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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자(墨子)
墨子 BC 470?~BC 390?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며, 묵가(墨家)의 개조 묵적(墨翟)의 존칭이다. 또, 묵가의 주장을 모은 책도 《묵자(墨子)》라 한다.
〔사람으로서의 묵자〕 묵(墨)은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설이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묵형(墨刑;이마에 入墨을 하는 형벌)을 일컫는 말로서, 노역을 숭상한 그의 학풍이 마치 천한 일에 종사하는 형도(刑徒)나 노예와 같다고 해서 당시의 유가(儒家)와 상층귀족이 붙인 별명이다. 하층서민을 대표한 그는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여겨 자기네 학파의 호칭으로 삼았다. 신분은 당시 최하층인 공인(工人)인데 그런 관계로 성이 전해지지 않았다. 노(魯)나라에서 태어났고 송(宋)나라를 섬겼다고 한다. 경력은 거의 미상이다. 봉건적 사회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당시 각 나라는 국내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전제화, 대외적으로는 전쟁에 의한 대국화(大國化)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것에 반대했던 그는, 예로부터 군주․귀족에게 예속되어 있었던 직능씨족(職能氏族)을 길드적 공인집단으로 완성시켜 그 최고 지도자로서 겸애(兼愛;相互愛의 보편화)와 비공(非攻;反戰平和) 실현을 위해 왕후․귀족을 설득하고, 침략당하는 나라를 돕는 성곽수어(城郭守禦)와 같은 실천활동을 지도했다.
〔서책으로서의 묵자〕 《묵자》 53편은 사회변혁집단인 묵가 300년(BC 5세기 말~BC 122) 동안의 활동에서 축적된 이론과 기록의 전집(全集)이다. 제일 나중에 이루어진 것은 전한(前漢)말에 유향(劉向)이 편찬한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71편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오늘날까지 18편이 없어졌다. 53편은 다섯으로 분류된다. 제1류(類)는 친사(親士)․수신(修身)․소염(所染)․법의(法儀)․칠환(七患)․사과(辭過)․삼변(三辯)의 7편이다. 제2류는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비공․절용(節用)․절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 23편이다. 원래는 10론이 각각 상․중․하 3편씩으로 되어 있어서 모두 30편이었다. 묵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회변혁을 위한 묵가집단의 강령인데 각각 상․중․하편이 있는 까닭은 견해를 바꿀 때마다 상→ 중→ 하로 수정해서 고쳐 썼기 때문이다. 제3류는 경(經) 상편, 경 하편, 경설(經說) 상편, 경설 하편, 대취(大取), 소취(小取)의 6편이다. 이 제3류를 묵변(墨辯)이라고도 한다. 경 상편은 10론(十論) 등에서 사용되어 있는 중요한 개념의 정의집, 경 하편은 기본명제집, 경설 상․하편은 그것들의 해설이고 내용은 여러 가지인데, 논리학․자연학의 개념과 명제가 많아 묵가의 공인집단(工人集團)으로서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대취는 특히 겸애론에 관한 명제집과 그 밖의 논리학적 분석, 소취는 논리학의 원리론․방법론과 7개의 전문어의 해설 및 약간의 명제론․추리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4류는 경주(耕柱)․귀의(貴義)․공맹(公孟)․노문(魯問)․공수(公輸)와 비유(非儒) 하편의 6편이다. 경주 이하 4편은 후기에 쓰인 묵자의 설화집이고, 공수는 묵자의 구송설화(救宋說話)로 말기의 작품, 비유 하편은 유가를 욕한 문헌인데 후기에서 말기의 것이다. 제5류는 비성문(備城門)․비고림(備高臨)․비제(備梯)․비수(備水)․비돌(備突)․비혈(備穴)․비아부(備蛾傅)․영적사(迎敵祠)․기치(旗幟)․호령(號令)․잡수(雜守)의 11편이다. 성곽수어 집단으로서 묵가가 중기에서 후기에 계속해서 써 나간 병기교서(兵技巧書)이고, 그 중에는 진묵(秦墨)이 쓴 것도 있다.
