면 순천만 갈대밭으로 달려갑니다. 신경림 시인의 등단 작품 중 하나인 ‘갈대’를 떠올리며 70만 평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순천만 갈대숲에 몸을 숨깁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었던 순천만 갈대밭은 세계적으로 보전가치가 높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지요. 갯벌을 포함한 면적이 800만 평 넘을 정도로 경제적 가치 또한 무량 무량한 곳이자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에서 최초로 ‘람사협약’(국제습지협약)에 등록될 정도로 생태계의 소중한 보고이지요.
갈대밭과 개펄은 온갖 희귀 철새들의 안식처이자 뛰어난 정화능력을 가진 ‘자연의 콩팥’입니다. 사시사철 장엄한 갈대밭을 대하는 순간 몸과 마음은 완전히 무장 해제되고 말지요. 해마다 가을이면 자꾸만 쓸쓸해지는 마음에 갈대들이 보드라운 비질을 해주고, 봄이면 어미 갈대들이 여린 마음의 뼈를 곧추세워 줍니다.
키 큰 갈대밭 속으로 5m 정도만 들어가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숨바꼭질이 있을까요. 그러나 가릴 수 있는 것은 내 몸일 뿐,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마음이야 어찌하겠는지요. 서산의 붉은 노을 바람이 불어오면 갈꽃들이 쏠려도 자꾸 그대를 향하여 쏠립니다. 아무래도 나는 그대의 철새 도래지. 우리는 모두 철새처럼 한 철 머물다 떠나는 누군가의 여인숙입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순천만을 찾게 된다. 갈대밭으로 재두루미 등 겨울철새들이 날아들고, 그들의 먹이이기를 자처하는 갯벌의 붉디붉은 칠면초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틀 동안 갈대밭과 칠면초 밭에 철새처럼 스며들어 사진을 찍으며 홀로 잘 놀았다. 덕분에 다중촬영 기법을 구사해 보기도 하며 재미있는 사진 몇 장을 건지기도 했다.
그리고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훌쩍 중국의 베이징(北京)을 다녀왔다. 3박4일 일정이었지만 참으로 알차게 다녀왔다. 대전에서 부동산업을 하던 동갑나기 친구의 제안으로 아무 준비 없이 따라나선 것이다. 나의 벗 설산 김영기는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남들에게 싫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심성으로 사업을 해왔으니 그동안 속이 얼마나 시커멓게 탔을 것인가. 마침내 지난 여름을 전후해 몸도 마음도 지치고 지쳤던 것이다. 나이 쉰 고개를 넘기다 보면 누구나 몸과 마음의 이곳 저곳에서 위기의 신호탄이 터지듯이 이 친구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참으로 슬기롭게도 설산 김영기는 스스로에게 엄청난 선물(?)을 했다. 모든 사업을 잠시 내려놓고 일단 푹 쉬기로 한 것이다. 지리산에서 한 달 이상 머물며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골짜기와 산정에 올랐다. 평소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며, 지리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알차게 보냈다. 그리고는 내게 문득 베이징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좋은 친구와의 여행은 그 언제 그 어디든 상관없이 멋진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무작정 따라 나섰다.
- 난생 처음 가본 중국은 말 그대로 광활했다. 스케일이 컸다. 만리장성이 그러했고 자금성과 천안문 등이 그러했다. ‘소계림’이라는 용경협곡의 뛰어난 풍광과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이 눈길을 끌었고, 두 번 본 공연과 무대의 스케일 또한 대국다웠다. 황사와 스모그로 흐린 베이징이 사흘째 되던 날 마치 환대라도 하는 듯 우리의 가을하늘처럼 청명해지기도 했다. 베이징의 푸른 하늘을 본 것은 큰 소득이었다. 흔히 여행의 3대 복으로 멋진 일행, 착하고 성실한 가이드, 그리고 날씨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 세 박자가 모두 척척 맞아떨어졌다. 좋은 친구와 더불어 합류한 다른 한국인 일행들 또한 인간적 예의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 너무나 좋았고, 연변 출신의 교포 3세인 미모의 가이드 이미영씨 또한 베테랑이자 엘리트였으며, 날씨 또한 청명했던 것이다.
