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들어있는 절기는 곡우(穀雨)이다.
여기저기 논밭을 갈고 심느라 농사일에
바쁜 계절이라 농작물이 자라는데
필요한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 하는 절기이다.
곡우란 봄비가 내려 경작한 곡물들이
윤택하게 자란다하여 부르는 절기이다.
이 때에는 나무들도 기지개를 펴고
지층으로부터 물을 빨아올려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다.
특히 물을 많이 흡수하는 나무들로부터
수액을 채취하여 곡우 때
곡우물(穀雨水, 곡우수), 거자수라 하며
마셨는데 대표적인 나무가
자작나무와 고로쇠나무이다.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를
상징하는 4월의 달나무로
고로쇠나무와 자작나무를 선정하였다.
* 고로쇠나무(Acer mono Maxim.
Painted Maple)
참고리실나무, 개고리실나무,
개고로쇠나무 등의
이름(이북 방언)으로도 불린다.
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수로서
전국의 큰 산 골짜기에 서식하는
분포지가 넓은 수종이다.
고려 초 도선국사(827~898)가
오랫동안 좌선을 한 후 무릎이 펴지지 않아
고생하였는데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마시고 일어났더니
무릎이 쭉 펴졌다고 하여
뼈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고 부르다가 점차
'고로쇠'가 되었다고 한다.
백제군과 신라군이 전투를 하다가
화살 박힌 고로쇠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고
전투를 계속했다는 전설도 있다.
지리산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곡우 무렵(4월 20일경)에
고로쇠 수액을 마시며 곡우제 행사를 한다.
최근에는 줄기에 플라스틱 파이프를 꽂아
수액(液)을 채취하여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경칩 때 마시는 고로쇠물은
여자한테 좋고,
곡우 때 마시는 고로쇠물은
남자한테 좋다고 하는데,
맛이 좋기로는 울릉도 특산인
우산고로쇠 (Acer okaotoanum)를
빼놓을 수 없다.
곡우시절에 이렇게 수액을
채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리현상에 기인한다.
곡우 때에는 대체로 낮과 밤의
기온차이가 심하다.
밤에 기온이 내려가면
나무는 수축하는데 그 때문에 물을
흡수하려는 힘이 강하게 작용하여
지층으로부터 물을 세차게 흡수하여
수체(樹體)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아침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높아진 외부 온도로 인하여
수체가 이완되면서 몸안의 물이
팽창하게 되므로 나무에 상처를 내면
물이 쉽게 밖으로 많이 나오게 된다.
수액 채취는 수목의 생리현상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이다.
채취 후에 수액 채취 구멍을 막으면
여름 될 무렵에 상처가 아문다.
웬만한 고로쇠나무 한 그루에서
약 7리터의 수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 Hara. White Birch)
봇나무(함북 방언), 한자로 백화(白樺),
백단(白根), 백단목(白檀木),
화목피(樺木皮)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Betula는 라틴어로 자작나무를 뜻하며,
platyphylla는 '넓다'라는 뜻인
platys와 '잎'을 의미하는
phylla의 합성어이다.
자작나무는 곡우 때 고로쇠나무와 함께
수액을 받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한대성 낙엽활엽수로서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의
자작나무 군락이 유명하다.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이북의 높은 산에 자라며
남한 지역의 자작나무 숲은 식재한 것이다.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마른 나무가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불에 잘 탄다는 데서 유래한다.
자작나무는
줄기에 매끈하고 얇은 하얀 수피를 가져
백의민족인 한민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무이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장니(障泥,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도 백화피(白皮)
즉, 자작나무 수피에 그린 것으로서,
신라인들이 북방에서 이주해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가야산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판을
만드는 데도 산벚나무와 함께 이 나무가
사용되었다(임주훈, 김기원 등, 2018).
썩은 줄기에서 자라는 차가버섯은
항암제를 조제하며,
자일리톨 껌은 핀란드 자작나무에서
추출하여 만든 것이다.
핀란드는 자작나무의 나라이며,
사우나를 할 때 자작나무 가지를 한묶음
준비하여 온몸을 두드린다.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 왜 이렇게 자작나무가 흔할까?
엘리아스 뢴로트(Elias Lönnrot,
1802∼1884)가 지은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와 관련된다.
태초에 공기의 처녀(일마타르)가
물위로 내려와 물의 어머니가 되는데,
흰뺨 오리가 그녀의 무릎에 둥지를 틀어
알을 낳는다.
알이 깨져 사방으로 흩어져 하늘과 땅,
해와 달, 별과 구름이 되어
천지를 형성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물의 어머니로부터
베이네뫼이넨이라는 영웅이 태어난다.
사람도 식물도 살지 않는 섬에 도착한
그는 여러 해 머물다가 경작의 정령인
삼프사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씨를 뿌리도록 하였다.
소나무, 전나무, 관목, 덤불숲, 자작나무,
오리나무, 산벚나무, 수양버들과 버드나무,
마가목, 곱향나무, 참나무를 심었다.
