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스테파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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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金壽煥, 음력 1922년 5월 8일/양력 1922년 6월 3일 ~ 2009년 2월 16일)은 대한민국의 가톨릭 성직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김 추기경은 살아생전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1] 또한,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2]
김수환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수환의 조부인 김보현이 가톨릭교회를 신봉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 논산군 연산에서 관군에게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다. 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김수환의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살던 고향마을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895년경 경상도 칠곡군 신나무골 교우촌과 가까운 칠곡군 장자골 옹기굴 신자촌에 정착, 서중하와 혼인한다.
김수환의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인 김영석과 만나 결혼해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3] 그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가 전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 형 김동환과 김수환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가족은 경상북도 군위군으로 이주하였고 군위 보통학교(현 군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였다.
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 아버지 김영석이 사망하였다. 어머니 서중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라며 아들들을 엄하게 키웠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생전에 회고하기를 “어머니는 자식들 교육에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해주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라고 추억하였다.[4]
그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 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하고서 스물다섯 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5] 그러나 진학과 신앙의 영향 등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그와 넷째 형 김동환은 어머니로부터 불려가 나중에 사제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그 길을 걷게 된다.[3][6] 한편 서중하는 방랑벽이 있던 그의 맏형을 만주까지 찾아가 데려왔다고 하며 김수환은 훗날 어머니의 깊은 신심과 사랑의 영향을 받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다.[3]
군위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집안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광역시에 있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초등학교로 전학하여[4] 졸업하고서,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 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계속 학업을 하였다. 1941년 4월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상지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7] 1944년 일본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당하여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다.[7]
김수환은 신학대 휴학생 시절에 형 김동환 사제가 사목하던 부산광역시 범일 성당을 방문, 성당 부설 보육원에서 일하며 가끔 사제관 잡일을 돕던 여인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8] 어느 날 그녀가 김수환에게 나를 받아줄 수 있겠느냐며 청혼하자 당시 사제 서품 전이던 김수환은 ‘나는 정말 사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일생일대의 고민하였고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 여인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었고, 그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 좋겠다.’라고 마음을 정리, 청혼을 거절하였다.[8]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상지 대학교에 복학하여 1946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성신 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하다가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김수환 사제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의 안동성당(현재 안동교구의 목성동 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천주교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상북도 김천 성당(지금의 김천 황금동 성당) 주임 겸 성의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러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5년 경상북도 김천군 성의 여자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56년까지 재직하였다.[9]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현재 가톨릭신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김수환 사제가 1년 8개월 동안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보도가 신속하고 정확해짐으로써 한국 그리스도교계 언론이 크게 발전하였다.
1966년 2월 15일, 마흔네 살의 김수환 사제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 성지 여자 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서 아무것도 없었던 마산교구에 발판을 마련했다. 1967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였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엉망이었으나 김수환 대주교는 혼란을 혁파하고 안정된 행정을 보여주었다.
1969년 3월 28일, 김수환 대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10]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베드로 다쓰오 도이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로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일곱 살로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김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미국 노트르담 대학, 일본 조치 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넷째 형 김동환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였다.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가톨릭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대중에게 가톨릭교회를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 사목 위원회를 두었고 김 추기경 재임기간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주었다.[10][11]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끝에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13][14] 또한, 1971년에 대한민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성탄 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15][16]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17] 이때 “인간 박정희가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에 대해 그는 장기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5]
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16] 또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18]
또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16]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서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19] 6월 항쟁 때는 명동 대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20]
1985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찾아 사북 탄광체험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북 일대에 광부의 부인들이 남편 출근시에 추문이 돌자 김 추기경은 광부의 부인들을 찾아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저 고생인데 부인들이 춤이나 추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호통치기도 하였다.[21]
1991년 7월,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방문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리기도 했다.[21]
