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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치료실** 스크랩 장애 그리고 관점바꾸기 - 이승만과 에릭슨의 이야기
ⓢ주님의사랑ⓢ 추천 0 조회 7 08.12.04 20: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승만,

그 이름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의 이름이지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26세의 청각장애 청년, 프로골프선수다.

이 선수는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거의 들을 수 없는 2급 장애인이다.

상대의 입술 움직임을 보면서 간단한 말로 의사소통을 할 뿐이다. 
 

  그에게 아버지 이강근(56)씨는 골프클럽을 안겨줬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의 직업으로 골프선수가 가장 좋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골프클럽은 그의 가장 친한 벗이었다. 아버지 이씨는 "승만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루에 2000개씩 공을 때렸다.

고사리손으로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손에서 피가 나고 손금이 안보일 정도로 연습벌레였다"고 기억했다. 

  어린 시절의 피나는 훈련은 그의 체형도 바꿔버렸다.

손이 일반인에 비해 훨씬 커졌고 왼팔이 오른팔보다 3㎝ 정도 길다.

그냥 서있을 때도 어드레스 자세처럼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보다 조금 높다. 

  이 선수는 주니어 시절 16승을 기록했다.

97년엔 꿈나무로 선정돼 미셸 위를 가르치는 데이비드 레드베터 골프스쿨에서 연수도 받았고 주니어 국가대표도 했다.

18세 때인 99년 미국 PGA 투어 진출을 위해 미국에 갔다. 쉽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 벌어지는 투어 참가 자격 예선을 위해 모텔을 전전해야 하는 고생길이 시작됐다.


  그러다 최경주(36)를 만나 의형제가 됐다.

최경주는 2004년 이승만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시안 투어를 거쳐 PGA 투어로 진출하라는 조언도 해줬다.

이 선수는 현재 아시안 투어에서 뛰고 있다. 

  이 선수가 최경주의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영어 회화가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던 최 선수는 "의사소통이 나보다 훨씬 어려운 승만의 의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최경주가 PGA 투어에서 3승을 거두는 대선수로 성장한 것에는 이 선수의 소리없는 조언이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들리지 않는 것은 조금 불편할 뿐이어서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

소리가 안 들리니 골프칠 때 집중이 더 잘되는 면도 있다"며 활짝 웃는다. 

최경주 선수는 "승만이 실력이 무르익고 있어 미국 PGA투어에서 나와 경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이승만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문득 밀턴 에릭슨을 떠올리게 된다.

밀턴 에릭슨(1901~1980)은 정신과 의사로서 당대 세계최고의 최면치료사요 전문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최면과 대비되는 에릭슨최면이라는 새로운 최면의 역사를 쓴 사람이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최면이 미국 의학계에서 공식 인정받은 것이 1958년이다.

그리고 의학회의 공인에 힘입어 미국 심리학 분야에서도 1960년에 최면을 공식 인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면은 세계 최초로 최면학회를 설립하였고 작고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이나 초대편집장으로 일을 하였다.  

  에릭슨 최면은 1970년대 초에 NLP의 공동 창사자인 리차드 밴들러와 존 그린더에게로 전수되어

NLP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NLP가 종합학문으로서 자리를 잡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에릭슨의 최면에 대한 공헌을 뛰어넘을 사람은 현 시대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위에 소개한 이승만과 같은 심한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에릭슨은 17세때 중증소아마비에 걸렸다.

가슴에는 인공폐를 부착하였고 그래서 늘 호흡하는데 장애를 겪었다.

그는 색맹이었으며 청력도 약했다.

그리고 51세때도 2차로 소아마비에 걸려서 고통을 겪었으며 죽기 전에는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몸이 마비되고 심한 통증의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환자 상담을 하고 원고를 썼다. 

  17세때 처음으로 소아마비에 걸렸을 때 그는 1년여를 침대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온 몸이 마비되고 고통받는 어려움 속에서 손과 팔, 다리와 발을 움직일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가족이나 방문한 친인척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입모양과 얼굴표정을 살폈다.

말의 내용 못지 않게 어떤 말을 할 때 드러나는 외적인 특성, 즉 비언어적인 측면을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피나는 노력끝에 청력이 약해서 피아노 치는 손을 보고 곡을 알아맞출 정도의 예리한 관찰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늘 고통가운데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았다.

힘든 환자들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빗대어 “고통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고통에 감사했으니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환자를 누구보다도 깊이 공감해줄 수 있는 능력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좋다. 하지만 불가피한 고통이라면 그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 될까?

이승만이 비록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집중할 수 있어서 골프치기가 좋다고 한 말이나

에릭슨이 비록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소리로서 의사소통할 수 없을 때라도

사람들의 비언어적 의사소통방법을 연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관점바꾸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여유인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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