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떠나는 연습
어머니의 마지막 여생을 서울에서 보냈으면 하는 이 작은 소망마저도 이제는 접어야 할 것 같다.
6월 14일 밤중에 어머니는 큰손녀가 부른 소방서 119구급차를 타고는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가셨고, 응급실을 거쳐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어제부터는(6월 18일) 일반병동으로 옮겨서 회복 중이다. 며칠 사이에 어머니는 너무나 참담하게 파리해졌다.
오늘 밤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발견한 의사는 가던 길을 멈추고는 되돌아와서 나한테 말했다.
'어머니가 많이 회복되었으며 더 회복되면 여러 가지 검사를 더 해야 하는데도 현재는 몸이 너무 약해서 검사할 수 없습니다. 검사가 끝난 뒤 다음 주 수요일에는 퇴원해야 합니다. 고향이 충남 보령이니 보령아산병원*으로 옮기세요.'
의사의 말을 어기고 '서울아산병원에 더 있겠다'고 떼를 쓸 수도 없을 터. 많이 회복되었으니 퇴원하라면 퇴원해야 할 터.
내 고향에도 보령아산병원이 있다. 여기로 가라고 조언한 이상 내가 보령지방으로 가던지 아니면 서울의 다른 병원으로 가던 지를 선택해야 한다.
오늘 ... 병원 협력센터에서는 ‘의사의 지시라면서 다른 병원을 알아보아 달라면 알아봐주겠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사는 곳이 서울 송파지역이기에 이곳으로 병원을 옮긴다면 주선해 주겠단다. 경찰병원과 요양원이 두 군데라고 말했다.
나는 ‘참고적으로만 듣겠다. 나중에 담당의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말했다.
상급의사가 오늘 밤에 내게 직접 말한 이상 나는 다음 주 수요일에 퇴원조치를 해야 한다. 서울이냐 고향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쪽을 선택해야겠다. 집이 아닌 병원이라면 어머니한테는 서울이거나 시골이거나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어머니한테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 드리는 게 낫다고 나는 판단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에 다녀오려고 했던 계획은 이제는 차질이 났다.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해야겠고, 어머니로서는 고향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게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고향집에서는 더 이상 모시지 못하고 병원에서만 모셔야 할 게다.
집에서 잠시라도 모시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입으로 미음(죽을 미세하게 간 음식물)을 넘기고 물을 넘기는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오로지 콧구멍에 긴 호스를 집어넣고 그 호스를 통해서만 미음을 넘기는 수준이라면 집에서 모시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별수 없이 병원으로 모셔야 한다.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사는 서울생활이 훨씬 편하지만 이쯤에서 접고는 만사가 불편한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 나야 고향이기에 불편한 것을 참아내지만 아내의 처신은 무척이나 불편할 게다. 아내가 전적으로 시골로 내려가서 살기도 그러하고 ... 이따금 시골과 서울을 오고 가는 방법을 택해야 할 게다.
내가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야 할 터. 낮에는 병원에서 머물고, 밤에는 고향집으로 와서 자는 이중생활을 할 것 같다.
어머니가 음식을 입으로 자실 수만 있다면, 내가 미음을 끓이고 숟가락으로 물 떠 드렸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어머니의 상태는 흡인성 폐렴*이다. 기관지에 물, 가래, 음식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발생할 게다. 어머니의 목구멍으로 물조차 넘기지 못한다면, 기도(氣道)에 물이 들어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직한 상황이 벌어질 게다. 제발 제대로 음식물을 넘기고 삼킬 수만 있다면...
오늘은 서울로 온 지가 131일째.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한다. 지나간 시간들이, 모든 게 그립고 아쉽다. 시골집에서 며칠간이라 모실 수만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며칠간만이라도 마지막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오늘도 면회시간에 병실에 들렀더니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셨다.
'어머니, 내가 누구여요?‘
물었더니만 어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우리...'
라는 말을 입술로 그려내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게다. 단지 '우리'라는 말로도 나는 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안다. 그만큼 어머니가 회복 중이라는 증거이기에.