〔묵가의 사상과 그 전개〕 겸애론과 비공론은 그 원형이 묵적에 의해 이미 주창되었던 듯한데, 묵가의 여러 사상의 중심은 겸애론이다. 가장 오래된 겸애 상편은 당시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겸상애(兼相愛;모두가 서로 사랑하라)>를 부르짖은 것인데, <상애(相愛;서로 사랑하라)>란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함>을 사람들이 서로 실행하는 일, 또 <겸상애(兼相愛)>란 그 <상애>를 온 천하에 확대(兼)하는 것이다. 당초 겸애란 모든 개인, 모든 가정, 모든 나라의 상호애(相互愛)를 보편화하는 것을 뜻하였다. 그것은, 유가(儒家)에 의해 강행되고 있었던 당시의 윤리가 귀천친소(貴賤親疏)를 차별하고 강자측에서 약자에게 책무(責務)를 강요하던 것과는 달리, 약자를 지지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상호애였다. 겸애론은, 항쟁을 일삼던 전국시대를 끝낼 평화 실현의 사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주체가 됨으로써 정치의 주체가 되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변혁의 사상이었다. 유가인 맹자(孟子)는, 가정이라는 가족제사회의 기초단위의 질서가 문란해짐으로 말미암아 체제가 파괴된다고 걱정하면서 겸애론을 공격했다(《孟子》 <?文公章句> 下). 겸애 중편은 겸애 상편의 <겸상애>에다 <교상리(交相利;돌아가면서 서로 이롭게 함)>를 덧붙였다. 그러나 겸애 중편은 겸애론의 내용을 만인의 보편적 상호애에서 군주의 만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상동론(尙同論)과 상현론(尙賢論)에 의한 일군만민체제(一君萬民體制;중앙집권적 전제지배)가 구상되었다. 비공 상편은 겸애 상편에서 나온 것인데, 전쟁을 크나큰 불의라고 보고 부정하였다. 그러나 비공 하편에서는 정의의 전쟁을 시인했는데, 그것은 진(秦)의 군사팽창노선에 의한 천하통일을 지지한 것이다. 절용 상편은 위정자가 사치를 삼가고 민중을 애호하는 구체적 방책을 제시한 것이며, 절용 중편은 위정자가 민중의 소비절약을 지도해야 함을 말했다. 천지 상․중․하편은, 귀신보다도 한층 초월적이고 상벌능력이 큰 하늘(天)을 동원하여 천자와 삼공(三公)․제후(諸侯)의 지배권의 정당성을 해명함으로써 주로천자(天子)에 대하여 최상위자인 하늘이 원하는 의(義=겸애론)를 실행하라고 요구하였다. 상동 상․중․하편은, 묵가의 민중운동이 봉건제도하의 사대부적인 개인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아래로부터 중앙집권적 전제를 요구한 논문이다. 상동이란 상에 동의(同意)하는 것, 즉 하위자가 상위자의 의(義;가치관)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인류가 미개한 야만적인 자연상태 속에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관이 다양했기 때문에 천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해서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이 발생했으며, 사람들을 천자의일의(一義)에 상동(尙同)시키기 위한 지배기구가 갖추어진 것이라고 했다. 상현 상․중․하편은 지배기구의 일환인 관료제를 충실해지게 하라는 주장이다. 상동한 일의를 기준으로 하여 능력 유무를 판정하고, 서민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관료로 채용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진(秦)․한(漢) 통일제국이 나타나기 바로 전, 묵가의 겸애론은 전혀 반대 관계에 있는 상현론(尙賢論)에다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임흥순
墨子의 철학사상
성 태 용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1. 墨子의 傳記와 그 책
1) 시대
史記 孟筍列傳 끝에 "墨翟은 宋의 대부인데 방어를 잘하였고 절약을 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시대에 대하여도 "혹은 孔子와 동시대라 하고, 혹은 그보다 뒤라고 한다"고 하고 있다. 盤固의 漢書에는 "묵자의 이름은 翟이고, 宋의 대부가 되었는데 공자보다 뒤의 시대에 살았다"고 하고 있다.
손이양은 묵자한고에서 묵자는 주의 定王 때에 태어나 安王 말년에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 출생지
墨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의 출생지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은 여러 설이 있다.
宋人說 ; 筍子 修身篇 楊注, 文選 長笛賦注에 인용된 抱朴子
魯人說 ; 呂覽 當染篇 高誘注
楚人說 ; 畢완. 『墨子』에 魯陽의 文君과의 문답이 많으므로 魯를 魯陽으로 보았다. 옛사람은 지명이 두 글자일 경우에 단지 한 글자를 드는 예가 있으므로 필완의 설도 이유가 있다.
