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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어야 할 복 네 가지
하나님이 주실 은혜의 복을 박으세요.
본문/민수기6:22-27절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빵속에 앙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은 앙꼬를 감싸고 있는 빵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은 앙꼬의 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축복 또한 앙꼬를 감싸고 있는 빵과 같습니다. 반명에 다음부터 나오는 말씀은 그 빵속의 앙꼬와 같은 복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해두린 두 가지는 육적인 복이고, 지금부터는 영적인 복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민수기6:25절에 그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복은 “은혜”입니다. 연이어 26절에는 “평강”이라는 복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조합 같지 않습니까?
바로 로마서1:7절의 말씀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 외에도 본문의 말씀에 대한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고전1:3절, 고후1:2절. 갈라디아서1:3, 에베소서11:2절, 빌립보서1:2절, 살전1:1, 살후1:2절. 디도서1:4절, 빌레몬서1:3절에서도 바울은 똑같이 인사 말씀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1:2절에 보시면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기원을 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1:2절에서도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또 요한도 똑같은 인사의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계시록1:4-5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러면 왜 사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말씀으로 기원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 두 가지가 사도들이 사역하고 편지를 보내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은혜와 평강이 얼아마 중요한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우리가 누려야 할 복중에 오늘 나누려고 하는 말씀은 은혜와 평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구약의 의미뿐 아니라. 신약의 의미를 함께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단순히 주해가 아니라. 예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본문 24-26절에 나오는 4가지 모두가 복입니다. 27절에 그것이 분명히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7절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러나 복을 받는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복에ㅐ서 큰 복 순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첫 번째 복인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에 나오는 복은 일반적인 복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도 원하는 복입니다. 또 세상 사람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을 좋아하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복은 가장 큰 복이 아니라. 가장 작은 복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아서 건강을 잃거나, 목숨을 일찍 잃으면 일반적인 축복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가 첫 번째 복보다 더 큰 복입니다.
또 세 번째 복은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얼굴과 관계 있는 복으로 첫째와 둘째 복과는 달리 영적인 복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의 축복입니다.
에베소서2: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람이 아무리 돈 많고 장수 해도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보다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가 두 번째 복보다 더 큰 복입니다.
또한 네 번째가 세 번째 복보다 더 큰 복입니다. 그런데 앞의 복들과 달리 왜 네 번째가 세 번째 복보다 더 큰 복인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한자의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는 전절의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보다 적극적인 표현으로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은 물론 최대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가 가장 큰 복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호의와 ㄴ특별한 은총을 포함하고 잇는 가장 특별한 복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 두가지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복을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25절에 나오는 세 번째 복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민수기6:25절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이 복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올슨이라는 학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있는 축복의...행은 빛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얼굴이ㅏ...자애롭게 빚나는 것을 지칭한다. 빛은 밝음, 게시, 햇빛의 따스함, 차가운 어두움으로부터의 구원, 생명의 갱생, 그리고 밝은 기쁨의 뜻을 포함한다. 이스라엘 위에 이처럼 밝게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은...고난 시절의 구원을 기리는 풍부한 찬양시의 주제이다.]라고 합니다.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인 왕대일 교수님은
[하나님께서 다정다감하게 관심을 표명하시는 모습을 표시 한다.(예/시31:17) 하나님의 얼굴을 네게 비추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다 라는 표현, 즉 하나님의 진노(예/신31:18)를 나타내는 말에 대한 반대어이다. 왕의 희색이 그의 은택(잠16:15)과 동의어지만 반대는 그의 진노(14절)이다.]
참고로 잠언16:14-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이제 왜 하나님이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는 것이 구원을 뜻하는지 아시겠어요? 뿐만 아닙니다.