75세가 되던 1997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결국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22]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청주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물려주었으나 사회 활동에 많이 참가해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23] 2000년 12월 26일부터 2001년 1월 28일까지 강원룡 목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공동위원장으로 전시회를 주관하였다.[24]
2001년 1월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1시간 20분 동안 경기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25] 2001년 2월에는 한국 정당 정치 실록 1, 2권이 출간될 무렵, 최근 정치인들이 정권욕에 빠져 제 구실을 못한다며 대한민국의 정치계를 질타했다.[26]
2002년 천주교 규정에 따라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회수당하였다.[27] 이에 김수환은 공식 업무에서 은퇴한 추기경 대신 실무를 맡을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로마 교황청에 통보하였고 이듬해 소설가 최인훈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27] 2006년 6월 22일,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진석 추기경이 나옴에 따라 김수환 추기경은 다행이라고 표현했다.[28]
2004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며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세웅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9][30] 같은 해 4월에는 '나라의 전체적 경향이 반미 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시국담화를 발표하였다가 사이버테러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네티즌으로부터 '민족의 걸림돌' 이라는 극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반박이나 변명하지 않고 그는 4월 28일 동국대 불교대학원 초청 특강에서 비판에 감사한다고 발표하였다.[31]
한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단식농성 현장을 찾아 위문했다가 다시 신부 함세웅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32][33]
문화예술 활동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바는 없으나 2004년 3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특별히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했다.[34] 또한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다룬 '마더 데레사'도 관람하기도 했다.[35]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콘클라베)에는 연령 제한 규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 후 교황 즉위 미사를 2명의 추기경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36]
그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기도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하기도 해 진보 진영에서 비판하기도 하였다.[37][38][39] 또한, 국가보안법 존치를 지지해 진보 진영으로 부터 비판을 받았지만,[40] 이는 그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가 균형을 잡은 상황에서 특정한 정치 노선에 계속 치우친다는 것은 거대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한 일일 수도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41]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가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10월 21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강정구를 비판하였다.[42] 강정구의 미군 개입 비판에 대해 김 추기경은 ‘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통일됐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래서 미군은 우리의 원수다.’라는 의미로 압축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42]
이어 강정구의 발언 중 한국 전쟁이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은 그쪽 진영의 사람들 입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 전쟁에 대해 늘 북침이었다고 말해 왔지요. 소련도 북한을 따라서 북침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이 강정구라는 사람을 통해서 처음으로 실토했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통일이 좌절되어 아쉽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이는 곧 조선인민공화국이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이 그때 무너졌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라며 비판하였다.[42]
이에 덧붙여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순교한 몇몇 사제들의 순교사를 언급하며, 현재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니라면 교회와 추기경 자신과 다른 성직자들도 없었을 것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42] 이어 김 추기경은 강 교수의 생각이 심각하다면서 강 교수의 바람처럼 되었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이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정일의 지배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 지적하며 어떻게 자유가 없는 김정일의 독재체제 아래 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느냐며 비판을 가하였다.[42]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면과 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한 것을 비판하였다.[42] 기자회견에서 장면, 노기남, 김성수을 변호하였는데 그는 일부 민간단체에서 친일파로 선정한 것에 대해 노기남 대주교는 천주교 대표로 되고, 신자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되어 본인의지와는 상관없음을 해명하고,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그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다. 만일 그 잣대로 보면 저도 학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으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라며 친일파 선정 기준을 비판하였다.[42]
노기남의 업적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교구에서는 일본 사람이 주교가 되었으나 서울은 그래도 노기남 주교님 같은 분이 계셔서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뜻 깊은 기쁨을 주었다, 한국 사람이 그 시대에 주교가 됐다는 점은 대단히 뜻 깊은 사건이고 피상적인 판단으로 어른들을 비난해선 안된다"고 평가하였다.[42]
김성수의 인물됨됨이에 대해서도 강연을 한 적이 있던 김수환 추기경은 김성수는 친일이 아니라 정말 민족독립을 위해서 엄청나게 공을 세운 분이라 칭송하고, 독립운동 하는 분들에게 자금을 댄다든지, 민족지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운영하고 중앙고와 고려대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쳤다, 민족혼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언론활동을 하고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한 것 등을 지적하였으며, "단순하게 관찰하고 친일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변호하였다.[42] 이후 그가 친일파라는 근거없는 음해성 자료가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43][44][45] 김수환 친일파설에 의한 비판이 도를 넘어서자 2009년 한국의 진보 진영의 논객 진중권은 김수환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46][47]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해명자료를 내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이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48]
2001년 1월 26일에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한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람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명경시 풍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으며[25]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그는 "사형제 폐지, 낙태반대 등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슨 돈을 벌기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참생명이다. 참생명은 현실에서만이 아니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며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42]
서울 교구장에서 물러난 지난 1998년, 김 추기경은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신자들의 편지(게시글)에 2년 여간 일일이 답하였다.[49] 또한 신자들의 글에 직접 답장을 쓰면서, 글씨 크기를 확대하여 작성하는 등 모습을 보여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을 보였다고 평가된다.[50][51]
2007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김 추기경이 그린 드로잉들이 전시되었다. 동성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동문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를 1941년에 졸업한 김수환 추기경이 그린 드로잉 14점과 그가 평소 아끼던 글을 붓으로 직접 쓴 판화 7점이 전시되었다.