특히 명품 뮤지컬로 불리는 ‘금면왕조(金面王朝)’는 감동적이었다. 이 공연은 베이징 최고의 테마파크인 환락곡(happyvalley 테마파크)에서 중국 내 최정상급 감독, 편극, 무대미술, 조명, 음악 제작자, 의상 제작사 및 200명의 배우들이 함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서, 중국 고대 신화 속의 두 남녀가 벌이는 금빛 사랑의 로맨스다. 수많은 배우들의 기예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준 것은 무대였다. 상하좌우 중첩적으로 움직이며 보여 주는 무대 장치와 스케일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무대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홍수를 재현한 폭포가 한동안 쏟아지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높은 폭포가 객석 맨 앞자리에 물보라가 밀려올 만큼 퍼부어 관객들을 압도했다.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몰래카메라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이징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불편함도 없지 않았다. 어쩌다 대륙도, 한반도도 아닌 38선 아래 작은 섬이 된 소국의 촌놈으로서의 회한 또한 밀려들었다.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사내대장부의 기개는커녕 분단국가의 소인배가 되어 날마다 쪽박이나 차고 있는 조국의 안부를 묻는 여행이기도 했다.
겨울에 피는 녹차꽃 사이로 달 모습 담아
무작정 베이징에 다녀온 여파로 밀린 숙제들이 산적해 한동안 정신없었다. 순천대 문창과 강의를 마치자마자 모터사이클을 타고 대구로 달려가 인문사회연구소에서 회의를 하고, 곧바로 전남 완도의 약산도로 달려야 했다. 1박2일간 전라도와 경상도를 두 번 왕복한 것이다. SBS ‘물은 생명이다’의 촬영팀인 김기영 PD와 합류해 약초로 유명한 약산도를 둘러보았다. 전남 강진의 아름다운 항구인 마량항에서 몇 해 전에 놓인 고금대교를 지나 약산대교를 건너면 옛 지명으로 조약도가 나오는데, 이 약산도는 200여 가지의 약초와 흑염소, 그리고 매생이 양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직 개발의 광풍이 불지 않은 곳이어서 섬 주변의 갯벌들도 잘 살아 있는 데다, 해발 400m의 산 곳곳에는 약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약산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신선골 약수터는 천하의 절경이었다. 산의 8부 능선에 자리 잡은 이 약수터는 아파트 3층 높이의 큰 바위 아래에서 석간수(石間水)가 흘러나온다. 약이나 차를 달이는 데 최고로 치는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의 물맛도 좋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남해바다의 절경 또한 기가 막혔다.
촬영을 마치고 지리산 아래 섬진강변 집으로 돌아오니 차꽃이 피어 있었다. 늦가을의 꽃이지만 한겨울에도 피는 녹차꽃이야말로 진정한 설중화(雪中花)가 아닐 수 없다. 매화나 복수초, 변산바람꽃, 동백꽃 등의 설중화는 봄날의 꽃샘추위 때나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야생 녹차꽃은 가을과 겨울에 꽃을 피워 다음해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지난해 핀 꽃의 열매가 익어가는 동안 올해는 또 내년의 씨앗을 위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꽃과 씨앗이 1년의 시차로 동시에 피어나고 열리는 것이니 사계절을 초월하는 동시에 통시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사도 이 정도는 돼야 할 터인데, 갈수록 단 하루 앞도 잘 안 보이니 난감할 뿐이다.
달도 보고 야생 녹차꽃도 담으려고 다중촬영을 해봤다. 쉽지는 않았지만,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오래 버티며 온갖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 ‘님도 보고 뽕도 땄다’. 카메라 렌즈와 플래시와 인간의 눈이 겨우 접점을 찾은 셈이다. 전문가들이 보면 좀 우습겠지만 사진 공부를 무식하게 독학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볼수록 달빛과 녹차꽃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달이 지면 이 꽃들은 또 별들과도 한판 잘 놀 것이다. 이렇게 또 하루 하수상한 시절의 가을밤을 건너 겨울로 간다.