3) 학설의 영향
墨子의 학설은 한 때 인심을 풍미하여 儒家와 대등한 세력을 떨쳤다. 孟子서를 보면 墨家의 학설이 매우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孟子가 墨家를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중대한 사명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墨子 公輸篇에 "臣(墨子)의 제자 禽滑.. 등 300이 ---"라고 하고 있고 韓非子 顯學篇에 "孔墨의 뒤에 儒家는 여덟으로 나뉘었고 墨家는 셋으로 나뉘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墨家學派가 당시의 諸子 가운데서 상당히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秦․漢에 이르기까지도 孔․墨을 병칭한 사실도 이를 밑받침한다.
4) 墨子의 저서
漢書 藝文志 ; 墨家라는 한 부문을 세워서 尹佚에서 墨子에 이르기까지의 六家 86篇을 들고 있다.
현존하는 것은 『墨子』53편 뿐이며 그 墨子 53편 가운데도 墨子의 손으로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듯 하다.
親士,修身,經 上下篇은 아마도 그의 자저일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편에는 흔히 墨子를 높이어 子墨子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墨子의 제자를 子禽子라 한 것을 보면 그 학파 내지 문류의 사람들이 부가한 것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備城門편 이하는 攻守에 관한 것, 기계의 제작에 관한 것을 적은 것이어서 철학 사상과는 관계가 없다. 근세의 淸儒는 더러 이들 편 가운데 있는 몇 개의 말을 서양의 光學이나 重力學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2. 墨家의 원류와 사회적 배경
1) 狩野直喜의 설
周의 諸子는 모두 그 근거하는 바가 있었으며, 墨子 만이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漢志를 보면 墨家에 墨翟보다 이전의 사람을 들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淸의 학자 孫星衍의 설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墨翟은 夏의 禮를 전한 사람일 것이라 한다.
淮南子 要略訓에 이르기를 "墨子는 儒者의 業을 배워 孔子의 術을 공부하였으나 그 禮가 번거로와 쉽지 아니하고, 장례를 후하게 하여 재물을 낭비하고 백성을 가난하게 만들며, 의복이 생활에 불편하며 일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周의 道를 버리고 夏의 政을 채용했던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 列子 楊朱篇에 墨子의 문인 禽滑厘가 楊朱의 爲我說을 평한 뒤에 "나의 말을 가지고 大禹와 墨翟에게 물어 보면 내 말이 맞다."고 했다 하는데, 長湛의 注에 "禹와 翟의 가르침은 자기를 잊고 남을 구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禹와 翟을 병칭하는 점으로 보아 양자에 무엇인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墨翟이 특히 禹를 원조로 삼을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墨子의 학설과 禹가 행한 일이 크게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墨子』에 節用篇이 있어 절검을 설하는데 禹의 미덕으로서 절검이 가장 두드려졌음은 『論語』에 보이는 孔子의 말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禹는 내가 흠을 잡아 말할 곳이 없다. 의복은 나쁜 것을 입으면서 제사 때 쓰는 관에도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였고, 사는 집은 비루하게 하면서 백성을 위한 붓도랑 일에 힘을 다하였으며, 음식은 험하게 먹으면서 귀신에게는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墨子는 乳痂의 厚葬主義에 반대하였는데 厚葬은 周의 禮요 그 이전은 대단히 간단한 것이었다. 특히 禹 때는 홍수가 있은 뒤라 厚葬 따위가 될리 없었다. 淮南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언덕에서 죽은 자는 언덕에 늪에서 죽은 자는 늪에 장사하며, 따로 棺․槨․衣․食의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삼년상을 하지 않고 석달로 마쳤다고 한다. 이는 墨家의 節葬 短喪과 동일하다. 또 墨子는 兼愛를 주장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세상을 구제함을 도덕의 요체로 보았는데, 禹도 天下를 위해 부지런히 홍수를 때 세 번이나 자기집 문앞을 지나면서도 들어 가지 않았다 한다. 그 부지런함은 墨家의 이상과 부합한다.
