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 시와소금』 2018년 신인상 (시)-조태명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거미 외 4편
조태명
검은 숲이 바람으로 샤워를 하면
거미는 거문고 줄을 조인다
현에 달린 이슬방울 튕겨내고
어제의 흔적을 지우며 오늘의 악보를 펼친다
촉촉한 바람을 구워낸 진액
심장에 발라 죽음보다 아픈 향기를 만든다
하늘로 통하는 길목에 허브 카페 열어
찾는 이와 죽고 사는 밀당을 한다
향에 취한 이가 그물에서 옷을 벗는다
거미는 슬픈 몸짓으로 줄을 타고
목덜미에 달콤한 작별의 키스를 하면
심장이 녹아내리는 짧은 사랑이 진다
한올 한올 지은 집에 빨간 새끼들 소란스럽다
식욕을 자극하는 줄의 파장 치명적 침샘 깨워
어미 몸을 녹여 서서히 삼킨다
몸집 키운 새끼들 바람줄 타고 숲으로 사라진다
하늘이 갈대로 숲길을 쓸고 가면
검은 산이 들판에 자리 펴고 앉는데
거미의 촉촉한 연주는
거문고자리 별 속에 이슬방울로 스민다
좌판
아파트 꼭대기 피뢰침에 빨간 꽃망울 달리면
저수지의 터줏대감 기지개 펴고 간판 등을 단다
남루한 차림에 각질 뜯어낸 무릎 드러내 놓고
중고 부품으로나 치부되는 녹슨 몸을 팔겠다고
한때는
다꼬르디 윈드재킷과 포메라 타이즈로 한껏 멋 부리고
구릿빛 종아리 알통 뽐내며 둘레길을 주름잡았다
탐방객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라이더
못에 찔린 발목 상처가 도져 이젠 옴짝달싹 못한다
눈은 초점을 잃어버려 제대로 가격표를 볼 수 없고
발성 장애가 생겨 사 달라는 목소리마저 낼 수 없다
종아리 알통에서 바람이 새어 나가고
지팡이에 의존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윈드재킷 타이즈가 병들고 늙어서 실바람에도 기침을 하고
저수지 물안개가 탐방객 그림자 지우고 둘레길 가로등이 저만치로 물러나면
좌판 정리 도와줄 살붙이 기다린다
밤마실 나온 고양이가 기웃거리다 숲으로 사라지고
구청 노점상 단속 방송에 부랴부랴 좌판 걷으려 하는데
폐자전거 수거차량이 먼저 좌판을 덮친다
모자란 사내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 10층
천둥 번개가 비를 몰아 거친 문장을 흔드는 시간
분리수거장을 서성이던 사내의 등에
몰래 업혀 입주했다
집에는 잘 구분되지 않는
사내와 사내, 비슷한 사내가 있지만
내게 친절한 사내는 없다
비슷한 사내는 나를 원수 취급하며
사내를 꼬드겨 테러를 가하게 하지만
날렵한 내겐 상대가 안된다
그러나 난 늘 쫒기는 살림을 이어간다
생활공간을 확장할 수 없는 아파트에선 배가 고프다
밥상엔 얼씬도 못하게 하고
남은 음식 밀봉하여 잠가버린다
내게 유일한 식량은 사내가 뱉어 낸 포도껍질
사내는 종일 방안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의자에 포획된 채
이따금 멍하니 밖을 응시하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원 투 훅 날리고
책상에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표한다
지우개를 흔들 때는 미친 듯이 포도를 흡입하고
나는 이때를 이용하여 만찬을 즐긴다
지워진 부분이 채워질 때까지는 안전하다
사내는 머리를 쥐어뜯다 배춧국 뚜껑을 연다
허기를 달래줄 구호품
나는 먼저 먹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가다 풍덩 빠지고
날렵하게 배춧잎으로 위장을 한다
“건더기는 없고 맨 국물뿐이야”라며 국자로 떠 올린다
나는 배춧잎과 함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든다
사내가 먹은 포도 알갱이는 마침표로 흩어져 떠돌고
