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내 힘으로 배우고 성공하자는 구인광고 벽보판에 겨울 비는 내리고 서울역을 서성대던 소년 하나 빗속을 뚫고 홀로 어디로 간다
서울역에 서서히 어둠은 내리는데 서울역전 우체국 앞에서 비는 내리는데 아저씨. 어디로 가시는지 신문 한 장 사보세요, 네? 신문팔이 소년의 목소리는 겨울비에 젖는다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던 순아 돌아갈 곳 없이 깊어가는 서울밤 사람들의 가슴마다 불이 켜지고 무작정 상경한 소녀는 비에 젖어 어느 남자 손에 이끌려 소리 없이 사라지는데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염천교 다리 아래 빈 기차는 지나가고 흔들리는 빈 기차의 흐린 불빛 하나 젖은 내 가슴을 흔들고 지나간다 여관방의 불빛도 비에 젖는데
* 그리운 서울역 *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듯 늘 서울역을 그리워하다. 서울에 살면서도 한동안 서울역을 가보지 못하면 문득 '서울역은 잘 있는지. 지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어떤 때는 나를 기다리다가지쳐 서울역이 멀리 목포나 부산 어디로 훌쩍 떠나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서울역은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 없이 나를 사랑하고 기다려준다. 현재 서울역 신청사는 롯데아울렛과 함께 현대식 복합 몰로 지어져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간은 높고 넓어야 하는데 지금의 서울역은 천장도 낮고 협소해 어릴 때 먼 친척집에 심부름간 듯 늘 서먹서먹하다.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역은 청동빛 돔이 우아한 예전의 서울역이다. 밤차를 타고 1967년 8월 29일 이른 아침, 서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나를 어머니처럼 꼭 껴안아준 이가 바로 서울역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역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처음 서울역에 내렸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경희대에서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교복을 입은 채 서울역에 내리긴 했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버스를 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숭례문이 보이는 전차로를 따라 걸었다. 누가 전차를 타고 청량리까지 가면된다고 해서 전찻길을 따라갔으나 전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어떻게 경희대까지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이듬해 문예장학생으로 경희대 국문과에 무시험 입학했다. 그러나 문단에 등단하지 않을 경우 1학년 한 해 동안만 장학금이 지급돼, 하는 수 없이 휴학을 거쳐 군에 입대하고 제대하고 다시 문예장학생으로 복학하는 과정을 거쳤다.
복학한 뒤에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우면 늘 서울역에 갔다. 서울역은 언제나 변함없이 고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아래에 가만히 있으면 서울역은 포근한 어머니 품속 같았다.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기차가 서울역에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언제나 큰 위안이 되었으나 기차를 타고 고향에 자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역은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으로 더욱 여겨졌다. 당시 서울역엔 농어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늘 서성거렸다. 기차가 도착하면 광장엔 갈 곳이 없이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농촌이 산업화되는 과정 속에서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이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인근 양동에 사는 늙수그레한 포주들은 서울역 광장까지 내려와 "아저씨, 놀다 가세요, 예쁜 아가씨 있어요" 하고 말을 붙이며 막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역전파출소 앞에서는 부랑자들이 끌려가기도 했고 신문팔이 소년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신문을 팔기도 했다.
역전파출소에서 북쪽 방햐으로 조금 내려가면 염천교가 있고, 그 다리 아래로 차고자가 있는 수색으로 가는 기차가 피곤한 몸으로 지친듯 지나가곤 했다. 다리를 건너면 수제화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길가엔 싸구려 구두를 파는 노점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할 일 없이 그곳을 어슬렁거릴 때가 있었다. 어슬렁거리다가 주변을 돌아보면 무작정 상경한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나처럼 염천교 다리 위르 헴매고 있었다.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갈 데 없어 헤매는 것은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 가장들은 당장 식구들의 한 끼를 해결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 쳤다.
※ 남대문 직업안내소 창밖에도 눈이 내린다, 눈보라 속을 가듯 눈보라 속을 가듯 서울역은 어디론가 저 혼자 간다. 대합실 돌기둥에 기대어 아이는 잠이 들고 애비는 혼자서 술을 마신다. 지금쯤 고향에도 눈이 내릴까 지난 가을 밤하늘에 초승달 걸렸을 때 소 몇 마리 몰고 가던 소몰이꾼은 지금도 소를 몰고 걷고 있을까
흐르면 흐르는 대로 흐르는 나는 남대문 직업안내소 창밖의 눈송이로 내리고 부녀상담소 여직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막 밤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눈사람이 되어 하늘을 쳐다본다 누가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왜 상처를 입는것일까 하늘의 눈꽃이 다시 피어 시들고 빈 지게 지고 가는 청년 한 사람 성긴 눈발 사이로 들리는 불빛소리 ※
(〈불빛소리〉 전문)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50년 대 말 전후 미국에서 보내준 옥수숫가루로 만든 빵을 학교에서 배급받았다. 긴 직사각형 옥수수 빵과 딱딱한 고체우유 덩어리를 왜 주는지도 모르고 받아먹었는데 아직도 나는 그 구수한 옥수수빵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미국인의손과 한국인의 손이 악수하는 모습이 그려진 밀가루 포대나 옥수숫가루 포대를 본 기억 또한 생생하다.
우리나라의 그런 경제적 빈곤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군사독재체제 가운데서 5년 단위로 추진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정부의 비호 아래 재벌그룹이 형성됨으로써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현상을 악화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경제성장이 이룩되고 있었지만, 민주화가 요원하면 할수록 심정적으로는 국민 전체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당시 하루 100원을 가지고 살았다. 대학생이라고 어디 일자리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부국수 한 그릇 값이 30원이었는데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돈으로 국수 두 그릇을 사 먹고 하루해를 보낼 때가 많았다.
이제 서울역은 지하철과 공항철도가 이어지는 대한민국 교통의 핵심이자 서울의 심장이다.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활기차고 발걸음이 빠르다, 하루에도 수십만명이 기차를 타고 내린다. 그러나 아직도 서울역엔 노숙자들이 떠돈다.
신청사나 옛 서울역 청사 담벼락에 기대어 소주병을 옆에 두고 잠든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더 냉혹해져 그들이 왜 그런 노숙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대합실 긴 나무의자에는 가운데에 금속 먹대로 칸을 나눠 노숙자들이 누울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화장실 세면대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게 조치해 놓았다.
온수가 나오면 노숙자들이 그 물로 세수 하고 발을 씻고 빨래까지 한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공공장소의 시설물은 노숙자들의 전유물아 아니다. 그래도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그들이 샤워라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면 어떨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숙자들을 위해 바티칸 광장에 그들만의 샤워시설을 설치한바 있다.
서울역은 늘 그리운 나의 부모님이기도 하지만 이제 노숙자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오갈데 없는 가난한 노숙자들이 서울역이라는 어머니의 품에서 그래도 따뜻함과 아눅함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
첫댓글 가난했던 70년대 우리나라의
고단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서울역 실태를
다시 한 번 때닫게 되는 글이네요
정호승 님의 글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