김 추기경이 그린 드로잉은 종이 위에 검은색 유성파스텔을 이용해 간략하고 소박한 필치로 동그란 얼굴 안에 눈, 코, 입 등을 그린 다음 하단에 ‘바보야’라는 문구를 적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옛집, 원, 산, 기차 등의 작품이고 붓글씨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이다. 또한, 역시 동성고등학교 동문인 홍익대학교 미대 학장이 김 추기경의 모습을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 6점도 전시되었다. 김 추기경이 만든 전시작품의 판매 수익은 장학기금으로 사용되었다.[52]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강남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기력을 회복했었다.[53]
2009년 2월 16일 오후부터 급격히 호흡 곤란과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어 의료진이 응급 조치에 나섰지만, 결국 오후 6시 12분 경 강남성모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선종했다. 개신교와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 각 종파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했고,[54][55] 그를 추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56] 보도에 따르면 2월 20일 자정까지 방문한 조문객 수가 38만 7천 420여명으로,[57] 이는 1949년 백범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된 직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10일간 경교장에 조문한 100만명, 1979년 암살당한 박정희를 추모하기 위해 5일장 기간 중 광화문 앞에 모인 문상객 200만명(일부 언론에서는 집계 불가로 보도함) 다음으로 많은 기록이라고 한다.[58] 2월 21일에는 약 40여만명이 성당을 찾아 조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59]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가 5일장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선종일 다음 날인 2월 17일에서 2월 19일까지 새벽 6시부터 익일 자정까지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60] 단, 비공개로 염습이 시작되는 2월 19일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61][62] 조문기간 동안 명동 대성당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 조문객들은 명동 대성당부터 퇴계로 4가, 명동역, 명동역 골목을 잇는 무려 3킬로미터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었으며, 3~4초간의 조문을 위해 평균 3시간 3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만이나 지루해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전혀 안면이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커피나 음료수를 나눠주기도 하였다.[63] 조문 기간 동안 명동 대성당에는 이명박 대통령 및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64] 대한민국 정부 부처 관계자, 주한 외교 사절, 재계 인사, 종교계 인사, 예술인, 전현직 자치단체장 등이 조문하였다.[65]
장례 미사는 2009년 2월 20일에 명동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66] 시신은 용인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67] 당초에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2월 19일 교황을 대신하여 장례 미사 및 집전례를 집전하는 특사로 정진석 추기경을 임명하였다고 발표함으로써 교황장으로 격상되었다.[68] 추도사는 베네딕토 16세를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한승수 국무총리가 대독),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대사 등이 했다.[69] 추도 미사는 약 800여명이 참가했다.[70]
비석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한글과 라틴어로 새겨졌으며 비문(碑文)으로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시편의 구절이 새겨졌다.[71][72] 장례는 정통 가톨릭 예식과 유교 예식이 어우러져 치러졌으며,[73][74]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의식은 국가기록물로 지정, 기록되었다.[75]
2월 22일에는 대한민국 전국의 성당에서 추도 미사가 열렸다.[76][77] 서울대교구는 2009년 4월 5일까지 사순절 기간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기간으로 선포했다.[77]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에 서약하였고,[78]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79]김수환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80] 여타 공공기관 등에서의 장기기증 약속,[81] 그리고 연예인들의 장기 기증 의사 또한 이어졌다. 특히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현빈, 쥬얼리 S, 정한용, 양원경 등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기기증 운동본부 관계자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했고 실제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 수도 많이 늘었다.”라며 “특히 선종 이후 5일까진 기증 희망자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82]
또한, 그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자원 봉사와 입양 등의 봉사도 이어졌다.[83]
김 추기경의 선종 이후 가톨릭교회에 관심을 보이거나 신자가 되려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명동 대성당 안에 마련한 예비자 교리반에는 평소보다 20%가 넘는 수치인 117명이나 몰렸다. 하루 7차례 열리는 주일 미사 때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된 책이 잇따라 출간됐다. 수원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구중서 교수가 김 추기경 평전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를 집필하였다. 김 추기경의 말과 글을 시구처럼 편집한 엮은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도 발간되었다.
현재 서울대교구는 김 추기경이 한국 사회에 남긴 인사말을 사회운동으로 펼치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2009년 3월 9일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지름 9㎝ 크기의 원형 스티커를 50만 장 찍어 일반에 배포했다.
이 스티커는 빨간색을 바탕으로 김 추기경이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중앙에 새겼다. 많은 사람이 차량 유리창이나 사무실 출입문 등에 이 스티커를 붙여 김 추기경의 넋을 기렸다.[위키백과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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