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 숙
더위도 한 뼘 비켜 간 시월 첫날. 송골매 콘서트가 있는 날이다. 멀리 대구까지 공연을 보러 왔다. 야광봉이나 반짝이는 머리띠를 고르는 행렬은 분위기를 띄운다. 들뜬 기대와 표현하기 힘든 설렘 속에 ‘열망’이란 제목의 커다란 현수막 앞에 섰다. 그들의 40년 만의 비행이 이곳에서 열린다.
무대 앞 큰 화면엔 구식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한 남자가 구형 그랜즈를 타고 나오는 장면이 보인다. 동시에 가수들이 등장했다. 흰 머리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이 예전 느낌 그대로다. 장내를 휘감아 몰아치는 음악과 치솟는 불꽃을 배경으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멈출 수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한순간 나를 그날로 데려갔다.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다. 어색함과 낯섦이 가득하다. 꼭 이런 날은 자기소개가 빠지지 않는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침이 마른다. 고개를 들어야 할지. 표정을 어떻게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옆자리까지 차례가 밀려왔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성큼성큼 나간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이다.
“제 취미는 하루 한 시간 춤추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솔로 스테이지로 모시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올이 성근 카키색 재킷이 바닥에 던져졌다. ‘제3 한강교’ 노래에 맞춰 그녀는 춤추기 시작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자기소개였다. 유달리 작은 키. 커트머리. 얼굴엔 큰 잠자리 안경.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너무 당차 보이는 그녀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어린 왕자’를 이야기할 땐 철학자다. 깊이 있는 말을 할 땐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콧대보다 자존심은 높았고, 작은 눈에 비해 마음의 눈은 컸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불의를 보면 험한 욕설도 거침이 없다. 맥주 한 모금에 취기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 모두를 집중하게 하는 묘한 재주도 있다. 오늘 나의 이 외출도 그녀와의 추억 때문이다.
콜라 한 잔 값만 내면 춤추는 클럽이 있었다. 갓 성인이 된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을 쏟아 내기 딱 좋은 장소였다. 사이키조명에 눈이 부셨다. 점멸하는 불빛에 장면이 조각조각 나눠지더니,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흥분을 끌어올린다. 팔만 살짝 올려도, 고개만 들어도 영상이 부서진다. 그녀의 춤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팔다리를 거쳐 허리까지 묘하게 흘러 내렸다. 그곳은 너도나도 우리 모두를 훌륭한 댄서로 만들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리듬 속에 서 있던 뜨거운 우리 젊음이었다.
당차고 밝아만 보이는 그녀였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휴학을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병구완했고 어머니께서 떠나신 후에는 듣지 못하는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짊어져야 했던 삶의 어려움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책임도 부모 못지않게 중요했다. 어떤 어려움도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결혼할 시기를 한참 지나고서야 그녀의 의무는 끝났다. 그러고는 언니가 있는 남미 어느 나라로 떠났다.
그리웠던 그녀를 어렵게 다시 만난 건 두 해 전이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무신론자인 나와 달리 그녀는 신을 품고 사는 만신이 되어있었다. 긴 고통 속에 결정한 길이었단다. 사십 킬로 겨우 넘은 몸으로 아직도 세상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주어진 삶을 혼자 헤치고 나가기엔 힘들었나 보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모두의 삶은 닮았다고 생각했다. 신을 증명하기 위해 날 선 작두에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서는 그녀와, 냉혹한 사회라는 칼날 위에 있는 우리는 뭐가 다를까. 나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날들이 참으로 많았다. 인생에 대한 바른 정의도 모르고 앞으로만 나가는 게 맞는다고 여겼다. 끝없는 욕심은 스스로를 칼날 위로 내몰았다. 작은 손익에도 민감했고 남과 저울질하며 이기심만 부풀리곤 했다. 시댁과의 사사로운 갈등. 남편의 진급과 출세. 자식들의 성적. 몇 평의 땅과 더 넓은 집. 통장 속 숫자에 대한 집착. 남의 시선에 대한 의식. 욕망이나 질투가 한번 끓어오르면 아래로 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누군가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불안했다. 떨림 위에 서 있으면서도 정작 발아래 무엇이 있는가는 내려다보지 못했다.
마지막 곡이 끝났다. 여기저기 소리를 모아 ‘앵콜 앵콜’을 청한다. 예상대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연주된다. 멈추지 않는 함성을 뚤고 사이키조명이 뿌려진다.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린 오색의 폭죽과 비눗방울이 범벅이 된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많은 이들이 무대를 향해 뛰어나간다. 나도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대 저편 뿌연 연기 속 그녀가 보인다. 알록달록 한복에 깃 달린 모자를 쓰고, 무거웠던 의무감과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한을 털어내듯 맨발로 허공을 향해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
내 인생 속 어쩌다 마주친 그녀가.
퇴고
첫댓글 송골매 콘서트에 가셨군요
저는 Tv에서 봤어요
배철수와 구창모는 늙어도 매력적이더군요!!
김정숙 작가 글 읽으면서 친구들(캠퍼스때) 생각을 한참 했네요
' 어쩌다 마주친 그녀가 ' 잘 읽었습니다.
네 실은 콘서트는 처음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어요 그땐 몰랐는데 지나니 좋았던 시절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