나무들은 무성한 잎을 내며 자랐고,
곱향나무와 산벚나무에서는
감미롭고 맛있는 열매가 열렸다.
하지만,
참나무는 아무리 기다려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물의 신부들이
건초더미를 태워 재를 만들고
그 위에 거인이 도토리를 심었다.
싹이 트자 참나무의 정수리는 천상까지
닿았고 잎이 하늘까지 퍼져
떠다니는 구름이 움직이지 못하고
해와 달을 가려서 햇빛도 달빛도
빛을 내지 못할 정도였다.
베이네뫼이넨은
고민 끝에 참나무를 베도록 했다.
넘어진 거대한 참나무는 크고 작은 가지,
잎들이 조각조각 찢겨 흩어졌는데,
그 부스러기를 잡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영원한 복을 누렸다.
해와 달은 다시 빛나기 시작하였고,
황무지는 온갖 나무와 기화요초로
아름다워지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베이네뫼이넨은 도끼로 땅을
개간하였는데, 다른 나무들은 베었지만,
독수리의 안식처와 각종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작나무만큼은 남겨두었다고 한다
(숲과문화연구회, 2014).
그 덕분인지 모르나
어디를 가나 자작나무숲이다.
아직도 핀란드 사람들은 경외의 뜻으로
오두막 주위에 자작나무를 심고 있다.
시베리아 샤먼에게 자작나무는
우주목이며,
유럽에서도 자작나무는
매우 신성한 나무이다.
켈트족의 달력 “나무들의 알파벳"에서
자작나무는 가장 추운
첫째달(12월 24일~1월 21일)에 놓이는데
이것은 태양의 재생과 관련된다.
또, 빛의 재상승을 기념하는
축제(성촉절)에 자작나무는
특히 성녀 브리지트(Birgit)에 봉헌되는데
Birgit는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인도-유럽어 Bhirg가 어원이며,
여기서부터 자작나무의 영어 birch,
독어 die Birke가 유래한다.
시베리아 신화에서 자작나무 영혼은
중년 여인으로 나타나는데,
신자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젖가슴을 보이고 손을 내밀어
젖을 먹게 한다.
젖을 먹은 남자 신도는
힘이 왕성해진 것을 느끼게 된다.
불사의 음료이자 생명과
지혜의 묘약인 소마(soma)는
"리그베다"에서 조차 칭송하고 있는데,
신들의 자비를 빌기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
소마는 히말라야 같은 높은산에만 있는데,
그곳은 훌륭한 우주산이며,
근원목인 몇 종의 자작나무가 살고 있다.
곧 소마는 자작나무에서 유래한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자작나무는 세상에 빛을 주고,
분쟁을 중재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더러움을 제거한다고 한다.
자작나뭇가지로 횃불을 만들고,
사우나에 자작가지로 몸을 치고,
자작 타르로 수레바퀴의 삐걱거림을
방지하기도 한다.
자작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이나
소마와 같은 “자작나무의 피인 수액은
식물요법에서 널리 사용한다
(주향은, 2007; Laudert, 1999).
봄철에 자작나무 수액을 마시고
차가버섯을 먹으면 건강해지고
원기 왕성해진다고 믿는데
이것은 신화적인 근거가
충분히 있는 듯이 보인다.
자작나무에
중년 여인으로 분장한 여신이 깃들어
있다고 하니 줄기에 나 있는
눈(皮目, 피목)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긴장되지만 만지기만
하여도 힘을 얻을 수 있을듯하다.
추위에 강한 나무,
한겨울의 나무,
척박한 땅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개척자로서 세상의 생명이요
빛의 나무이니 화촉을 밝힐만하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겨울 흰 눈 내린모습과
가을 노랗게 물든 모습이
파란 하늘과 어울렸을 때 가장 아름답다.
백청, 백황청이 자아내는 풍경이
자작나무 빛깔 이상으로 혼백이 비산할
만큼 시원하고 순결하고 우아하다.
참고문헌
_ 김기원 외. 2018.
산림문화진흥방안 및 법률개정안 마련
연구용역, 산림청.
_ 김호준 · 박봉우 · 임주훈 • 하연, 1997.
경관수목학, 두솔.
_ (사)숲과문화연구회, 2010,
산림문화가 산림에 끼친 영향,
산림청 녹색사업단.
_ (사)숲과문화연구회, 2014,
국가의 건립과 산림문화, 산림청.
_ 이석호 역. 1991.
조선세시기, 동문선.
_ 이수봉, 2008.
철따라 살펴보는 세시순례, 경인문화사.
_ 이우철. 2005,
한국 식물명의 유래. 일조각.
_ 정상진, 1996.
우리민속과 전통문화,
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_ 주향은 역, 2007.
나무의 신화. 이학사.
_ 한호철, 2016,
24절기 이야기. 지식과 교양.
_ Laudert, D. 1999.
Mythos Baum, BL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