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 *
첫눈이 내린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대소변도 남에게 맡기시는
아버지가 창가에 누워 말한다
밖에 눈 오나》
얼른 밖에 나가
눈을 함빡 맞고 들어와
어버지 보세요 밖에 눈 와요
어깨에 소복이 쌓인 함박눈
보여드린다
아버지 입가에 버지는
눈송이같이 작은 미소
아버지 눈 오니까 좋으세요
아무 말이 없다
아버지는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
그리운 아버지의 미소만
첫눈이되어 내린다
* 그리운 아버지의 손 *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을,방 안 침대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에게 창밖에 가을이 왔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얼른 아버지가 지팡이을 짚고 산책하던 아파트 뜰로 나가 단풍 든 프라타너스 잎을 몇 개 주워 아버지 손에 쥐여드렸다. "아버지, 지금 가을이에요. 이 낙엽좀 보세요." 아버지가 단풍 든 낙엽을 힘없이 손에 쥐고 말없이 웃으셨다.
낙엽 몇 장을 접시에 담아 아버지 머리맡에 놓아드리고 방을 나오면서 그날따라 왜 그리 슬폈는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걷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참 많이 걱정했었다. "아버지, 힘드시더라도 산책 많이 하세요. 나중에 못 걸으시면 어떡하시려고 이렇게 방에만 계세요?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결국 그런 날은 오고 말았다. 휠체어에 앉아 계실 때만해도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의료기구상에서 임대한 환자용 침대에 누워 긴 투병생활이 시작된 뒤로는 창밖조차 바라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창밖을 궁금해 하셨다. "밖에 비오나?" 내가 방에 들어가면 곧잘 그렇게 물으셨다. 그러면 내가 그날의 날씨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곤 했데 첫눈이 온날은 좀 달랐다.
"아버지, 지금 눈 옵니다, 첫눈입니다. 첫눈!" 나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마치 아버지와 마당에 나가 눈덩이를 굴리며 눈사람이라도 만들고 싶어하는 아이 같았다. 어릴 때 내가 만든 눈사람 뒤로 아버지가 서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한 장이 있는데, 내심 그런 사진 속 풍경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밖에 눈오나?"
약간 떨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첫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보고 싶어하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얼른 밖에 나가 일부러 눈을 잔뜩 맞고 와서 "아버지, 눈이 많이 와요. 눈 온 거 한번 보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밖에 나가 한 움큼 눈을 뭉쳐와 앙상한 아버지 손에 놓아드렸다.
"찹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아버지는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날 나는 내 어릴 때처럼 아버지와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 내리는 골목길을 걷고 싶었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낙엽도 직각으로 떨어진다'는 춘천 보충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전방지역 어디로 배치 받을지 몰라 두려움과 초조함에 떨고 있을 때, 이등병인 나를 누가 면회왔다고 했다. 나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넓은 연병장을 숨 가쁘게 달려갔다. 멀리 면회실이 있는 정문 위병소 옆에 조그마한 한 사내가 외투 깃을 올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였다. 뜻밖에 아버지가 대구에서 그 먼 춘천까지 면회를 오셨다.
"춥제?"
아버지가 외투 속에 넣어두었던 손을 꺼내 고된 훈련으로 거칠게 상한 손을 잡아주셨다. "배고프제?" 갑자기 눈물이 핑돌았다. "빵먹을래?" 면회소에서 아버지가 사주신 단팥빵을 연달아 몇 개나 급히 먹으면서도 핑 도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주무시기 전에 꼭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를 하셨다. 책상 위에 얹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기도하실 때가 많았다. 책상아래로 손을 내려놓고 하실 때도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기도하는 아버지의 손은 늘 아름다웠다. 법정스님께서 산문집 《버리고 떠나기》에서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을 기도하는 아버지의 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 낙엽을 쥐어드리던,눈뭉치를 얹어드리던 아버지의 손은 더 이상 잡을 수가 없다 오늘은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아버지의 밤마다 기도하시던 아버지의 손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오늘은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아버지의 손이 떠오른다. 아침마다 어린 내 손을 잡고 초등학고 정문 앞까지 바래다 주시던 젊은 날의 멋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아버지의 손에 맞아본 적이 없다.아버지는 나를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야단맞을 일이 수 없이 많았지만 주먹이 된 아버지의 손을 본적이 없다. 나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이제 아버지의 손을 다시 잡고 싶다. 아니, 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다. 그동안 이 손으로 나를 키우시느라고 애쓰셨다고 따스히 쓰다듬어드리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임종순간에 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려야 했는데 그만 잡아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정작 아들의 손을 잡지 못했다.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아들의 손이 되어주었고, 아들이 필요할 때마다 아들의 고단한 인생의 손이 되어주었는데 정작 아들인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임종을 보는 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삶이라는 여행을 끝내고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나신 겁니다. 즐겁고 재미있게 떠나세요, 배고프시면 가끔 짜장면도 탕수육도 잡수시고요,제가 곧 아버지 뒤를 따라갑니다. 그때 반갑게 만나요." 땅에 묻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내 손이 꼭 필요했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아 드리지 못해 늘 마음이 아프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
첫댓글 이제 삶이라는 여행을 끝내고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나신 겁니다.
즐겁고 재미있게 떠나세요,
배고프시면 가끔 짜장면도 탕수육도 잡수시고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가슴아픈 이별이며
잊혀지지 않는 거지요 ~~
정호승 님의 글 감사드립니다
새삼 죽음앞에 겸손해져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허리는 좀 괜찮으신지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