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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가장 미워했던 정적 백호 윤휴
우암 송시열은 당대의 최고 학자이자 노론들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본고에서는 우암과 한때 친한 벗이였다가 가장 미워하는 인물이자 정적이 된 백호 윤휴와 우암과의 관계를 정리해 보았다. 장달수
윤휴(尹鑴)는 아버지 윤효전(한강 정구 문인)이 경주부윤 재임 시 경주 관아에서 태어났다. 1675년(숙종 1년) 1월 은일(隱逸)로서 특별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되었다. 그해 3월 이조참의가 되고 4월 한성부우윤으로 특별 승진했고, 5월 윤휴는 허목을 성균관좨주로 추천했다가 허적의 반대에 부딛쳤으나, 왕이 특명을 내려 허목과 윤휴를 모두 성균관좨주에 임명하였다.
정계에 등장한 이후 호포법·상평제의 실시와 전정(田政)의 개혁 등을 꾀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1677년 행 부호군, 1678년 공조 판서(工曹判書),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 다시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80년(숙종 6년)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명성왕후 김씨가 정청에 나타나 간섭하려 들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숙종에게 왕대비(명성왕후 김씨)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였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게 됐다.
주)홍수(紅袖)의 변 : 홍수는 궁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1675년(숙종1)에 복창군 이정(李楨)과 복평군 이연(李㮒)이 궁중에 출입하면서 궁녀 상업(常業), 귀례(貴禮) 등과 관계를 맺어오다가 이 일이 드러나 귀양을 갔는데 이때 미수. 백호, 남파 홍우원등이 복창군 형제를 변호했다
윤휴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정계에서 배제되어 1680년 4월 함경북도 갑산(甲山)에 유배된 뒤, 허견의 옥사의 관련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체찰사부 설치로 병권을 장악하려는 것 역시 그의 음모로 제기되자 그는 김석주 역시 도체찰사부 설치를 찬성했음을 들어 반박하였다. 허견의 옥사와 그는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사사된 것은 숙종과 서인들의 미움 때문이었다.
형문과 죽음
1680년 4월 의금부에 갇힌 윤휴는 여러 번의 형문을 당하였다. 5월 초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졌고, 5월 20일 금부도사에 의해 사사되었다. 이때 그는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고 항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증직과 추탈
1689년(숙종 15년) 왕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신원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 복권되고, 김익훈, 이사명 등을 처벌하였으며, 윤휴는 관작을 회복시키고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왕은 특명으로 예관을 보내어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가 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년) 다시 복권되었다가 다시 추탈되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오랜 친구 우암 송시열
1635년(인조 13년) 19세 때, 당대의 석학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정치와 사물을 토론하였다. 그의 막힘없는 달변에 탄복한 송시열은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선으로 그는 송준길(宋浚吉), 허적, 윤선거(尹宣擧), 윤선도 등을 소개받았다.
송시열은 그의 가계가 북인 계열이었다가, 전향 후 서인이 되지 않고 남인을 지원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雋)그리고 이유(李)·장충함(張冲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있었으며 서인 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심지원, 윤선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등 서인 계열의 학자들과도 만나 세상과 사물을 담론하며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형제는 특히 윤휴를 각별히 여겨 그가 살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의 수려한 외모와 막힘없는 달변은 여러 선비들을 매료시킨 하나의 매력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문중과 혼인한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郡守) 이구연(李龜淵)의 딸들과 결혼하여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해 왔고, 두 집안 모두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추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휴가 또 윤선거, 허목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틀어지고, 윤휴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다.
윤휴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의견을 이설로서 받아들였다.
윤휴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과격하다고 본 송시열은 그를 설득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우암은 격분한 나머지 백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규탄했다.
송시열과 결별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을 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자신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하면서, 윤휴 역시 송시열을 죽여야 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의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어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복 설에 반대하여 3년복설을 주장하였으나 패배한 후 제2차 예송논쟁 때는 1년복을 주장하여 승리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 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관직에 나가 같은 해 대사헌이 되어 청나라를 정벌할 것과 송시열을 이배(移排)하고 서인 중진 민유중(閔維重)과 이단하(李端河)를 삭탈관작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1660년(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이 복상 문제로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윤휴에 대한 호칭
절교 이후 그는 윤휴를 가리킬 때 이름이나 성 대신 참적(讒賊) , 적휴((賊鑴 246회), 흑수(黑水 30회) 흑수대간(黑水大姦) 휴적(鑴賊 22회) 여윤(驪尹 40회), 강(江), 려(驪 말). 구(狗 개). 역적. 구동(狗洞 44). 구재(狗宰).등으로 불렀다.
송시열(宋時烈)은 윤휴(尹鑴)가 구동(狗洞)에 살았으므로 개[狗]라 칭하였고 여주(驪州)에 살았으므로 말[驪]이라고 칭하였음.
강해(江海) : 윤휴와 윤선도(尹善道)를 가리킨다. 강(江)은 여강(驪江)에 사는 윤휴를 지적한 것이고, 해(海)는 해남 윤씨(海南尹氏)이 윤선도를 가리킨 것이다.
구배(狗輩 윤휴의 여당(餘黨))
일화
송시열이 백호 윤휴를 얼마나 두고두고 미워했으면 제자(권상하)와 문답에서 “윤휴의 죄 중 무슨 일이 가장 큰가?”하고 물었는데, 제자는 모역죄라고 답하자 공부가 깊지 못하다고 꾸짖고,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문답하고 있다. 국가 모역보다 주자 모욕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평가
정적이기도 했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윤휴의 기모를 보면 좌상춘풍(左上春風)이요 그 언론을 들으면 경전에 출입하고 금고(今古)를 관천(貫穿)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귀 기울이게 하니 어찌 경도치 않으리오.” 하면서 상찬해 마지않았다.
출처 글쓴이 낙민 장달수
[출처] 우암 송시열이 가장 미워했던 정적 백호 윤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