살전1:10절에 보시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 구절에서 “노하심”은 “구원”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노하심에서 구원받는 것이 칭의 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대표적인 학자인 김세윤 교수님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칭의의 언어입니다. 최후의 심판때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함을 받는 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무죄 선언을 받는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의인 선언을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의미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세 번째 복의 진수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칭의 즉 롬1:17절에 나오는 칭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복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돈이 아닙니다. 명예나 권세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건강과 장수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가장 큰 복은 바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고 지옥 붙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사랑의 하나님이 독생자를 속죄 제물로 이 땅에 보내셨고 그 동로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을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롬3:19-24절에 그 사실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읽고 성경속의 진리를 잘 알고 그 진리 위에 신앙의 도태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영원히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우리들이 용서받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한 에베소서1:2-7절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 하나님의 법정 즉 심판대에서 정죄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그 결과 지옥 불에 던져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을 때 철저히 외면 하셨습니다.(마27:46) 그것이 본문 25절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우리에게 그 얼굴을 돌리거나 감추지 않고 그 얼굴빛을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고 여러분 모두 기꺼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이것이 은혜의 전부가 아닙니다. 칭의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반쪽에 불과 합니다. 은혜의 나머지 반쪽이 있는데, 바로 성령님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값을 지불하신 것을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한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은혜의 반쪽인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의롭다 함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새 사람이 됩니다. 즉 바울이 롬8:1-2절에서 말씀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면 이 구절에 나오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음 구절을 잘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롬7:18-24절을 잘 읽어보세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와 사망의 법은 여기서 나오는 ”죄의 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부를가요? 그 이유는 죄의 법에 살로잡혀서 살면 반드시 사망 즉 멸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될수 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롬8: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시간 이 예배 가운데 이 말씀을 사모한다면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을 우리 모두에게 충만케 해 주실 줄 맏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은 이 성령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님을 간절하게 사모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성령 충만을 받고 죄에서 자유케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직 은혜의 복을 다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도 은혜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 이름에도 은혜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도 종류가 많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은혜중에 구원 즉 칭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반쪽짜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반쪽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한 거듭남과 성화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은혜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다른 반쪽이 있는데, 바로 성령세례와 은사들입니다. 로마서12:6-8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고전12장에서 나오는 9가지 은사도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사가 많이 받았어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믿음의 지체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풍성하게 부어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땅의 피로 값주고 사신 모든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전1:7절에 보시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이땅의 어떤 교회도 이 말씀 앞에 제외되는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강력한 은사와 기름부음이 강해도 하나님은 그곳에 더 칠값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직전에 더 많은 영혼의 추수를 위해서 이땅에 교회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 의글스워스라는 한 세기에 강력하게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이 전기인 [스미스 위글스워스처럼]이라는 책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간증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은혜에 대한 강력한 사모함이 들끓기를 원합니다. 그저 종교적인 삶에 만족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잘못된 종교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현실에 묶여 사는 것은 종교인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항상 주님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성령님 충만하게 하옵소서. 나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나의 남을 날들을 주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다가 주님앞에 서게 하옵소서. 이걸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왔던 위대한 영성가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분의 영성을 사모하고 이렇게 살다가 주님앞에 서지 않는다는 각오로 남은 생애를 살기를 바랍니다.
이분은 하나님을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일해서 번돈의 100%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 했습니다. 전도가 생활화한 분이었고 매일 여러명씩 전도해서 구원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병이든 그가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다 치유 되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사람들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자신마저도 넘어졌습니다. 물건들이 자진이 일어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또 자주 아무 말도 안해도 그가 가는 곳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통곡하며 울고 회심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또 마치 예수님과 베드로처럼 그에게 손을 대거나 그의 그림자만 밟아도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또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우리가 한 순간도 주의 말씀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주님게서 아십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말씀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주께서도 알고 게십니다.]
심지어, 그는 인생 말년에 자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돌이키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울러 생일이나 성탄절이 되어 받고 싶은 선물이 있는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입니다. 그저 적당하게 교회 다니다가 천국갈 생각하면 망조입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의 역사는 어마어마 합니다. 그것이 오늘 모든 교회 위에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한시대에 살면서 맹맹한 신자의 삶으로 끝난다면 이것은 비극적 삶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이 책 제목처럼 ”스미스 위글스 워스처럼“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때 보다 성령의 사람의 전기를 많이 읽고 그분을 닮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기름부음과 은사와 권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끝나지 않을 대 부흥을 위해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신앙에 안주하지 말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마지막 시대에 주님앞에 쓰임받다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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