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3월7일(화)■
(유다서 1장)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묵상/유 1:3-4)
◆ 주님께서 주신 믿음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성경에는 두 종류의 믿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고 또 하나는 내 믿음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잘 구별해야 생활이 잘 될 수 있다.
성도들이 구원받을 때, 하늘의 은사를 여럿 받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단번에 주신 믿음'을 말하고 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믿음의 도'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단순히 '믿음(the faith-πιστις)'이라고 했다. 모든 영어 성경과 다른 한글 성경은 다 '믿음'으로만 번역했는데 비해 유독 개역개정만이 '믿음의 도'라고 번역했다. 중국어 화합본 성경은 아예 '진리의 도(眞道)'라고 번역해놓았다. 이것은 번역자의 신학이 들어간 완전한 왜곡이다.
'믿음의 도'라고 하면 믿음을 가진 자가 지켜야 하는 여러 규례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유다가 본래 말하려는 것과 빗나간다. 유다는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있음을 기억하라.
이 믿음은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도록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다. 그러자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몰려왔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믿음이다. 내 믿음이 아니다. 내가 믿습니다를 반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믿음이다.
우리가 사역할 때, 주님께서 주신 이 믿음으로 사역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으로 산다고 했는데, 이것도 원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번역해야 맞다. 이런 오류가 생긴 이유는 믿음을 모조리 '내 믿음'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나는 믿음의 종류를 구분할 줄 몰라서 내 믿음으로 무엇을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이라는 옛 고어를 믿음에 적용시켰다. 내가 믿음만 잘 키우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죽자 믿음만 있으면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 잡념을 품지 않고 믿음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자매, 사차원의 세계를 말하면서 무엇을 갖고 싶으면 마음에 그것을 그리고 믿음을 키우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유명한 목사, 병자를 앞에 높고 몇 시간째 믿습니다를 반복하는 분... 모두 자기 믿음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혼동했다.
이들은 모두 주님께서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옳길 수 있다고 하시니, 바이러스보다 작은 내 믿음을 겨자씨만큼 키우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겨자씨보다 작은 씨는 존재하지 않았다(막 4:31).
지금 기적이 일어나지 않음은 내 믿음이 겨자씨보다 작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없는 믿음을 키우려고 애쓰지 말고, 믿음을 주실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나, 어떤 사역을 해야 할 때는 오히려 힘을 뺀다. 아, 그동안 내 사역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혼적이며, 심리적인 것에 불과했는지...
이제는 내 믿음으로 무엇을 하려는 무모한 일을 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할 때 교만에 빠지지 않고, 무슨 일을 해내어도 그것이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오, 모든 성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믿음을 부여받았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벧후 1:1)
우리는 베드로에게 주셨던 그 믿음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는 사도로서의 능력이 나타났다면, 내게는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 능력이 발휘될 것이다. 모두 각자의 은사에 맞게 믿음을 행사할 일이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잊지 말고, 이 믿음으로 행하는 훈련을 하자.
마귀와 싸울 때도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마귀와 싸우는 마당에 최근에 나 자신이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은 그것과 관계없이 언제나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허물과 어리석음 때문에 자책하고 있을지라도, 마귀가 덤비면 나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단호하게 대적하고, 추호도 밀림 없이 싸울 것이다.
기도할 때도 내 의, 내 공로에 의지하지 말고, 내 믿음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이미 주님께서 주신 내 안에 있는 믿음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아뢸 수 있어야 한다.
◆ 내 믿음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는데 반해 '내 믿음'도 있다.
'내 믿음'이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내 믿음'에 대해서 책망하거나 칭찬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내 믿음이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 아니다. 내 믿음이란, 의심하지 않는 일이며, 더욱 주님을 신뢰하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0)라고 하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자기 딸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믿음이다.
나의 믿음이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며, 감사하는 믿음이며,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다.
가령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을 주실 때, 내가 그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 손을 내미는 자가 자랑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는 내 공로, 내 노력이 전혀 없다. 오로지 선물 주신 분에게 감사할 일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선물을 주실 때 두 손을 공손히 내밀고 감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쓸데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내 믿음'도 중요하다.
오늘 유다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한다(3).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우는 것은 '내 믿음'에 속한다.
의심과 싸우고, 헛된 철학과 싸워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도록 해서는 안 된다.
◆ 가만히 들어온 사람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지니라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들어온 자들이다. 언뜻 보면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다. 본인들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모르나 그 열매가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타이틀에 속지 말고 영을 잘 분별하여 멀리해야 한다.
이들은 홀로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홀로 하나이신'이란 말에 주목하라. 그리스도는 여럿이 아니라 유일하심을 잊지 말라.