아날로그 방식의 테이프처럼 축 늘어진 문장들
숨바꼭질하자며 사내 등짝 쪽으로 숨으면
아파트가 머리 싸맨 사내를 가둬 놓고 침묵의 밤 지샌다
바다의 축제
너울바람, 하늘에 장미구름 그리면
하얀 수국 노을을 삼켜 국도國島를 붉게 물들인다
갈매기에 떠밀려온 목선이 집어등 밝혀 무대 꾸미고
축제를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면
흥에 겨운 파도가 어깨를 들썩이며 하얀 이를 드러낸다
갯바위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만들던 멸치연인
자색 드레스로 치장하고 맞선보던 곤쟁이 처녀
모래펄 이불 덮고 낮잠 즐기던 깍두기 꽃게가
전망 좋은 자리 차지하려 매표소 앞줄로 뛰어가고
리허설 마친 갈치가 출연자 대기실로 들어온다
오늘의 이벤트 공연은 관객과 함께하는 서바이벌 게임
좀비로 분장한 갈치가 꼿꼿이 몸을 세워 흐느적거리면
파랗게 질린 관객들이 포말처럼 숨어버린다
꼬리 그림자를 들켜버린 관객이 먹잇감
악어처럼 입을 쩍 벌리고 순식간에 물어 삼키면 게임 종료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꽁치와의 공중 곡예
꽁치는 와이어 줄에 제 몸을 분리하여 묶고
공중에 매달려 승부를 겨루자 한다
갈치는 무엇이든 씹고 자를 수 있는 이빨이 있어
줄과 함께 삼키면 게임 종료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한입에 꽁치를 삼키려는데 아가미가 뜨끔거린다
줄은 이빨 사이에 거머리처럼 눌어붙어 비벼도 끊을 수 없다
깊게 파고드는 미늘이 흑진주 눈동자를 빨갛게 물들이고
갈치의 울음이 너울을 넘지만 구조대는 듣지 못한다
목장갑의 우악스런 손이 내려와 목을 꺾어 울음을 잠재운다
게임에 져서 죽었으니 사망 이유 적으라고 문자가 온다
갈치는 목이 꺾였을 뿐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댓글을 단다
명부에서 사망 시간을 지금이라 적어 놓으며
바다의 축제 1부가 종료되었다는 자막과 함께 2부를 예고한다
백수
연호하는 소리에 놀라 깊은 밤이 깨었어
대종상 수상자 된 거야
스포트라이트 꽃들에 둘러싸여
양들이 풀을 뜯고 석양으로 넘어가는 짬
환호는 뺨에 쳐진 그물로 빠져나가고
손이 저려왔어
‘주인공 될 거야’라는 돌팔이 점쟁이
깎아서 만 원에 산 천기누설은
얻어맞고 나뒹굴고 죽어야 하는
대사 없는 투명인간 엑스트라였어
각본에 끌려가고 쫓겨간 팔자주름 깊이만큼
잘 살 건지, 잘 사는 건지, 잘 살 수 있는 건지
건더기 없는 맹탕
잘! 잘! 잘! 흘려
심장에 지른 불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
끄려 하면 더욱 번져
코피 쏟는 말단의 단역이라도
시 당선소감
새로운 발견을 위해 매진할 터 / 조태명
2014년 봄, 이원오 시인이 내게 왔다. 문학지를 육추(育雛) 하듯 내게 물어다 주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이원오 시인의 손에 끌려 용인문학회 시 창작반 김윤배 교수님과 안영선 회장을 포함한 문우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축복이었으며 내게 행운이었다.
문학의 문외한인데, 시간 없고 바빠 죽겠는데……. 수업이 있는 목요일은 말갈기 휘날리듯 달려왔고 시 쓰기는 고통 속의 행복이었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감성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로 여행을 하였다. 비망록이었다. 수해로 지금은 알 수 없는 오지에 수장되어 있을지 모르는 비망록 첫 장에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 인두로 머릿속을 지졌다.