요컨대 儒家는 당시에 있어 가장 완비된 周의 예를 채용하였으며, 그 主義는 진보적이었다. 墨家는 이에 반하여 夏의 예를 채용하였으며, 그 주의는 보수적이었다. 다만 老莊學派와 같이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는 太古無爲의 시대로 복귀하라고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2) 馮友蘭의 설
고대에는 禮와 樂 같은 것은 순전히 귀족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일반 서민의 관점에서 볼 때 禮나 樂은 아무런 실용적 효과도 갖지 못한 사치에 지나치 않았다. 墨子와 그 제자들이 전통적 제도나 그 옹호자인 孔子 및 그 제자를 비판한 이유도 이러한 안목에서였다. 이러한 비판에 곁들여 자신 즉 무사들의 직업적 사회윤리를 잘 정리하고 이론화하여 墨家의 핵심윤리가 형성되었다.
墨子와 그 제자들이 무사 출신이라는 추론은 많은 증거가 있다. 墨家者流들은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엄격히 훈련된 조직체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墨家 조직의 지도자는 거자라고 불리웠으며 그는 집단 성원에 대한 생살권도 지니고 있었다. 墨翟은 이 집단의 초대 거자였으며, 실제로 초나라의 침입위협을 받았던 송나라를 막을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淮南子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墨子의 복역자는 180인이다. 墨子는 그들을 불 속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칼날을 밟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죽더라도 그들은 발꿈치를 돌리지 않았다"
墨子에도 9편 이상의 방어전술과 守成을 위한 기구제조법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墨家는 원래 무사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墨家는 두가지 점에서 통념적인 무사와는 달랐다. 첫째 墨家는 어떤 공격적인 전쟁도 반대하였다. 오직 방어를 위한 전쟁만을 용인하였다. 둘째 墨家는 자신들의 직업윤리를 가다듬고 거기에 합리적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墨家의 배경은 士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동시에 새로운 철학의 한 학파를 이룰 수 있었다.
3) 中國思想通史의 설
淮南子 要略에서 말한 바 墨子가 周의 道를 등지고 夏의 政을 썼다는 것은 墨子의 내용과 합치하지 않는다. 墨子는 단지 한 사람의 뒤에 나타난 鄒魯의 搢紳先生일 따름이다. 『墨子』가운데서 우리는 墨子가 흔히 詩書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밑받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옛 병에 새 술을 넣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권위 위에 정초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에 있어서 孔子와 墨子는 서로 같다. 그러나 孔子는 西周의 문화를 모두 자기 사상의 근거로 채택했다면 墨子는 일부만 자신의 사상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孔子는 詩書禮樂 모두를 취하였다면 墨子는 詩書 만을 취하고 禮樂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孔子는 내용을 앞서는 것으로 삼고 형식을 뒤로 삼았다면 墨子는 내용은 무엇보다도 앞서며 형식은 버려도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西周의 문화를 발전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墨子는 형식화된 禮와 樂에 대하여는 반대하였지만 詩書에 대하여는 힘써 그것을 선양하였으며 그가 주장하는 3표 가운데의 1표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진위를 가리는 세 표준 가운데 하나의 표준으로서 '先聖,大王의 일에 비추어 봄'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는 孔子와 마찬가지로 西周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墨子는 앞에서 말한대로 그 계승의 범위에 있어서 孔子의 유교와는 다르며 또한 계승의 방식도 다르다. 孔子이래 儒家의 계승방식은 '述而不作'이었다. 그러나 墨子는 '作而且述'을 주장한다. 그는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배송하는 듯이 전수하는 儒家의 방식을 배척하고 내용을 유지하는 한에서 시대적인 변용을 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墨子가 형식을 배격하고 내용을 중시한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墨子의 학설
1) 새로운 신분계급사회로의 지향
孔子의 당시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춘추 말기의 유신 귀족과 뒤늦게 나온 국민계급의 대립을 조화시키고, 온화한 "損益"의 역사관에 바탕하여 모순을 조화 해소시키고 고대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墨子의 당시 인류 역사를 보는 관점은 孔子와 같이 "나누어짐을 거쳐 다시 통합되는"것으로 보지 않고, "통합을 거쳐 나누어지는" 것으로 봄으로써 계급투쟁의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까닭에 墨子의 인류를 보는 관점은 실제상으로 계급이론이다. 이러한 사상은 尙賢篇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尙賢"이란 국민계급의 자격을 높이고, 국민계급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씨족귀족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王公大人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富强이다. 그런데 그러한 결과를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모두 어진이를 숭상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리지 않는데서 말미암는다. [이러한 입장은 뒤에서 보듯 骨肉의 친족을 중시하는 씨족귀족의 입장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활쏘기와 말몰이를 잘하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면 반드시 그러한 이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여 그러한 능력이 있는 이들이 많아지게 된다. --- 옛적의 성인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덕있는 이를 조정에 두고 현명한 이를 숭상하여 비록 그들이 農工의 직업에 있더라도 높은 벼슬을 주고 후한 록을 주며 일을 맡기고 명령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여기에서 묘사된 聖王은 역사적 聖王이라기 보다는 墨子에 의하여 이상화된 성왕이라고 보아야 한다] --- 그러한 까닭에 관직에 있어서 항상 변함없이 귀한 것은 없으며, 백성들이 끝내 천한 운명을 면할 수 없는 일은 없었따. [여기에 단적으로 墨子의 새로운 신분사회의 이상이 제시된다. 이는 儒家가 탈피하지 못하였던 혈연관계에 의한 신분사회, 세습의 색채를 완전히 벗어난 능력위주의 신분사회의 이상이 제시되고 있다.]
