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1501(연산 7)~1572(선조 5)
1. 가문과 생애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健中),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영의정 추증.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현 합천군 삼가면) 토골[兎洞: 외토리] 외가에서 부친 조언형(曺彦亨)과 모친 인천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남. 5세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본가는 삼가 판현(三嘉 板峴), 현재 삼가면 관동(冠洞: 일명 枝洞)이다. 처가는 김해에서 대대로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재산이 넉넉한 남평 조씨(南平 曺氏) 집안이며, 부인은 조수(曺琇)의 딸이다.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따온 것이다. - 붕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명(南冥: 南海)으로 날아간다. 남명(南冥)은 곧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를 말한다.
부친이 장원 급제하여 중앙에서 벼슬함으로서 1505년(5세)부터 1526년(26세)까지 한양(연화방과 장의동)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 한미한 가문이 아님. 시골 선비가 아님. 매력 있는 선비임.
1525년(25세)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옛 선인의 글을 읽은 후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 전념하였다.
1530년(30세)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 현 대동면 주동리)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38세) 유일(遺逸: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음. 1545년(45세) 고향 삼가현(현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지어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뇌룡(雷龍)은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에서 따온 말이다. -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잠해 있다가 때가 되면 천둥처럼 세상을 울리고, 시동(尸童: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신묘한 조화를 나타낸다.” 출전 - 장자. 계부(鷄伏)는 “닭이 알을 품는다.” 는 뜻이다. 그래서 “계복”으로 읽으면 안 된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暑 主簿)⋅단성 현감(丹城 縣監)⋅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이때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단성소(丹城疏)]를 올렸다. 을묘사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명 선생은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出仕: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로서 관료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오건(吳健)⋅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61세) 지리산 기슭 산청 덕천동(德川洞: 현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 주역에서 따옴)를 지어 여생을 보내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출사를 권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아전)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76년(선조 9) 남명 사후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德川書院)과 고향 합천에 회현서원(晦峴書院: 뒤에 龍巖書院으로 개칭)을 세웠다.
1578년(선조 11)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명의 신도비문은 당초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었으나 뒤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다시 찬술하였다.
2. 학문과 사상
남명의 스승은 지리산이라고도 하였음 - 천왕봉의 기상을 본받음.
지리산(智異山) :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라고 한데서 산 이름이 유래 됨. 공자의 수제자로서 청빈으로 유명한 성현(聖賢) 안회(顔回)와 같은 인물이 되고자 하였음.
경의론(敬義論) : 경(敬)으로서 내면의 마음을 밝히고 의(義)로서 밖의 일을 결단하는 선비 이론.
신명사도(神明舍圖) - 심성수양의 요체를 도표화한 그림.
경의검(敬義劍) : 품에 지닌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일을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뜻이다.
성성자(惺惺子) : 옷고름에는 작은 두개의 방울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방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에 매진.
“처사(處士)를 감당하기도 힘들다.” 라고 하였다.
노장사상, 도교 등 다양한 학문의 영향을 받았음 - 당시는 노장사상을 이단시 하였음 - 노장사상이 순수 주자성리학에 대치되기 때문에 배제됨 - 문묘종사 불가 원인이 됨 -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됨 - 퇴계가 비판함- 퇴계는 순수 주자성리학 주의(사상)임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학문적 쌍벽을 이룸 - 퇴계와 남명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며 특히 동갑이다. 실천적인 학문을 중요시 함. 평소에 제자들에게 왜(일본)에 대한 대책을 물어보고 그 대책문을 내어보라고 과제를 냄.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남명 사상을 배제하였음 - 이 때문에 남명 선생이 많이 알려지지 않음 - 일본 사람들이 남명의 항일 독립운동 사상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3. 제자들의 의병활동
약포 정탁, 망우당 곽재우(남명의 외손서 임), 내암 정인홍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곽재우 장군 임진왜란 발발 10일 만에 의병을 일으킴 - 임진왜란 때 제자 50 여명이 의병장으로 활약 - 남명의 실천적 학문을 계승하였음. 인조반정 이후 서인 세력의 집권으로 북인 세력이 무너짐 - 남명 제자들이 정계에서 배제되었음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비하여 덜 알려진 이유가 되기도 한다.
4. 평가
남명 선생의 처사(處士)적 삶, 경의론(敬義論),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제자 교육, 실천을 강조한 경세제민의 학문과 사상은 재조명되어야 하겠으며 우리는 그의 깨끗한 선비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주요저서 <남명집>
참고문헌(자료) : 국회 인문학 아카데미(2014. 11월 남명 조식) 강의 - 박병련 교수(한국학중
앙연구원 부원장)
[출처] 남명(南冥) 조식(曺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