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요.
문 앞 쪽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비를 봅니다.
빗발은 가는 데, 처마 끝에서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굵네요.
그 빗방울들이 이내 디딤돌 앞 요기조기 굳은 땅을 들어내고 구멍을 팝니다.
파여져 나온 흙들은 개미집 입구처럼 구멍 주위에 소복 쌓여갑니다.
밭에 나간 외할머니가 걱정되어 쪽마루 기둥을 쳐다보니 비닐 비옷이 보이질 않아요.
다행입니다. 외할머니가 입고 나가신 모양입니다.
외할머니는 비오는 날을 알아 맞추는 용한 재주를 가졌거든요.
싸립문 안 감나무 잎들이 빗발에 힘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물론 홍시 감은 달려있지 않습니다. 추석에 다녀간 외가 친척들이 거의 다 따가 버렸고
남은 것은 채 홍시가 되기 전에 내가 다 따먹어버리고 말았거든요.
배가 약간 고픕니다. 그래도 외할머니 오실 때까지는 참을 수 있어요.
외할머니는 내 밥때도 용케 잘 아십니다. 물론 저랑 둘이서 밥상을 마주하면 자꾸 울어서 곤란하긴 하지만요. 할머니가 우시면 저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요...
한번 외할머니 우실 때, 나도 울적해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훌쩍거렸다가 외할머니가 엉엉 우시는 바람에 혼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 후론 절대 같이 훌쩍거리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비가 슬슬 그치고 있네요.
처마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걸 보는 재미는 이때부터가 시작입니다.
빗방울 떨어지는 곳 세 곳쯤 정해서 누가 빨리 떨어지나 지켜봐도 재미있고요,
구멍 위에 고인 물을 어느 방울이 멀리 높이 튀기나 지켜봐도 재미있어요.
빗방울 따라 처마에서 땅으로 눈이 따라 다니는 놀이도 재미있지요. 하다보면 눈도 뱅글, 목도 뻐근 제일 재미있는 놀이가 되지요. 빗방울 하나가 처마에 맺히고 손가락 하나하나 접어가며 열 셀 동안 떨어지지 않으면 놀이는 끝입니다. 찌푸린 하늘이 파래져 있지요.
해보세요. 아주 재미있어요.
비가 그치면 집 앞길에 작은 개울이 생겨요. 맑은 물이 졸졸졸 잘도 흘러내리지요.
종이가 귀하니 얼른 떨어진 감나무 잎을 주워 물기를 탈탈 털어 내고 바지에 슥 문질러 닦습니다. 물기가 있으면 금새 물에 빠져 버리거든요.
작은 잎을 큰 잎 중간에 꽂으면 어느새 감나무 잎은 멋진 돛단배가 됩니다.
항상 두 개를 만듭니다. 한 개는 재미도 없고 나처럼 외로워도 보여서 꼭 두 개를 만들지요.
좀 더 멋져 보이는 녀석은 오른 손에, 좀 못한 녀석은 왼 손에 나누어 쥐고는, 비올 때 디디라고 놓아둔 큰 돌 위에 올라섭니다. 가을에 내린 비에 발을 담그면 생각보다 아주 시리거든요. 졸졸 개울물 위에 살짝 녀석들을 내려놓습니다.
물론 오른 손에 쥔 녀석을 왼 손 눈치 못 채게 약간 먼저 내려놓습니다.
두 녀석 다 쏜살 같이 달려나갑니다. 목 끈 풀린 강아지 마냥 좋아라 달려나갑니다.
나도 바빠집니다. 내려놓자마자 달랑 뛰어 건너 녀석들을 따라 달립니다. 혹시 오른 쪽 녀석이 달리다가 걸릴 장애물이 보이면 얼른 치웁니다. 마음이 바쁘면 발 시린 줄도 모르거든요.
왼 쪽 녀석 장애물은 못 본 채 그냥 둡니다.
왼쪽 녀석이 떨어진 나뭇가지 근처 뱅뱅도는 물살에 말려 뱅뱅 돌다가 그만 나뭇가지에 턱 붙어 버립니다. 오른 쪽 녀석이 좀 더 내려갔나 확인하고는 슬쩍 길을 열어 줍니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되어 '빨리 달려~' 응원도 합니다. 왼 쪽 녀석의 길을 열어주는 사이, 이번에는 오른 쪽 녀석이 장애물에 걸립니다. 냅다 달려가 왼쪽 녀석이 오기 전에 얼른 길을 열어 줍니다. 내 마음이 더욱 바빠지며 신이 납니다. 나도 모르게 박수도 칩니다.