아버지(나한테는 외할아버지) 등에 업혀서 남포면 용머리 갯마을에서 이곳 고뿌래(花望 화망마을)로 이사 왔단다. 이 집에서만 일생동안 외롭게 살던 어머니였고, 내가 정년퇴직한 뒤에서야 함께 살기 시작한 어머니의 인생은 끝무렵이었다.
내가 대상포진을 앓는 바람에 어머니의 끝무렵 삶조차도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지난 2월 8일 밤.
할머니를 뵈려고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온 큰딸, 큰아들.
내 몸에 두드러기 증세가 심하게 발현한 증상을 우연히 본 자식들은 핸드폰으로 여기저기에 문의했다. 큰아들이 급하게 운전하는 차를 타고는 밤 12시 무렵에 보령아산병원* 응급실로 가서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자정을 넘긴 뒤인 뒷날 2월 9일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서울로 급히 상경해야 했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어머니한테는 생각하지도 못한 서울이다.
아흔여섯 살인 어머니는 송파구 잠실에서 참으로 뜻깊은 시간을 새롭게 보내기 시작했기에.
6월 19일인 오늘까지 만 4개월이 살짝 넘도록 서울에서 보낸 시간들이 어머니한테는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과 오래 간직하고픈 기억으로 남을 게다.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녀 그리고 손녀사위와 손주며느리에 둘러싸여서 절을 받고는 빙그레 웃었던 어머니이며, 할머니었기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벌레처럼 손가락만 겨우 까닥거리면서도 희미하게 웃던 어머니의 서울생활도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자식들이 사는 잠실 아파트에도 들르지도 못한 채 서울아산병원에서 시골 산속에 있는 보령아산병원으로 그참 직행해야 한다.
2014. 6. 19. 목요일.
* 서울아산병원 :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
* 보령아산병원 : 충남 보령시 죽정동에 소재
* 흡인성 폐렴 : 구강(口腔) 분비물이나 위에 있는 내용물 등의 이물질이 기도로 흡인되면서 폐에 염증이 발생하는 질환
* 대상포진(급성후부신경절염, 急性後部神經節炎) :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 VZV)가 소아기(小兒期)에 수두(水痘)를 일으킨 뒤 신경 주위에 무증상으로 남아 있다가,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질 때 신경을 타고 나와 피부에 발진을 일으키면서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
추가 :
보령아산병원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2015. 2. 25. 밤 11시 15분에 먼길 떠나셨다.
섣달그믐이 생일인 어머니는 아흔일곱 살을 난 지 며칠 뒤에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을 끝냈다.
내가 알 수도 없는 그 먼 곳에서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아버지 등을 다시 만났으리라.
당신이 낳았으나 세 살 때 죽은 큰딸, 세 살 때 죽은 큰아들, 스물두 살 때 뱀 물려 죽은 쌍둥이 - 작은아들도 다시 만났으리라.
//////////////////////////
오늘은 2021. 1. 6. 수요일.
코로나-19가 무서워서 바깥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고는 아파트 방안에서만 맴을 도는 요즘..
오래 전에 쓴 일기가 있기에 오늘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기에도 올린다.
안심하면서 외출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싶다.
일년 가운데 가장 추운 때인 요즘... 한파가 밀려온다고 한다.
그래봤자이다. 더 기다리면 따스한 봄날이 올 것이기에...
'삶방'의 방장 '산애' 님의 작별 인사가 ...
왠지 마음이 아프다.
2018년 12월이던가?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삶방' 모임에서 처음 뵈었던 분인데...
왜 갑자기 떠나신다고?
뒷모습을 슬쩍 보여주셨다가는 얼마 뒤에 다시 되돌아서 오시기를 빈다.
첫댓글 아, 그러셨군요.
그래도 지극정성의 孝를 받으시고 天壽를 다하셨으니 好喪이네요.
여운이 남는 글 고맙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나중에는 그 병원의 중환자보호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2개월 넘게 했지요.
하루 면회 4차례... 의식이 전혀 없는 어머니라도 얼굴 한 번 내려다보고, 손가락조차도 까딱도 못하는데도 엄니의 손을 잡아야 했기에.