삶은 나를 속이지 않았지만 나는 삶을 속였다. 슬퍼했고, 노했고, 우울해했다. 마음은 늘 오늘에 살며 괴로워하고 괴롭히며 지나갔다. 미래는 항상 불안하고 미지였다. 나는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슬픈 현재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문재 시인은 “단순하게 말하자. 발견이 없는 시, 생명력 없다. 발견이 없는 시, 그것은 사산이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시, 아예 죽어서 나오는 시”라 하였다. 발견이 없으면 시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시인은 신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것처럼, 이 세상 만물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독자를 언어의 세계로 초대하는 호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무겁게 다가온다. 두렵다. 이제 두려운 발걸음 조심조심 떼어본다.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시와소금》과 부족한 작품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조태명
서울 출생
강원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 및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졸업(행정학 박사)
현재 용인문학회 회원
전자주소 : ctm2003@hanmail.net
❙시 심사평
시는 언어예술이다. 음악은 소리의 고저장단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고, 미술은 선이나 색깔을 이용해 미를 축조한다. 그런데 시는 언어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예술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소리라는 형식과 의미라는 내용의 미적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숙명이 시인의 어깨에 걸려 있다, 할 것이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들은 시적 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나고 함축적이었다. 시어가 평범하고 익숙한 듯하지만, 시를 읽고 나면 미이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시적 감각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작품 수준이 고른 편이나 응모한 작품들의 소재의 폭이 좁고 신선함이 부족한 점이 무척 아쉬웠다.
먼저 시 부문 최종 심사대상으로 여섯 명의 60편이 최종심사대상으로 남았다. 그 작품들은 「시원하다」 외 9편, 「고철 냉장고」 외 9편, 「새벽 갈매기」 외 9편, 「그날의 신발들」 외 9편, 「거미」 외 9편이었다.
이들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위원 6명이 무기명 비밀투표로 작품을 평가한 결과, 조태명의 「거미」 외 9편, 김효정의 「고철 냉장고」 외 9편을 쓴 두 사람을 최종 신인상 당선자로 선하였다. 심사위원들의 작품평을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태명의 「거미」 외 9편은 의미예술로의 시는 결국 인간탐구 작업이요, 인생 창조의 일임을 보여 준다. 조태명 씨의 경우 그 ‘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와 두께가 충분한 이력을 쌓아왔다고 느껴졌다. 언어의 감각적 표현 능력은 의미의 향기를 자아내는 형식적 기능이다. 사실 시는 이러한 기능이 알파요 오메가다. 추천작들을 보면 이러한 언어 구사 능력이 촘촘히 배어 있어 읽는 이의 눈과 귀를 즐겁게 자극한다. 아마도 이러한 미적 감각은 사진작가로서의 경험에 크게 빚지고 있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진은 시각예술이고 시도 이미지가 중요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시는 ‘이미지’라는 피부로 독자의 눈을 끌어들이는 언어텍스트가 아닌가. 예술의 길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지속적인 창조적 노력일 것이다. 그가 펼쳐 낼 시 세계가 아름다운 언어그림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효정의 「고철 냉장고」 외 9편은 구체적인 진술을 통하여 시적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시가 담아내야 할 의미를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하게 해주었다. 다만 시선의 깊이를 더해 가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으나 차분한 언어로 현실을 담아내고 있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일상의 삶에서 얻은 모티프를 객관적 상관물로 형상화하는 묘사 능력이 좋다. 체험적 이야기를 모티프로 인간 존재를 천착하는 역동적 상상력이 좋다. 그만큼 감각적 묘사의 신선함이 눈길을 끈다. 시인만의 독특한 은유와 상징으로 효과적으로 전달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시적 감각과 문장력이 활달했다. 언어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보편화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한 편의 시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이거나 실재적인 언어 형태나 행동으로 표현하거나 실현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방법은 대상을 새롭게 보고 그 대상에 사상을 입혀 활력을 불어넣는 고된 작업이다.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하고 위대한 것으로 부활시켜 놓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법이 아니다.
본지 신인상에 응모한 모든 분께 감사함을 전하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은 멀지 않은 날 문단에 그 이름이 올라올 것이라 확신한다. 신인상에 당선된 두 분은 이제 겨우 문패를 단 만큼 더욱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 강영환 구재기 서범석 이화주 임동윤(정리)
첫댓글 용인문학의 자랑 시창작반이 또한분의 신진작가를 탄생시켰군요! 조태명 시인님 축하드립니다.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