"오빠야~ 호태 오빠야~"
돛단배 놀이에 열중하다보니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담 넘어 옆집에 사는 여섯 살 짜리 영숙입니다. 이 동네에서 호태 오빠라 부를 사람은 영숙이밖에 없거든요. 어느 틈에 내 곁에 달려와 바싹 붙어 섭니다.
"오빠야 또 뱃놀이하는구나. 내 껀 어는 거 하꼬?"
영숙이는 영숙이 아빠가 할머니 댁에 맡겨 놓은 아입니다. 나랑 다른 점은 나는 엄마가 외할머니 댁에 맡겨두었다는 거지요. 영숙와 나랑 같은 점은 아빠나 엄마가 대처에 돈벌러 나간 것과 엄마나 아빠가 먼저 하늘나라에 간 것입니다. 동네에 또래라고는 달랑 둘밖에 없다보니 자연 친하게 놀기도 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늘 사이좋게 지냅니다.
비밀인데요...헤헤...영숙이는 커서 어른 되면 나한테 시집 온데요.
"닌 저거 해라~"
왼쪽 손에 잡았던 녀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그거 안 할란다. 난 앞에 있는 거 할란다. 오빠야~"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 말대로 안 하면 샘통이 말이 아니거든요.
새로이 마음이 바빠집니다. 얼른 내 배 앞길로 달려가 장애물도 치우고 물길을 깊이 팝니다.
영숙이도 안 질려는 마음에 어느새 앞질러 달려나가 뱃길을 엽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다 보면 어느새 동네 앞 시멘트 하수구 앞에 다다릅니다.
다시 집 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머니에 넣어둔 잘 마른 감나무 잎으로 새 돛단배를 만듭니다. 못생긴 잎 두 개를 골라 영숙이에게도 줍니다.
옆에서 열중해서 돛단배를 만드는 영숙이를 보니 참 예쁩니다.
똘망똘망한 눈에 판판한 이마. 코도 오똑합니다. 여름 내 까맣게 그을린 피부도 서울서 추석 때 내려온 외사촌 여동생의 돼지 뱃살처럼 허연 얼굴 색보다 더 예뻐 보입니다.
유치원에 다닌다던 그 동생은, 아직 일곱 살이라 학교도 안간 저보고 구구단도 외워 보라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도 나불대고 뻐겨대는 모습이 보기 싫었거든요.
그 아이가 가고 나니, 그 동안 영숙이에게 퉁명스럽게 군 것이 약간 미안했습니다.
세 번 더 그 놀이를 하고 나니 "호태야~ 밥 묵어라~" 외할머니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 그만 밥 먹으러 들어가야 돼요.
저녁에요...오늘은 엄마 오실까 집 뒷동산에 올라 기다리다가 또 생각나는 이야기 있으면 들려 드릴게요.
아빠...그때까지 심심해도 혼자 놀아요...
첫댓글 마음자리 님~작가 신가 보네요~
긴 글 잘 읽었어요......계속..잘 부탁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는 아니고 글쓰기 좋아서 습작을 즐깁니다.
잘 읽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동심의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ㅠ.
동심이라 외로움을 어른들보다 더 잘 이겨내나 봅니다.
외할머니댁 감나무~
잘익은 감 따 놓으시고
저를 기다려주시던 외할머니가
오늘 너무 그립네요
오늘은 외할머니 꿈을 꿀것 같습니다.
고운글 잘 읽었습니다.
마쉬멜로님 어릴 적 외할머니 추억을 떠올리셨군요. 꿈에 꼭 외할머니 만나세요~
어린시절의 회상이 떠 오릅니다.
누구나 저러한 어린추억이 있지요 순진무구한 옛추억을 되살려봅니다
좋은글에 고맙습니다
세상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던, 놀이가 되던 어린 날이 늘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쩜, 외로움이 절절하지만
천진한 맘으로 만난 두 아이,
속됨이 없는 맑은 동심
잘 읽었습니다.
예전처럼 살기가 어렵지도, 형제가 많지도 않은데, 결손 아동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아주 어릴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많고... 동네 나가서 놀다가 서러운 일 당하면 엉엉 울며 집에 달려와 일러주던 엄마나 형·누나들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늘 속으로만 안타까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