한 편의 시
단풍나무 인터넷 -이원규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지금 절정이야 피아골 단풍잎들이 스팸메일을 보내 왔다
자판을 칠 때마다 잎잎 푸르던 날들이 저물고 엔터키를 두드릴 때마다 섣부른 낙엽들이 몸을 날린다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고스톱을 치다가 야, 낙장불입이야 낙장불입! 그래, 그렇지 인생이야말로 낙장불입이야
아침저녁으로 접속하는 단풍나무 인터넷
옷 벗기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무서리 내리고 나목이 되었다 -
그래, 일단 푸욱 겨울잠을 자자 나비야 청산 가자 /이원규
나비야 청산 가자 저 하늘의 삼태성이 잘 안 보이면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자 인공위성 세 개의 위치 정보를 따라 번지며 전화번호 검색으로 못 찾으면 인근의 술집이나 맛집 숙박지 주유소를 지나 나풀나풀 범나비야 너도 가자 눈물의 모터사이클 시속 170킬로미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나비야 미안하지만 산제비나비야 너보다 빠른 잠자리나 꿀벌들이 몸은 어디로 가고 선글라스에 내장이나 노란 꿀만 처바르는데 사뿐사뿐 잘도 피해 가는 선녀부전나비야 팔랑팔랑 잘도 피해 가는 지리산팔랑나비야 미안하지만 꼭 그만큼 유연한 삶의 속도로 청산에 가자 가다 못 가면 아무 데나 쉬어 가련만 아서라, 저 화려한 꽃은 피 묻은 돈 저 푸른 이파리들마저 제초제 범벅이구나 상제나비야 너도 가자 청산 가자 아주 가까이 다 왔으니 108마력의 슬픔, 모터사이클의 엔진을 끄고 향기로 빛깔로 청산을 찾아 가자 인공위성 내비게이션을 끄고 소리로 맛으로 촉감으로 오감의 굴뚝나비야 배추흰나비야 차라리 지리산 앞마당의 세 평 텃밭에 가자 예감의 그 꼴림으로 우리 집에 가자
-시집『강물도 목이 마르다』(실천문학사. 2008)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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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련. 이 세상에서 이런 사내 하나 만나는 거 흔치 않은 일입니다.지리산을 만나면 지리산이 되고, 섬진강을 만나면 그대로 강물이 되는 사내, 강물보다 더 부드러운, 모래처럼 낮고 깊은 사내 하나 여기 있습니다. 나무를 만나면 나무가 되고 풀위에 누우면 풀이 되고 산짐승과 같이 있으면 그대로 순한 초식동물이 되는 사내 하나 여기 있습니다. 바람따라 걸으면 길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별이 되는 수줍은 사내 하나 여기 있습니다. 무련. 당신을 만나면 사무치는 울음이 되는 사내하나 여기 있습니다.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경전도 아닌, 그러나 중을 만나면 중이 되고 속을 만나면 속이 되고 경전을 만나면 경전이 되는 사내 하나 여기 걸어가고 있습니다. 예수와 붓다, 원효가 걸어간 길, 걷고 있는 길,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내 하나 여기 있습니다. . . . 무련. 그리하여 이원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눈물많고 정많은 사내입니다. 병치고는 아주 깊은 병이지요. 병이 깊어지면 어디 가겠습니까. 병 깊은 만큼 산도 깊고 달빛도 깊어 푸른 강물을 물들이고, 무량하여라 바다를 물들이고, 온 우주, 뭇 생명들을 다 물들이겠지요. 하루아침에 이 세상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을 만날 수있다는 희망 하나만이 새기고 걷는다면 운수납자가 아닌 시인의 길을 택한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저 두텁게 쌓인 눈이 녹고, 갈 봄 여름 없이 바람이 불어, 또 은하수 건너 수억 광년이 흐르고 흘러, 그대 눈썹이 희어져 첫눈으로 내릴 동안에도 시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숨이 끊어 지는 날까지 아니 갈 수 없는 숙명의 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무련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멀어도' 울음 끝에 봄은 오고 꽃은 피겠지요. 도보 고행의 땀 젖은 신발은 지금 어느 길 위에 서 있을까요. 햇빛 따사로운 하늘 아래 잠시 서서 꽃꿈을 꾼 자리. 그 환한 길로 당신 만나러 또, 길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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