오늘날 많은 신학자가 예수님을,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수 많은 사람 중에 하나로 전락시켰다. 우리도 정의를 위해 살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한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부정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라고 했는데, 주재(主宰)란 '중심이 되어 일을 처리하는 자'란 의미지만, 원어적으로는 '데스포테스(δεσποτης)'라고 하여 절대적 통치자를 의미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는 하나님께만 적용할 수 있는 말인데, 유다는 예수님께 적용했다. 즉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시사한 것이다. 모름지기 성도는 예수님의 이러한 절대적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왕 노릇 하며,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자기 지배하에 놓는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교묘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세속화시킨다.
이런 자들을 분별하고, 이런 자에게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
이런 자들과는 그냥 싸우는 정도로는 이길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힘써 싸워야' 한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확실하게 끊어야 하며, 의심을 물리치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를 사람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메시지 하는 자가 엉터리 메시지를 하면 떠나야 한다. 아무리 내가 잘 분별한다고 해도 엉터리 메시지를 계속 들으면 반드시 부패한다. 그의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분별하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나도 모르게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날마다 배우게 해주십시오.
첫댓글 내 믿음이란,의심하지 않는 일이며,더욱 주님을 신뢰하는 일이다.
아멘 아멘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또는 믿음의 도를"
이라고 번역되 부분은 제가 보기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이 목적격이 아니라 여격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심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단번에 성도가 되어진 것으로 저는 봅니다.
3절 ...믿음으로써 단번에 주어진(주신) 거룩한 자들에게(성도들에게)
힘써 싸우라는 것을 너희에게 권할 필요를 내가 느꼈다.
믿음으로써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 그래서 구원을 받은 것인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사의 믿음은 모두가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은사들 처럼
어떤 이들에게 특별히 자신의 믿음위에 더하여 주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 물론 제 의견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올리신 모든 말씀들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귀한 의견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래서 저도 한번 더 보게 되고 덕분에 더 발전할 기회가 되어서 감사합니다.앞으로도 귀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제가 헬라어가 짧아서 뭐라고 말씀드리는 어렵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관사 토이스가 여격으로서 하기오스(거룩한) 앞에 붙어서 '토이스 하기오스'가 '성도들에게'를 의미하고, 피스테이는 새언약님의 의견대로 여격이 맞긴하지만, 거기에 맞춘 것으로 보여집니다. 만일 새언약님처럼 해석하면 맡겨지다, 또는 주어지다라는 동사가 성도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불분명해지지 않을까요?.
@최야곱
"그 성도들 " 이라는 성도는 실상은 믿음으로써 거룩함을 입은 자들을 지칭함이지요.
그들은 곧 편지의 수신자인 너희들이고요. 이들이 본래 거룩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거룩한 자들이라는(성도들) 칭함이 주어진 것이지요.
<파라디도미: 주신>는 파라는 ~에게서와 주다의 합성이니만큼 믿음에게서 즉 믿음으로써 "거룩함이 주어진" 너희에게 (성도들에게)편지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성도는 한문적인 의미이고 그 거룩한 자들이라 일컬어짐이 주어졌다고 봅니다. ^^
그리고 이미 믿는 자들중 은사로
특별한 자들에게 더하여 주어진 믿음의 은사 말고는
믿음을 주께서 직접 주었다는 말씀은 합당치도 않고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께서도 오직 믿으라. 고 하시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새언약 그리고 내 믿음과 주께서 주신 믿음에 대해서는,
사도들도 성령강림 이전에는 주님을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왕으로 아는 믿음이었기에
주께서 잡히자 뿔뿔이 흩어지요.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승천을 보고
약속하신 성령강림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인 영의 세계와 영생을 믿게되니
그제야 주님의 원하시는 믿음을 갖게된 것이지요. 믿음은 이처럼 직접 주심이 아니라
주께서 보여주심을 통하여 또한 성령의 내주 역사로 말미암아
점진되어 주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저는 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성도들의 행할바와 믿음으로써 거룩해진 자들의 싸움은 어떠해야 되는지는 거의 동의입니다. ^^
@새언약 감사합니다.
유다서는 베드로후서와 상당히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일반적으로 사역에 따라서 주어지는 믿음이 다르기도 하지만, 모든 성도들은 동일하게 받은 보배로운 믿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 부활 등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라고 번역한 킹제임스성경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최야곱 저도 과거에는 새언약님처럼 생각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자꾸 내 믿음을 키워서 무엇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분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메시지 할 때나,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나 애쓰지 않고 편하게 합니다. 믿음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믿음으로 무엇을 이루면, 그것조차도 자기 의가 될 수 있더군요.
