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중봉 조헌
동네 아이들이 낚시를 하려고 연못가에 모여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연못물을 퍼내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아이들이 힘을 합쳐 물을 퍼냈지만, 해 질 녘이 되어도 연못물은 마를 줄 몰랐다. 싫증 난 아이들은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그대로 멈추면 밤새 물이 다시 찰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제안자였던 그 아이는 아이들을 달래가며 밤새 물을 퍼내고서 다음 날 고기를 잔뜩 잡아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한 선비가 보령의 한 객사에 들었다. 마침 이상사라는 이도 그 객사를 찾았는데 빈방이 없었다. 이상사는 선비의 행색이 초라한 것을 보고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서려 했다. 이때 그 선비가 이상사를 불러 세워 두 사람이 함께 묵게 되었다. 숙소에 든 선비는 관솔불을 밝혀 책을 읽으며 이상사에게도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베껴 건네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묵는 며칠 동안 선비는 손에서 한시도 책을 떼는 법이 없었다. 이상사가 선비의 말에 실린 짐 보따리를 살펴보니 과연 책과 관솔뿐이었다.
두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이다. 조헌은 고집 세고 리더십이 강한 아이였지만, 집안 형편은 언제나 넉넉지 않았다. 임종을 맞은 아버지가 소고기를 찾았을 때도 가난 때문에 마련해 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 일은 그가 평생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한이 됐다.
그러나 조헌은 가난 속에서도 열심히 글을 읽었다. 아버지의 분부 때문이었다. 5세 때 아이들과 함께 천자문을 배울 때는 고관의 떠들썩한 행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글에만 집중했다. 이를 본 고관은 일부러 조헌의 아버지를 찾아가 아이가 훗날 큰선비가 될 재목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헌은 매일 손수 땔감을 마련해 부모님 방에 불을 때면서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 밭농사를 지을 때는 밭두렁에 막대를 걸쳐 서가를 만들고 쉴 때마다 글을 읽었다.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공부에 몰두한 조헌은 22세 때 성균관에 입학했다. 명종 20년(1565)이던 당시는 요승(妖僧) 보우를 탄핵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매일같이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그때 조헌도 다른 유생들과 함께 대궐 문 앞에 엎드려 복합(伏閤) 상소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유생들과 달리 유독 그만 온종일 바르게 앉아 자리를 뜨지 않았다. 2년 뒤 문과에 급제한 조헌은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종9품)를 거쳐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의 교수(敎授)를 지내며, 이이, 성혼, 이지함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헌은 29세 때 교서관 정자(正字·정9품)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입으로는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손으로는 부처에게 봉향하는 왕실의 관행을 용납할 수 없다며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30세 때는 교서관 저작(著作·정8품)에 임명됐는데 이때도 그는 부처에 대한 봉향을 반대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그러나 조헌의 자질을 인정한 선조는 그에게 여러 직책을 두루 맡겨 관직 경험을 쌓게 했다. 그 덕에 그는 31세 때 질정관(質正官)을 맡아 명나라에 다녀왔고, 32세 때는 교서관 박사(博士·정7품), 호조 좌랑, 예조 좌랑, 성균관 전적(정6품), 사헌부 감찰(정6품)을 거쳐 통진 현감(종6품)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통진 현감으로 재직한 지 2년 만에 조헌의 강직한 성품이 또다시 사달을 내고 말았다. 말썽을 부리던 궁노비를 장형(杖刑·곤장 형벌)으로 다스리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부평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아버지의 죽음도 유배지에서 맞아야 했다.
37세 때 유배에서 풀려난 후 조헌은 다음 해부터 공조 좌랑, 전라도사(종5품)를 거쳐 39세 때부터 보은 현감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경차관 이산보가 호서 지방의 민정을 시찰하고 그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때 이산보는 충청 우도에는 잘 다스리는 수령이 없지만 좌도에는 조헌이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조 16년(1583) 10월에는 사간원 정언 송순이 조헌을 파직하라고 주청했던 일도 있었다. 조헌이 각박하게 일을 처리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 선조는 이산보의 평가에 기초해 조헌과 같은 사람을 쉽게 얻을 수 없다며 파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 겨울에 대간에서 조헌을 파직하라는 요청이 거세지자 선조도 그를 파직시켰다. 이이가 죽은 직후 당쟁이 거세지던 시절이었다.
