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두분의 언니가 계신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니들과는 달리 마음놓고 하대할수 있는 언니들이 아니다,
내 나이 마흔 아홉인데 큰 언니 예순 여덟, 작은 언니 예순 다섯이다.
큰언니와 나는 열 아홉살 차이나는 자매다.
언니라기보다는 어머니뻘이다.
실제로 내 친구 명자 어머니랑 큰언니는 친구 사이였으니까.
두언니는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다복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는 자식들, 이남일녀의 자식들을 약속이나 한것처럼
두었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큰언니는 조신한 품성 그대로 평생을 교육자의 아내로 살았다.
소위말하는 일류대학을 나와서 열쇠꾸러미를 든 여자들이 선택한다는
직업을 가진 큰 아들, 유학을 마치고 대학의 강단에 서는 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자의 길을 가는 막내아들...
여자의 삶을 이야기할때 큰언니와 같은 삶은 분명 성공적인 것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작은언니, 적극적이고 악착스럽고 명석한 두뇌와 누구도 꺽을수 없는
고집과 아집을 지닌 쓰러지지 않는 들풀같은 여인이다.
부자소리를 들을만큼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국민학교때 부터
학생들을 상대로 껌을 팔았다는 얘기는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고..
고등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아버지께 공부는 국민학교로 충분하다며
언니 자신의 고집과는 댈수도 없는 아버지의 고집을 꺽은 얘기도 내 겐 전설적인 얘기일 뿐이다.
내가 대여섯 코흘리개때 일어난 작은 언니의 결혼얘기는 내가 커서야
듣게된 또 하나의 전설이다.
그당시 큰형부는 우리 고향학교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형부를 만나러 내 고향을 오가던 형부의 절친한 친구는 작은 언니에게 청혼을 해왔다.
형부의 친구는 서울 어느 대기업의 전무님이었지만 작은 언니는 섬 가시나가 전무님의 사모님이 되기엔 격이 맞지 않는다,송충이 솔잎 먹겠다며 콧대높게 청혼을 거절했다.
아무리 볕에 그을려도 타지않는 하얀피부와 갸름한 얼굴의 미인이었던 언니를 포기하지 못한 전무님은 서울과 섬을 오가며 짝사랑의 아픔에 눈물짓고 언니의 마음은 돌아설줄 몰랐다고 한다.
몇년후 전무님은 아픈 가슴을 달래며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고 그로써
작은 언니는 신데렐라가 될 기회도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될수있었던
행운도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언니가 선택한 사람은 이발가위 하나들고 고향으로 들어온 어떤 남자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맏이였다.
없는 집안에 들어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집안을 번듯하게 일으키겠다는
언니의 결심이었다.
결혼식날 아버지는 그런딸을 용서할수 없어서 집을 나가고 혼주도 예단도 없는 결혼식을 마치고 언니는 그사람의 집으로 가마를타고 배를타고 떠났다.
그후 작은 언니네는 우여골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는데
언니의 억척스런 삶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 형부의 이발관은 허리받침도 없는 동그란 나무의자 한개가 놓여진 동네 앞 공터였다.
그곳은 어장을 가진 동네 사람들이 그물을 끌어올려 말리기도 하고 수선도 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대구 어장과 멸치어장등
여러틀의 어장을 운영 하시던 아버지가 선원들을 지휘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머무시는 곳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신 명민한 분이셨는데
오척단구, 작은 체구와 더불어 단정한 외모엔 범치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탁윌한 리더쉽과 해박한 지식, 부정과 타협하지못하는 강직한 성품,
무성한 눈썹으로 인한 아버지의 별호는, 도사영감, 대쪽영감, 욕쟁이,호랭이등등
모두가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실상 아버지는 어머니나 우리들에게 더없이 자상하고 좋은 분이셨다.
오가며 만나는 동네 아이들의 누런코를 맨손으로 닦아주시고
보는 아이들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실때까지 작은 사위를 미워 하셨지만
작은 언니네의 신체가 온전하지 못했던 아이,외손주를 데려다 손수 밥을 먹이고 뒤를 가려내며, 걷지 못하는 그아이를 업고 다니시며 거둘만큼 정이 많은 분이셨다.