나는 집에도 가지 않고는 병원에서 살았지요. 거지 그런 상거지가 바로 나였지요.
나한테는 하나뿐인 어머니였기에..
아 예전 글이군요 전 어쩌나 환자 간호가 여간 어려운게 아닌데 했어요
어머니께선 자식을 많이 앞세웠군요
마음에 묻은 자식 잃은 슬픔에 많이 지치셨겠어요
어차피 먼저가고 나중가고 하는 죽음 이지만 남은 자의 슬픔은
하늘이나 알까 뉘라서 알까요
요즘 처럼 어서 봄이 왔으면 하고 기다려 보긴 처음 입니다
모쪼록 건강 조심하세요 ..
예.
제 어머니는 자식 셋을 순식간에 앞세웠지요.
큰누나는 얻어온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질식사. 큰형은 옴병에 걸려서 며칠 만에 죽었고, 쌍둥이동생은 뱀 물려서 22시간만에 죽었고..
폭폭한 삶을 살았던 엄니였지요.
차 멀미가 극심해서 자동차를 타는 것조차도 극도로 싫어했지요.
서울 올라와서 함께 살다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면 너는 누구 편들래?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인 나한테 말씀하시대요..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와 다툴까봐 극도로 몸을 사렸던 엄니.
엄니의 성깔은 무척이나 사납고. 논리적이었기에... 엄니 자신을 억눌렀지요.
운선 작가님
댓글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효자 아들이 아녀유.
내 누이들한테 엄청나게 미움이나 받았지요.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저는 남한테 말하지요. '늙은 부모를 모시지 말라. 자칫하면 욕이나 얻어먹는다'면서요..
왜? 정말로 힘이 들지요.
치매노인을 보살핀다는 게.. 그거.. 힘이 너무나 듭니다.
아들이 혼자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댓글 고맙습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글 읽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꼭 있는 일이라
마음 숙연해 집니다
그렇고 그렇게 살다 가는 인생
애틋한 마음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그 엄니 놓아드렸습니다.
엄니는 막내딸(다섯 번째 딸)이었기에.. 내 어머니한테도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 언니들이 있었을 터.
사후에는 그들을 다시 만나기에.. 지구에 남은 저를 생각하지 않겠지요.
영혼이 있다면 저는 엄니를 훨훨 놔드리고 싶습니다.
또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실 테니까요.
댓글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래전 삶방 처음 오실 때 쓰신 어머님에 대한 글을 기억합니다.
마지막을 함께 하실 수 있었군요.
글을 읽는 내내,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이 무척 죄스러워 무거운 마음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을테니 어머님이 그 마음 헤아려 가벼운 걸음으로 가셨을 듯 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 한 것은 아니고요.
지금도 후회하는 것이... 공직생활을 1 ~2년 일찍 접고는 어머니 곁으로 갔더라면 하는 후회가 이따금 듭니다.
치매기 진행 중인 늙은 어머니는 ... 혼자서 살았지요.
하나뿐인 아들이 사는 서울로 올라가면.. 혹시라도 며느리와 다툴까 봐서... 혼자서 산다고 하셨지요.
충분히 그럴 겁니다. 엄청나게 성정이 무섭고, 까다로운 어머니한테는 제 아내가 눈에 안 찼을 겁니다.
자식이 넷이나 딸린 저는...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지요.
고작해야 격주마다 토요일에 시골내려갔고, 시골일이 있으면 주말마다 내려갔지요.
그만큼 제가 서울의 아내와 자식한테 등한시 했다는 뜻이지요.
지나고 보니까.. 저는 받기만 했지 되갚지도 못한 불한당이네요.
올해 팔순이 되신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께 한번이라도 더 안부전화 드리고
한번이라고 더 챙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가슴뭉클한 글이였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 맞습니다.
날마다 전화하세요. 목소리를 들으면 부모님의 건강상태, 심리상태를 확인할 수 있지요.
어쩌다가 찾아뵙는 것보다는 전화로 목소리를 들려드리세요.
제가 빙그레 웃습니다.
이 덧글을 붙이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