"옛적의 성왕은 매우 현명한 이를 숭상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 일을 맡겼다. 父兄에 편들지 않고 부귀에 치우치지 않으며, 용모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현자는 등용하여 부유하고 귀하게 하며 관장으로 삼고, 불초한 자는 억눌러 관직에서 쫓아내며 빈천하게 하고 노예로 삼았다---"
"지금의 王公大人들은 그들이 부유하게 되고 귀하게 하는 바가 모두 왕공대인의 골육의 친족이며, 이유가 없이 부귀하게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들이다. --- 지금 천하의 士君子들은 모두 부귀를 원하고 빈천을 싫어한다. 그러나 어떻게 부귀를 얻고 빈천을 피할 수 있는가. 말한다 : 왕공대인의 골육지친이 되거나 이유없이 부귀하게 되거나 얼굴이 아름답게 생긱는 것 만한 것이 없다. --- 이런 것들은 배워서 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
이상과 같은 분석에서 우리는 墨子의 주장을 다음의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가)과거의 씨족적인 관계로 신분의 귀천을 구별한다면 이는 까닭없이 부귀하게 되거나 면목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선천적인 것에 의하여 운명적으로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치란이 모두 한 계급의 테두리에 의해 결정되어 어떤 표준도 없게 된다. 이러한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의 관계는 가장 불합리한 관계로 획정된 것이다. 이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
나)그는 일정한 계급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구조를 타파하고 '衆賢'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치구조를 상정한다. 이는 곧 '尙賢使能'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부귀하게 하면, 뭇 사람들은 '부귀를 바라고 빈천을 싫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로운 사람을 등용하는데 빈천을 가리지 않는 선정의 아래에서는 다투어 의를 행하여 부귀를 구하려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그의 '衆賢'의 범위에는 아마도 '君子'를 배제하는 듯 하다. 예컨대 그가 예로 들은 사람들은 '園鄙郊外之臣', '國中之衆', '四鄙之萌人', '農與工肆之人' 등으로 고대사회의 자유민, 수공업자, 노예, 가노와 농민을 포함하고 있다. 墨子의 주장에 의하면, 만약 '義'라는 표준에 의하여 '氏'라는 표준을 대치하면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자격을 갖게 되며, 인간의 본성적 욕망의 발전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지위를 취득하게 되고, 자연히 군자와 소인의 구별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경쟁을 통한 자연도태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씨족귀족[君子]의 지배를 타파하게 되며 결국은 '官無常貴, 民無終賤'의 사회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라)그가 새로운 표준으로 제시한 '義'는 주관적 심리적 전제가 아니라 객관적 이익의 크고 작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는 孔子의 관점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孔子는 "백공이 가게에 머무르면서 그 일을 이루고, 군자는 학문으로써 그 도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墨子는 "천하의 모든 백공, 윤거, --- 도야, 재장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 능한 바에 종사하게 한다"하여 군자와 소인의 신분적 차이를 배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2) 論議의 표준
墨子는 모든 논란을 하든 세가지의 표준에 맞추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즉 '本之者', '遠之者', '用之者'가 그것이다. 첫째 본지자는 옛 성왕의 사실에 비추어 보는 것이요, 원지자는 백성 즉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는 것이며, 용지자는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墨子의 논증방식은 비명편에서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 가운데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함께 하고 있다. 선왕의 사실과 선왕의 책에 비추어 보는 것은 일종의 연역법이라 할 수 있으며, 백성의 경험과 이익을 문제 삼는 것은 일종의 귀납법적 방식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경험론적인 요소와 공리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3) 天論
모든 사물은 표준이 있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최고의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인가. 부모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인가? 부모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학자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인가? 학자도 또한 진실로 현명한 사람이 드물다. 따라서 하늘로 표준을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墨子가 '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로 하늘은 만물을 창조하고 천자, 제후, 백관, 유사들을 두어 정치를 관장하게 하며, 사회의 안녕과 백성의 행복을 꾀하는 존재이다. 둘째는 하늘은 위에서 감독하는 존재이니, 천자로 만민을 다스리게 하고 그를 감독한다. 천자만을 감독할 뿐 아니라 또한 만민을 감독한다. 천자가 허물이 있으면 하늘이 죄를 주며, 백성이 허물이 있으면 하늘이 벌을 준다. 만약 임금이나 어버이에게 죄를 지으면 그 죄는 피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하늘은 피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 가거나 깊은 산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굽어 살피지 않음이 없으니 달아날 곳이 없다. 셋째로 하늘은 상벌의 권능을 관장하고 있어서 선을 상주고 악을 징벌한다.
