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언제나 마음이 너무 아프다. 국력이 약해서일까? 아님 위정자들의 탓일까 ?
우리나라를 넘 보는 이웃나라들이 항상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나라가 일본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이라면 먼저 적대감이 앞서는 것은
그동안 당하기만 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있기 떄문이다
그중에서도 7년의 임진왜란이란 전쟁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처절하게 유린되는 통한의 역사이기도하다
그런 일본 왜구가 우리나라를 쳐 들어 올 것을 예측하고 준비하자고 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율곡과 이순신, 조헌이 있다
만약 그때 당파싸움을 하지않고 이율곡 선생님의 " 10만 양병설 " 주장을 받아들여서 대비를 했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15일만에 한양을 뺏기고
의주로 피난을 가야했던 수모를 당하지도 전 국민이 왜놈들에게 짓 밟히지도 안했을거고
조선의 치욕과 아픔의 일제 36년의 식민지도 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지나간 아픈 역사를 읽어 보면서
한 나라를 이끄는 최고 통치자의 능력에 따라서 국민들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당시 선조 왕은 왕의 몽진 ( 왕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것 )을 도우면서
왕을 믿고 모여든 백성들을 버려둔 채 도망갔고
몽진에 성공한 후에는 아예 백성들의 피난을 막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그런 왕이였다
그런 왕도 왕은 왕이었기에 백성이고 신하이고 선비였기에
선조 왕이 의주로 피난간 소식을 듣고 대성 통곡하면서
그 당시 나주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붓을 버리고 칼을 들었던 선비 한 분이 계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는데
호남에서 최초의 의병장으로 선조로부터 " 창의사 " 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호남의 대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문열공인 김천일 장군이다.
김천일 장군 ( 1537- 1593 ) 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비였던 김천일 장군은 부인 양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 왜적을 토멸하지 못한다면 비록 이 땅의 어느 곳에 간들 살 길은 없다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면 도리어 살 길이 있을 것이다 " 라고 말하면서
제봉 고경명, 월파 유팽로 와 함께 호남의 " 삼창의 " 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나주 에서 호국의 뜻을 함께한 선비들과 300 명의 의병으로 선봉장에 섰다
그당시 김천일은 태어날 때부터 약한 몸으로 항상 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 오늘 내가 칼을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 것 같다 " 며 북상길에 오른다
김천일은 북쪽으로 올라가 수원, 한강 연안 등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한양 탈환을 목표로 맹활약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고경명(광주)ㆍ박광옥(광주)ㆍ최경회(능주) 등과 함께 호남 지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고향 나주에서 조직한 의병 300명을이끌고 금성관 망화루앞에서 출정식을 연후 서울로 진군한 그는 수원 지역에서 첫 유격전을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뒀고 강화도로 이동해 왜적을 섬멸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까지 받았었다.
이후 양천과 김포ㆍ양화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사기가 충천했다가 남하하는 왜군에 의해 진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으로 급히 병력을 이동시켰던 것이다. 관군과 의병을 포함해 겨우 3,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던 김천일과 최경회, 황진 등은 왜군 10만명과 9일 동안 10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죽을 각오로 맞섰다.
그러나 죽여도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는 10만 대군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마비로 성이무너지며, 결국 성이 함락되기 시작했고 상황은 급박했다.
적에게 체포되어 욕을 보느니 자결하기로 결심한 김천일은 함께 싸우던 장남 상건의 손을 붙들고 절벽에 선 것이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아버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장부의 한 몸 던졌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건아!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구나!”
부자는 서로 껴안고 남강의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최경회도,고경명의 아들인 고종후도 진주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치열한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의 공격에 맞섰던 3,400여 병사와 7만 명의
진주성 백성들이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나주가 낳은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5현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학덕이 뛰어났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였다. 1537년 나주 흥룡동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몸이 허약하여 19세에 이르러서야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73년(선조6) 유일(遺逸:경륜을 품고
초야에 있는 인물)로 뽑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1573년 처음 관직에 진출한 뒤 강원도ㆍ경상도 도사, 담양 부사, 한성부서윤, 수원 부사 등 주요 직위를 역임했다. 그러나 1589년 수원부사 재직 시 양반 사대부 층의 전답에 세금을 부과하였다가 그들의 비방으로
벼슬을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왔다.