한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자신감을 갖고 계시던 아버지의 눈에 비친
작은 형부의 초라한 모습은 밉고 밉다 못해 증오심까지 들게하는
존재가 되어 아버지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토록 좋은 혼처를 걷어찬 작은 딸에 대한, 미움을 넘어 증오심까지 겹처져 형부에 대한 미움을 걷어 내시질 못하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동네와 인근 두어 마을의 주민들이 형부의 고객이었는데
형부의 벌이는 두식구 입에 풀칠도 되지 않았다.
이발료를 현금으로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추석대목에 줄께, 설대목에 줄께, 하는식이었으니까..
언니는 어장에서 잡아온 생선을 받아 삼십리가 넘는 읍에 나가 팔고
달밤이면 산허리 밋밋한 곳을 쪼아 개간을 했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굶지 않고 살아가는 생활은 형부에게 지독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주었고
자신은 무능한데 반해 억척스럽고 부지런하고 수완좋은 아내와
자신을 죽어라 미워하는 장인과 처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
급기야 언니를 그 옹졸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의 표출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동네 가구수의 삼분의 일이 처가붙이인 곳에서
형부는 사흘거리 언니를 때리고 처가식구들을 공공연히 위협했다.
모두 죽이겠노라...
백살이 가까운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언니는 상여를 따르지못하고
멍든 얼굴로 소복을 입고 자신의 집 모퉁이에 숨어서 울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언니의 손발톱이 빠지는 노력으로 초가 삼간을 갖게 되었고
초가삼간은 수퍼와 횟집과 여숙을 겸하는 커다란 이층 건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것을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게 마련이었다.
누구는 마누라 잘얻어서... 마누라 덕택에... 이발해서 밥이나 묵겄나
다 마누라 잘얻어서...
은근한 시새움과 선망과 감탄의 말들 한마디 한마디는, 열등감이 얹혀진
형부의 매질로 언니의 몸에 떨어졌다.
정녕 언니가 원했던 것이란 멍자욱과 속골병이 서리서리 서린 저 성공이었을까?
영화로운 대기업 전무 사모님의 자리와 바꾼 피눈물 어린 자수성가였을까?
작은 언니의 억척과 극성스러움은 세아이들의 교육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전교생 백여명도 채 안되는 학교에선 경쟁력을 가질수 없다는 언니의 판단으로
아이들은 큰언니네가 있는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보내졌다.
아무리 사람들로 붐비는 관광지 장사라지만 여름 한철, 유람선이 뜨는
20여일 정도의 수입으로 세아이의 교육비와 그외의 비용들은 언니의
허리를 더욱더 휘어들게 했다.
말린고기를 싸고 젓갈을 담그고 반찬통이 든 보따리를 이고....
어찌 언니의 삶은 그렇게도 고단해야만 했을까?
그나마 바닷가에 인접해있어 몫이 좋다던 언니의 집은
유람선 선착장으로 쓰기위해 바다를 매립하는 바람에 바다와는 20여미터가 넘게
멀어지게 되었고 매립지에는 새로운 횟집들이 생겨나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몇년을 고전하던 언니는 횟집의 문을 닫고 선착장옆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조그만 매점을 세를 들게 되었다.
입지가 좋다는 조건으로 놀랄만한 금액의 전세금을 언니는 여러곳에서
빚을 내야했다.
이자를 내고 두 양주 밥먹고 살면 된다며...
그새 세아이들은 결혼을해서 모두들 부모가 되었다.
평생을 싸우며 살았던 부모를 봐온탓인지 원앙새처럼 행복하게들 살고있다.
지금도 원수처럼 살고있는 언니부부는 전생에 정말 원수였을까?
매점을 시작하며 언니 내외는 여느때보다 더많이 싸우게 되었는데
각방을 쓰고 각자 밥먹는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여닫이 금고가 놓여진 매점의 카운터를 서로 차지 하겠다는게 싸움의 발단이었다.