이상의 세 조목은 중국 고래로부터 백성들이 하늘에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사상이다. 墨子는 이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 하늘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논한 것일 따름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늘이 좋아하는 바는 '義'이며 하늘이 싫어하는 바는 '不義'이다. 의롭지 않으면 천하국가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며, 의로우면 하늘이 천하국가에 복을 내린다. 자신이 낳은 만물과 백성에 대하여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하늘이 사회의 안녕과 백성의 행복에 대하여 의를 상주고 불의를 벌주는 것은 자연스럽게 상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義'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이는 말할 필요 없이 墨子에 있어서는 '兼愛'와 '交利'이다. 墨子는 어느 곳에서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논한든 간에 모두 이 兼愛와 交利로 입론의 표준을 삼는다는 점에서 이는 공리주의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4) 有神論
墨子는 '天' 뿐만 아니라 또한 귀신이 있음을 주장한다. 하늘을 최고의 주재로 삼으면서 동시 귀신의 뜻[鬼志]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墨子는 有神論者이다. 그가 말하는 鬼神에는 '天神', '地祇', '人鬼'가 있다. 이러한 귀신은 하늘과 함께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는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능의 행사에 있어 공평무사하다. 그렇다면 하늘과 귀신은 어떠한 관계인가? 墨子가 비록 명백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양자를 비교해 본다면 하늘은 최고의 주재이며 귀신은 이에 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귀신은 하늘의 명을 받아서 상벌을 행하는가, 아니면 독립적인 상벌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도 墨子는 명백히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만 天과 귀신의 관계가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墨子는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앞에서 말한 삼표에 의거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옛 성왕의 일을 살펴 본다면 옛 성왕들이 귀신에 대하여 제사를 지낸 일은 수없이 많으며 그 제사를 지냄도 매우 정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옛 성왕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선왕의 책에는 귀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으며 금석문에도 남아있다. 그리고 일반인의 경험에도 귀신의 존재는 알려지며 귀신의 소리를 들었다던가 귀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전적에도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로 귀신의 존재를 천하의 정치에 적용하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만약 귀신이 없다면 비록 악한 일을 하고서도 임금이나 어버이를 피해 달아날 수만 있다면 이를 벌할 도리가 없다. 또한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회에 알려지지 않으면 이를 상줄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백성은 숨어서 악을 행하고 법을 이용하고 형을 피하며, 윗사람은 선을 권장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힘을 쓰지 않게 된다. 결과는 천하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귀신을 믿어서 섬긴다면 계신공구 하여서 천하가 잘 다스려 질 수 있다.
---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귀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5) 兼愛
墨子는 儒家의 중심사상인 인과 의를 직접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儒家의 仁의 개념이 씨족귀족의 통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인의 사상은 결국 墨子의 표현에 따르면 '別'이라는 것이며, 이에 대해 墨子는 '겸'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별'이란 西周에서 儒家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종법과 종례에 의거한 귀천 차등을 가리키며, '겸'은 그러한 귀천의 차등을 부정하고 객관적으로 국민계급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상이다.