김천일은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다 2차 진주성싸움이 벌어질 때 고립무원의 성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수성의 주장(主將)으로 수성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진주성 싸움 참전은 군사전략적으로는 전란의 참화를 입지 않고
보존되어 국가의 근간이 되었던 식량창고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는필수적이었다.
비록 진주성은 함락되었지만 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왜군이 진주성을 나와 호남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천일은 1618년(광해10) 영의정에 추서되었고, 1627년(인조5) 문열(文烈)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745년(영조21) 부조묘의 은전이 내렸으며, 나주 정열사·진주 창열사·순창 화산서원·태인 남고서원·임실 학정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나주정열사 에서는 그가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출병했던 음력 5월 16일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그가 순국한 진주에서도 그가 순절한 음력
6월 29일에 나주·진주시민들이 함께 순의제를 지내고 있다. 2차 진주성 싸움때 순절한 그의 장자 김상건도 후에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그날을 다시 복기하면 한양은 적의 수중에 들어 가 있었고 전세는 불리했다
그해 6월 김천일 장군은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면서 진주성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해 창원을 장악하고 있는 왜군들과 싸워야 했다
김천일 장군은 그의 곁에는 항상 큰 아들인 상건이 있었고 그 아들과 함께 전투를 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과 전쟁터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
무슨 일이 있어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방식인 배수진이였던 것이다
1 만 5 천 명의 의병이 10 만 명이 넘는 왜군과 싸운다는 것은 중과부적이어서
6 월 29 일 그렇게 고대하던 구원병은 오지를 않았고 전세는 기울어져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김천일 장군은 " 나의 죽음은 이미 기병한 날 결심 한 것이니 오늘까지 온 것도 늦었다
다만 그대들은 집을 버리고 나를 따라 신고를 겪은지 2년만에
이지경에 이르었으니 그대들이 가련할 뿐이다 " 며 통한의 탄식을 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김천일 장군은 진주 남강의 촉석루로 갔다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먼저 병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 다음 곁에 있던 큰 아들 상건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 했다
아버지와 함께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난 순간이였고
김천일 장군의 14개월 동안의 의병활동이 막을 내린 아픔의 그날이였던 것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그토록 강고했고 절대절명으로 숭고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아들 상곤이 진주로 달려 와서
10 일 동안 아버지와 형님의 시신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를 못했다 한다
훌륭한 위인들을 보면 본인의 인성에 따른 생애도 있지만
그 뒤에는 말없이 내조를 해준 훌륭하고 멋진 부인들의 지혜로움이 있었기에 빛났던 것이다
김천일 장군도 훌륭한 부인을 뺴놓을 수 없으니
부창부수로 총명하면서 의롭고 지혜로운 부인 양씨를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인께서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날 줄을 알고 가족들도 모르게 몇 명의 하인들에게 할 일을 부탁하고
무주구천동 깊은 산속에 에다 여러 해 동안 준비하여 집안식구들을 대피 시킬 준비를 마련하였다
오로지 남편 김천일이 가족들 걱정하지 않고 의병활동에만 전념 할 수 있도록
부인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남편 김천일을 호연지기로 키워서 의병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기도하다
이렇게 훌륭한 가족을 기리기 위한 충신 정려가 있으니
지정명칭 : 정렬사비
지정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48호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646-1
정렬사비는 임진왜란 중 전라도 의병 활동에 앞장선
창의사 문열공 김천일 장군의 의병활동을 자세히 기록 한 것으로
1626년 ( 인조 4 ) 정렬사에 세웠다
임진왜란 초기의 의병활동과 국내 전투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 받는다
김천일 장군의 부조묘는 원래 나주에 있었다가 지금은 강진읍 영파리 팔영마을로 옮겼다
매년 6월 29일 후손들이 모여 장군과 큰 아들 상건의 넋을 기리고 있다
남편, 부인 , 자식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한 몸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김천일 장군의 가족사를 읽어 보면서
나라를 지키는 큰 강물은 높은 사람들이 아닌 풀뿌리의 민초들이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면서도 자식을 가진 부모로써 마음이 넘 아팠다
아들을 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김천일 장군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