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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중가요 역사,,,1980년대
1980년대 한국 가요계는 “가왕” 조용필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황금기를 이뤘습니다. 사실상 조용필의 일방적인 1인독주 시대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용필의 최전성기 시절에 거의 유일한 라이벌로 인정받았던 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의 위협적인 라이벌이었던 김수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젊은 오빠”, “한국의 성룡”이라는 별칭을 얻은 만능 엔터테이너 전영록의 활약도 돋보였습니다. 전영록은 “불티”, “내 사랑 울보”,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등의 주옥 같은 히트곡을 남김과 동시에 영화배우, 무술인, CF 스타로서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 부연설명 - 조용필의 라이벌 ]
=> 1980년대의 가요계를 주름잡은 조용필은 사실상 라이벌의 존재가 무색하다 싶을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며 철옹성과 같은 1인독주 시대를 구가했습니다. 조용필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인 “최고 인기가수”를 무려 6차례나 수상했고, “KBS 가요대상”의 대상을 무려 5차례나 수상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나마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도전자들이 몇차례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절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가수들이 최고의 톱스타인 조용필을 목표로 삼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이용, 김수철, 전영록으로 대표됩니다. 그 외에는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 혜은이, 이은하, 현숙, 방미, 구창모(송골매), 김범룡, 윤수일, 최성수, 송창식, 최백호 등이 자천타천으로 조용필의 라이벌로 거론되기도 했고, 이문세, 이승철, 변진섭, 현철, 주현미 등이 자천타천으로 조용필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렸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등도 전성기 시절에 한번쯤은 조용필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의 전성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0년대 초반에 그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도전자는 이용이었습니다. 조용필은 이미 1975~76년에 걸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불멸의 국민가요를 히트시킨 주인공이었고, 1980년에는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1981년에는 “고추잠자리”, 1982년에는 “못찾겠다 꾀꼬리”가 연달아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가요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용은 1982년에 “잊혀진 계절”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조용필을 제치고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수상했습니다.
이용의 돌풍에 휘말리며 잠시 주춤했던 조용필은 이듬해인 1983년부터 다시 독주체제에 들어갔고, 1984년에는 김수철이 “못다핀 꽃 한 송이”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KBS 가요대상”의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하며 조용필의 새로운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조용필은 1982년에 최대의 라이벌인 이용에 의해서 톱스타로서의 아성을 잠시 위협받았고, 1984년에는 김수철이라는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으로 인해서 역시 톱스타로서의 아성을 잠시 위협받았습니다. 오늘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를 1980년대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로 기억하고 있으며, 매니아층이나 평론가 집단에서는 김수철을 조용필에 필적할 만한 뮤지션으로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는 일단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4대 톱스타의 이름을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조용필이 최고의 정점에 올라있던 시절에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했던 도전자가 1982년의 이용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1984년의 김수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필자 역시 80년대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나중에 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옛날 신문기사 수집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다소의 어려움과 미흡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은 4대 톱스타 중에서 제 글에서는 비록 전영록의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나열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시절에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던 세대의 가요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도를 “조용필 vs 이용 vs 전영록”의 구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조용필의 독주체제 속에서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불을 뿜었던 것이 그 시절의 대체적인 분위기였고, 대다수의 팬들의 기억 속에서도 조용필, 이용, 전영록의 이름은 당대를 풍미했던 톱스타로서 “빅3”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용은 조용필, 전영록에 비해서 데뷔도 늦었고, 활동년수도 짧은 편이지만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의 존재로 인해서 조용필의 대표적인 라이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가수로서 활동하며 이룬 “통산성적”에서는 사실 조용필과 이용은 라이벌이라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의 현격한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1980년대 가요계를 휩쓸었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고추잠자리”에 필적할 만한 국민가요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이용은 누구보다도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린 뒤, 1985년에 치명적인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가요계를 사실상 떠났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복귀했습니다.
전영록은 이미 1970년대부터 “원조 아이돌 스타”로서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도 조용필과 함께 가장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오빠부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통했습니다. 실제로 1980년대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본상격인 "10대가수"의 연도별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를 수상한 가수가 조용필과 전영록이었습니다. 전영록은 "10대가수상"을 통산 10회나 수상하면서 조용필(8회)을 능가하는 수상횟수를 기록했습니다.
전영록은 비록 이용, 김수철처럼 특정 시기의 초대박 임팩트에 있어서는 조용필의 아성을 넘어서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측면이 있지만, 가요계에 데뷔하고 인기를 얻은 시기도 조용필 다음으로 빠른 편이었고, 조용필의 시대가 거의 막을 내릴 무렵까지도 가장 꾸준하게 가요계의 정상을 다투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라이벌 관계 자체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었지만, 1980년대 조용필 시대의 실질적인 2인자는 사실상 전영록이었다고 설명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영록의 가수활동 성적은 화려했습니다.