저...저..문딩이 같은 인간이 늙어감서 돈욕심을 내는가...
이년... 내가 니년을 꼬장꼬장 말려서 직일끼다...
아들도 며느리도 형제도 그누구의 중재도 소용없었고 법 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원리대로 금고가 놓여진 카운터는 형부의승리로 돌아갔다.
매사에 덤벙거리고 깔끔한곳이 없는 형부에게 장사를 맏기는 것은 삼척동자에게 장사를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펄펄뛰는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는 하냐고.
어떤땐 셈이 정확하지 않아서 손해 보는때도 있고, 금고를 열어놓은채로 매점뒤 바닷가에서 낚시에 열중하기도 하고, 손님이 둘만 와도 허둥대고....저 인간 하는 일이 내 반눈에나 차겄나.....그래도 죽을둥살둥 모르고 열심히는한다, 저 문딩이가.
그랬다.
비록 유치하게 싸워서 얻은 자리이긴 했지만 형부는 비로소 자신이 할수있는 일을 찿았다고 생각한것이다.
이발소를 그만둔것은 이미 옛날 고리적 얘기였고
평생을 억척스런 마누라, 자수성가한 훌륭한 마누라,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빛나는 마누라의 그늘에서 마누라의 보조 역활을하며
몸을 움츠리고 숨죽여 살며
얼마나 형부는 자신의 일을 갖고 싶었던것일까?
그렇게 열심이면 그대로 두라고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안그래도 그리한다, 당최 돈통앞에서 떨어지질 않는다,저 문딩이가...
사년여를 그래도 지지고 볶으며 매점을 운영하던 언니네는 임대 계약이 끝나는 내년부터는 뭘해먹고 살거냐며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올해는 유난히도 비오는날이 많아서 장사도 공쳤다는데...
지난 가을 태풍 매미가 지나가고 닷새가 넘도록 전화도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암흑의 섬에서 언니는 얼마나 울었을까?
닷새가 지나고 언니에게 전화를 했을때 언니는 울고 있었다.
냉장고 여섯대...
자판기 두대.... 궂은 날씨로 장사를 못해 천정까지 쌓여있던 물건들
다 떠내려 갔다...아까바서 우짜꼬.......
매립지 상점 모두를 휩쓸고 물이 빠졌을때 십여미터 떨어진 남의집
주방에 걸려있던 냉장고 속에서 생수 몇병을 찿아냈다며 언니는 흐느꼈다.
문딩이것은 인사가 윗집으로 물건좀 옮기자캐도 갠찮타카며 고집을 부리더니...
으흐흐흐흐.....
언니여...언니여...
* 태풍이 지나가고 열흘쯤 뒤 우리 내외가 고향을 찿았을때
예순 다섯 나이의 내 작은 언니는 서서히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래처에 연락해 장비를 지원받고 외상으로 물건도 들여 놓고.
며칠전에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매점 임대를 결정하는 공개 입찰에서 다시 삼년 계약을 따냈다며
너무도 밝고 환한 목소리로.
비바람에 쓸려 차가운 흙더미에 짓이겨 졌다가 한줄기 햇빛 받고 서서히
고개드는 들풀처럼...
영원을 산다는 불사조처럼...
첫댓글 태풍이 온답니다. 님들 가정에 피해가 없기를 빕니다. 영도 아짐이 요즘 바쁜일이 있어 자주 들리지를 못합니다^^* 아무일도 못해놓고 가지만 간간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철향님. 영애님. 잠순이님. 목우님. 요수님. ..수고 많이 해주십시오. ^^*
내일 찬찬히 보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자정이 넘어....술한잔에 눈꺼풀이 천근입니다^^ 늘 행복하게 살아가시리라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쉽고 편한길만 갈려고 하는 데, 연희님의 들풀같은 작은 언니.... 꼭 밝고 환하게,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 가실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많은 비가 내려서 태풍피해가 적지 않은것 같은데, 부디 피해 없으시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교회도 잘 다니지 않고 믿음도 없지만 이 글을 참 좋아한답니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지요 언니가 들풀처럼 일어나셨으니 좋은 결과 있으실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