墨子는 사회적 측면을 매우 중시하며, 사회와 인민의 안녕과 행복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그의 兼愛說이다. 여기에서 兼愛란 자신을 사랑함과 타인을 사랑함을 동등히 하고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듯이 남의 부모를 사랑하여 타인과 자신의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兼愛를 행한다면 세상에 투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은 사랑하고 타인은 사랑하지 않기에 서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아서 세상의 혼란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과 타인의 구별이 없이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兼愛라 한다. 이에 반하여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미워하며 남을 해치는 것은 별애가 된다. 兼愛하는 선비는 벗을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며, 벗의 어버이를 자신의 어버이처럼 본다. 어느 경우 굶주리고, 춥고 병들었을 때 그들을 봉양하기를 자신처럼 할 것이다. 별애하는 선비는 물론 이와 반대이다. 이렇게 상정하고 兼愛와 별애 가운데 어느 것이 합당하냐고 물어 보면 모든 사람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兼愛는 좋은 것이고 별애는 나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墨子가 말하듯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내가 남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兼愛의 정도로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어떨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儒家에서 말하는 박애는 墨子가 말하는 兼愛, 별애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고 두가지의 중간적 입장이 아닌가?
墨子의 兼愛說은 친소의 구별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儒家와 다르다. 孟子는 이를 비판하여 墨家는 어버이를 무시한다 하였다. 그러나 과연 墨子가 자신의 어버이를 경시하는 뜻을 가졌을 것인가? 그럴 리는 없다. 墨子의 생각은 남의 부모를 사랑하면 남도 또한 나의 부모를 사랑할 것이니 남의 부모를 사랑함은 곧 나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墨子의 兼愛說은 순수한 몰아적 애타가 아니라 이기적 애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兼愛의 폐단이 어버이를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런 점에서 孟子는 비판을 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핵심적인 墨家에 대한 비판은 과연 인간이 자연스럽게 남을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사랑의 감정은 가장 강한 것으로부터 타자에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의 근원이다. 그 근원과 거기에서 파생된 것을 동등하게 만들기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를 무시하 억지로 兼愛를 실천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근원을 마르게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는지? 儒家의 비판은 바로 이런 각도에서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일단 접어 두고, 墨子의 주장에 따르면 兼愛說은 앞에서 말한 삼표에 의해 논증된다는 것이다. 이를 일일이 들어 볼 필요는 없다. 이상의 서술에서 대개 그 자취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삼표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세번째의 인민의 이익이라는 표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墨子의 兼愛는 儒家의 박애 내지 차등애의 사상과도 다르지만, 기독교의 박애와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墨子의 입론의 근거가 순수한 사랑 그것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결국 이익이라는 근거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6) 非攻[非戰]
墨子는 백성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비전론을 편다. 대개 전쟁이란 다수의 인명을 살상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니 진실로 不仁不義한 일이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의 밭에 들어가 그 과실을 훔친다면 사람들이 매우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미루어 나가 말한다면, 한 사람을 죽이고 한 물건을 빼앗는다면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비난하고 불의한 일이면 그 죄는 마땅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10인을 죽이면 10중의 불의며 그 죄는 열번 죽는데 해당한다. --- 백인을 죽이면 백중의 불의이며 그 죄는 100번 죽는데 해당한다.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이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런데 전쟁은 크게 불의한 짓을 하여 죄없는 백성을 죽이고 남의 나라를 빼앗으니 그 죄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것 보다 매우 크다. 그런데 천하 사람들이 그 불의함을 모르고 도리어 기리어 의를 행한다 하니 크게 모순된 일이다. 비유컨데 어떤 사람이 조금 검은 것을 보고는 그것이 검음을 알 수 있지만 매우 검은 것을 보고는 도리어 희다고 말하며, 조금 쓴 것을 맛보고는 쓰다고 할 줄 알면서 많이 쓴 것을 맛보고는 도리어 달다고 말한다면 이는 흑백과 쓰고 닮의 구별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墨子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란 백해무익이다. 