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희망이라는 것
김현승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 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
10.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11. 겨우살이
김현승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12. 겨울 까마귀
김현승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울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깍∼
13. 겨울 나그네
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너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 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장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 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 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解凍)의 기적 소리 기적처럼 울려와
땅 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14. 고독
김현승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15. 고독의 끝
김현승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16. 다형(茶兄)
김현승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17.동체시대(胴體時代)
김현승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 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첫댓글 절대고독의 시에는 경건함이 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함이 있다...
또 그리고 거룩한 기도가 내재되어 있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