벧후 1:1절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의 안에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우리와 동류의 믿음을) 받은(랑카노: 제비뽑은 )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믿음을 받은 이라고 한다면 그 단어는 "람바노"를 써야 하는데...랑카노를 쓰고 있습니다. 랑카노는 제비뽑다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일은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처음부터 불가능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말 한들 그것을 크게 트집잡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없는데...믿지 않음으로 멸망받은 자들에 대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복된 언약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멸망이다. 라는 말은 정당 하지만...그러나 너희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아서 멸망을 받은 것이니 너희는 조금 섭섭해도 할 수없는 일이다. 우리와 너희는 본래 날때부터 운명적으로 다르게 태어났다. 라고 말하면 많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위의 올리신 본문의 말씀들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내 믿음이라고 말씀 하신 부분은 자기 신념을 내 믿음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도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여러번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그 믿음은 하나님의 복된 언약의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에 근거를 둔 믿음이지요.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속한 믿음이며 우리의 본이되신 그리스도의 믿음에 속한 믿음이지요.
그런즉 결코 하면 된다고 하는 나의 신념이 아니지요.
나의 신념은 내 믿음이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그 믿음은 당연히 아니지요.
말씀에 합하지 않아서 아무런 약속없는 나의 신념은 결코 하나님께 속한 그 믿음은 결코 아닙니다. ^^
@새언약 내 믿음을 신념으로 바꾸어도 큰 문제는 없을 듯 하지만,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칭찬받았습니다. 그 믿음은 주신 믿음이 아니라 본인들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믿음은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믿음은 자기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새언약님의 의견은 많이 생각하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새언약 구원을 얻을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이지만, 능력이 나가는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분을 안 되면 사역에 문제가 될 듯 싶습니다~
@최야곱
그것은 믿음의 구분이 아니라 은사의 구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 12: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새언약 맞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병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습니다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믿음의 분수를 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
@최야곱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지만, 구원의 은혜로 부어진 것은 또한 믿음입니다. 내 믿음 위에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부어진 셈입니다. 은사별로 주어지는 믿음도있지만, 모든 거듭난 신자들 속에 공통적으로 있는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하는 믿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있는 믿음입니다. 지금 새언약님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확실히 믿고 있는 것이 새언약님의 노력과 의지로 만든 믿음이나 또는 여러 정황상 믿을 수 밖에 없어서 믿게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권적으로 생겨난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빈무덤을 보면서 정황상 어쩔 수 없어서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까?
@최야곱
여기까지 토론을 하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최야곱님의 말씀의 의도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근래에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이견을 예정론1-3까지 정리하다 보니 믿음과 관련한 생각이 거기 미쳐있어서 속히 다가오지 않았네요. 알고 보면 같은 것을 서로 그 부분을 다르게 정리한 까닭으로 보입니다.
제가 정리해 봅니다. 최야곱님은 믿음을 자기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분하시고
1 자기 믿음은 구원과는 관련이 있으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자기 신념과는 다르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능력이 나타나며 부활 승천 등 신 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모두 굳게 믿는 것은 주신 믿음이다. 이는 은사와는 조금 구분 할 필요가 있다.
위의 정리가 대충 맞는다면 저는 이 구분을
1 자기 믿음: 저는 성령의 외부역사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리 했고요.
2 주신 믿음: 저는 성령을 받은 자가 성령의 내주 역사로 말미암아 그 열매로 나타나는 믿음이라고 정리 했습니다. 물론 성령도 자기 믿음으로 구하여야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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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언약
따라서 아래 내용은 주신 믿음을 제가 정리한 ‘성경 해석 란’ “예정론1” 에서의 일부분입니다.
*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이란?(갈5:22의 충성=피스티스(믿음))
본래 자신들의 믿음위에 성령의 내주 역사로 말미암아 그 믿음은 열매를 맺기에 이르게 되는데 그 열매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 즉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확신하게 하며 이는 복음전파로 나타나고 결국 주님을 닮은 애주애인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써의 믿음이다. ※ 본래 원문은 "믿음"인데 충성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이로써 신자의 1% 정도의 믿음도 우선은 전하는 자로 말미암아 성령의 외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면 이제는 더 나아가 성령의 내주 역사로써의 굳건한 믿음과 또한 은사까지로 하나님께서 점진 도우시어 그의 지식과 그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비소로 행함에까지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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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성령의 열매중에 "믿음" 이라는 열매가 있으니 그 열매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새언약
그러므로 나의 믿음 즉 성령받기 전의 자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아니고... 이들이 나중에 성령을 받아 내주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인 "믿음"이라는 열매가 맺히게 되니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믿음을 갖게되므로 이를 들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전적 동의입니다. 성령은 자기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이니 말입니다. ^^
@새언약 잘 정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