겨울에 행군하면 추위에 괴로워하고 여름에 행군하면 더위에 괴로워하며 봄에는 농사를 망치고 가을에는 추수를 망친다. 백성이 배고프고 굶주리며 추위에 떨어 죽는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화살이라든지 갑주등 많은 재화들이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거기에 낭비되는 것이 얼마인지 이루 알 수 없다. 행군 도중에 병들어 죽는 자도 있으며, 전쟁터에서 죽는 자도 있으니 진실로 참혹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이로움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나라와 진나라의 임금은 본래 사방 백리의 영토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광대한 영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전쟁하여 얻은 결과이다. 전쟁은 이와 같은 이로움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착오이다. 겨우 한 두 강국은 진실로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의 무수한 작은 나라들은 매우 심한 불이익을 입지 않는가? 비유컨대 어떤 의사가 있는데 그의 약을 먹은 이가 만 사람인데 겨우 너댓 사람이 효험을 보고 나머지 사람은 피해르 ᄅ입었다면 그 의사를 좋은 의사라고 할 것인가, 쓸모 없는 의사라고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전쟁은 매우 이롭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전쟁이라는 것이 하늘의 백성을 가지고 하늘의 성읍을 공격하여 많은 백성을 죽이니, 분명히 하늘의 뜻은 아닐 것이다. 까닭에 성인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가에 이익이 없고 백성이 재앙을 당하는 까닭에 전쟁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7) 근면과 검소
가) 節用
사람의 생활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의.식.주의 세가지이다. 그밖에 수레, 배, 등등의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행락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조건들이다. 먹지 않으면 죽고 입지 않으면 춥고 집이 없으면 비바람을 맞는다. 먹는 것은 반드시 진미가 아니라다ㅗ 몸을 길러 주면 마땅한 것이고 거처는 반드시 장려하지 않더라도 풍우를 막아주면 족한 것이며, 옷은 반드시 화려하지 않아도 추위를 막아주면 합당한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필요한 것들이 쓸데 없는 종종의 장식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쓸데 없는 장식으로 말미암아 비용을 들이고 윗사람의 사치로 말미암아 조세도 무거워져 백성을 괴롭게 한다. 반드시 사치를 엄금하고 비용을 절검하는데 힘써야 한다.
나) 節葬
다음으로 백성들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려면 반드시 장례를 간소화하여야 한다. 유교에서와 같이 厚葬하고 삼년상을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 왕공대인이 삼년상을 지내면 삼년간은 천하의 정치를 들을 수 없고, 농민은 경작을 할 수 없으며, 여자는 길쌈을 할 수 없고, 장인은 물건을 만들 수 없다. 그 결과는 공급이 부족하여 사회 일반의 불리를 초래하며, 수입이 전혀 없게 되어 매우 곤궁하게 된다. 또한 너무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은 많은 재화를 낭비하게 되니 이 또한 합당치 않다. 까닭에 관은 삼촌의 두께면 유해를 썩게 하기 충분하고 옷은 세겹이면 충분하며, 묘혈의 깊이는 밑으로 샘에 이르지 않고 위로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 된다. 사자를 장례지내고 나면 산 사람은 오랫동안 상을 입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성왕의 법이다. 이러한 墨家의 주장은 당시의 중국에 厚葬 구상의 폐해가 심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墨家의 말은 인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실리주의에만 치우친 감이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孟子의 비판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듯 하다.
다) 非樂
墨子는 철저한 실리주의의 입장에 서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음악과 미술이 무용함을 주장한다. 儒家는 예와 악을 정신수양의 요목으로 보며, 예악의 정치를 천하에 미루어 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墨子는 이러한 儒家의 입장을 심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제후들이 풍악을 크게 잡히고 밤새도록 마시는 풍조가 유행하여, 그러한 비용의 과다지출로 결국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과다히 거두어 백성을 곤고하게 만든 폐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墨子에 의하면 백성에게는 세가지 근심이 있다 ;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얻지 못함이요, 추위에 떠는 사람이 옷을 얻지 못함이요, 지친 사람이 쉬지 못함이다. 그런데 음악은 이러한 백성의 큰 근심에 대해 아무 구제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임금이 음악에 탐닉한다 하여 그것이 추위를 막을 수 있는가? 배를 채울 수 있는가? 어쩌다 내우외환이 있어 외적이 침입하고 도적이 일어나면 음악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가? 큰 종을 치고 금슬을 울리며 깃발을 들고 춤춘다 하여 천하의 혼란을 제거하고 다스림을 일으킬 수 있는가?
[출처] ● 묵자(墨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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