조헌은 스승 이이의 죽음과 자신의 파직이 한꺼번에 닥치자 옥천으로 내려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후율’이란 율곡 이이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조 19년(1586) 43세 때 다시 공주목 제독에 임명되자, 만언소를 올려 시대의 폐단을 교정할 방법을 진언하고 이이와 성혼의 충정을 변론했다.
조헌은 44세 때도 만언소를 올려 정여립의 흉포함을 논박했다. 그러나 관찰사 권징이 이를 선조에게 전달하지 않자, 다시 짧은 상소문을 지어 원래의 상소문과 함께 올렸다. 조헌은 이해 6월부터 9월까지 다섯 차례 상소를 올렸고,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옥천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 왜국이 조선을 정탐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자, 조헌은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관찰사 이성중이 상소를 전달하지 않자 조헌은 다시 상소를 지어 대궐 앞에 나아가 이전의 상소와 함께 올렸다.
이에 진노한 선조는 이 상소를 보지도 않고 태워버렸다. 다시 2년 뒤인 선조 22년(1589) 4월에도 조헌은 도끼를 들고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시정의 폐단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임금이 자신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그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결국 이 일로 조헌은 함경도 길주의 영동역에 유배됐는데 옥천에서부터 2000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때 동행했던 아우 조전과 두 명의 하인은 철령 이북에서 돌림병을 만나 모두 죽었고 큰아들 조완기도 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났지만, 조헌만은 의기와 행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조헌은 유배지에서도 상소를 올렸다.
황윤길과 김성일을 왜국에 통신사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신사를 보내면 그들의 간교한 술책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며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선조는 이 상소를 보고 “이 사람이 또다시 마천령을 넘고 싶은가 보구나”라고 했다. 다행히 그 해 10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자, 일찍이 정여립의 흉포함을 고발한 조헌의 선견지명이 인정되어 11월 4일 유배에서 풀려났다.
조헌은 선조 24년(1591) 3월에도 상소를 올려 왜국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했다. 이번에도 지부상소였다. 그러나 선조는 “상소로 귀양살이까지 한 자가 상소를 그치지 않으니 부끄러움이 없는 자”라며 조헌의 상소를 묵살했다. 결국 승정원 문 밖에서 3일 동안 기다렸지만 임금의 답변이 없자, 조헌은 주춧돌에 이마를 찍어 피를 흘리며 자신의 간절한 뜻을 드러냈다.
조헌이 이처럼 왜국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왜란 발발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선조 24년 4월에 전란의 조짐을 예견하고 평안도 관찰사 권징과 연안 부사 신각에게 호(濠)를 파고 성을 수축해 전란에 대비할 것을 권고했다.
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선조 25년(1592) 2월 28일에는 부인 신씨가 죽자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는 것)하는 격식을 따르지 않고 급하게 장례를 치렀다. “변란이 곧 일어날 것이니 시체를 길가에 버리게 될 바에야 이곳에서 장사 지내는 것이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4월 13일 왜구가 침입해 전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5월 3일 청주에서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집해 보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일에는 승병장 영규의 군대와 연합해 청주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8월 16일에는 영규와 함께 청주를 떠나 전략적 요충지 금산으로 진격했다. 18일에 금산에서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합세해 왜군을 협공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권율은 공격 날짜를 연기하자는 서한을 보냈지만 서한이 당도했을 때 조헌은 이미 금산에서 10리쯤 떨어진 곳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결국 조헌의 군대는 지원군이 없는 상황에서 단독으로 전투를 치렀고,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조헌과 휘하의 700 의사는 함께 순절했다.
토정 이지함은 일찍이 조헌을 이렇게 평가했다. “가난하기는 하나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명예나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지성에서 우러나왔다.” 조헌은 자신의 양심만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실제로 조헌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
왜군이 일제 공격해 막사 안까지 들이닥쳤을 때, 조헌은 피신하라는 부장들의 권고를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장부가 전쟁에 임해서는 죽음이 있을 뿐 구차하게 모면할 수 없다.” 조헌은 삶을 구걸하는 대신 나라를 위한 죽음을 선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진정한 소명은 개인의 안위나 영달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있다.
[출처] 의병장 중봉 조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