대략적인 추이를 보자면 1980년대 초반에는 조용필이 독주체제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과 전영록이 2인자 다툼을 벌이는 구도였고, 조용필, 이용, 전영록은 “빅3”로 불리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톱스타였습니다. 조용필에 대항하는 도전자 그룹 중에서는 이용이 순간적으로나마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최강의 라이벌로 각인되었고, 그 이후에는 김수철이 순간적으로나마 조용필의 아성을 또한번 위협했던 강력한 도전자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용과 김수철의 돌풍이 사그러든 이후에도 조용필의 독주체제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전영록은 여전히 조용필과 함께 대표적인 “청춘스타”로서 가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조용필은 1986년까지 “MBC 10대가수 가요제”, “KBS 가요대상”, “골든디스크”와 같은 그 시절에 존재했던 모든 연말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독식한 뒤, 1987년 이후부터는 방송 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가요대상 수상을 사양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7년에는 당대 최고 권위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개최가 무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떠난 가요계는 세대교체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가왕’ 조용필이 최고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온 뒤, 1986~88년에 걸쳐서는 가요계의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용필의 라이벌 그룹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건재함을 과시한 전영록, 발라드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문세, 트로트 부문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주현미가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떠올랐습니다. 전영록은 1986~87년에 걸쳐서 “KBS 가요대상”의 대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했고, 이문세는 1987년에 “골든디스크”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주현미는 1988년에 “MBC 10대가수 가요제”와 “KBS 가요대상”, “골든디스크”의 대상을 모두 휩쓸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1980년대의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조용필, 이용, 전영록의 3인방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조용필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로서 국내 가요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진출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며 한국 가수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용필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가요계 데뷔 시기는 196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용필은 1970년대 초반에도 이미 “화이브 핑거스”, “김트리오”라는 ROCK 밴드 활동을 했던 경력이 있고, 1970년대 중반에 솔로가수로 데뷔한 이후에는 1976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당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는 1964년의 “동백아가씨”(이미자)를 능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연예계 전반에 불어닥쳤던 “대마초 파동”의 여파에 휘말리면서, 조용필은 본의 아니게 공백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용필은 한동안 무명가수로서의 설움을 겪어야 했지만, 1980년 가요계 복귀 이후로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등의 노래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단숨에 가요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조용필은 초창기에 트로트 성향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등을 통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그의 음악적인 뿌리는 ROCK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조용필은 “위대한 탄생”이라는 백밴드를 이끌었는데, “위대한 탄생”은 국가대표 밴드로 불릴 정도로 명성을 누렸고, 당대의 이름을 날렸던 연주자들은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된다는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조용필은 스스로 작사, 작곡을 모두 소화해내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적인 음악들을 창조해내는 뮤지션으로서도 찬사와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 작사가 콤비였던 김희갑, 양인자 부부의 노래를 받아서 자신의 노래로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보컬리스트”로서도 출중한 역량을 선보였습니다. 덕분에 조용필은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낼 수 있었고,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슈퍼스타”로서도 선두주자였던 동시에 혁명적인 음악을 창조해내는 “뮤지션”으로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냈습니다.
조용필(1980년대)은 이미자(1960년대)와 함께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존경받고 있으며 광복 이후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광복 이전의 가요계 황제였던 남인수(1940~50년대)와 광복 이후에 가요계의 황제였던 조용필(1980년대)은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기도 합니다.
1980년대 가요계 판도의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봤을 때 조용필이 절대강자로서 확고한 독주체제를 이루는 가운데,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기가수들이 조용필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지며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불을 뿜는 가운데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도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조용필의 독주체제를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서는 1982년의 이용이 첫손에 꼽히는 가운데, 1984년의 김수철이 또한번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의 돌풍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조용필의 일방적인 독주체제는 계속되었고, 조용필과 함께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롱런했던 전영록은 사실상 조용필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조용필이 독주체제를 이루는 가운데 전영록, 김범룡, 구창모, 이선희 등이 2인자 다툼을 벌였고, 1980년대 후반의 세대교체기에는 조용필의 유일한 대항마였던 전영록이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이문세, 주현미, 변진섭, 현철 등이 가요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대 가요계의 판도를 포괄적으로 정리할 때 라이벌 관계 자체는 “조용필 vs 이용”의 경쟁구도에 주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용필의 일방적인 독주체제 하에서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10대가수”의 지위를 꾸준하게 누렸던 조용필과 전영록은 1980년대 가요계의 실질적인 양대산맥으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한편 현철과 주현미는 각각 남녀 트로트의 대표주자로 떠오르면서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현철은 KBS 가요대상을 2차례 수상했으며, 주현미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2차례 수상했고, 골든디스크와 KBS 가요대상을 각각 한 차례씩 수상했습니다.
[ 1980년대 후반까지 남녀 트로트 가수 부문에서는 주현미의 독주가 거의 절대적이었고 현철이 주현미의 아성에 도전하는 구도였습니다. 주현미는 대선배인 이미자의 후계자로 부각되며 “트로트 여제”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설운도, 심수봉, 김수희 등이 전성기를 누렸고,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송대관, 태진아의 국내 가요계 복귀도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가 "트로트 4대천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
1980년대 초반의 여가수 부문에서는 윤시내가 KBS 가요대상에서 “여자가수 부문 대상”을 3차례나 수상하면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1970년대 후반의 여가수 부문에서 쌍벽을 이뤘던 혜은이와 이은하는 1980년대 초~중반까지도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그 외에도 1980년대 초, 중반에는 이정희, 정수라, 인순이, 이선희 등의 활약이 돋보였고 1980년대 중, 후반에는 나미, 김완선, 민해경 등이 “섹시퀸”으로 떠올랐습니다.
한편 그룹사운드의 활약도 돋보였는데, 김창완이 주축이 된 “산울림”과 전인권이 주축이 된 “들국화”는 언더그라운드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구창모와 배철수의 투톱이 주축이 된 그룹 “송골매”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1980년대의 ROCK 밴드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며 성공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송골매는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거의 매해마다 “10대가수”에 선정되면서 당대 최고의 ROCK밴드로 군림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송골매”의 간판스타인 구창모가 탈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가수인 구창모와 그룹사운드인 송골매가 모두 나란히 “10대가수”에 올라서 조용필, 전영록, 김범룡, 이선희 등과 함께 연말 “가수왕”의 지위를 놓고 경합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3대 ROCK 밴드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이문세와 이승철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했습니다. 이문세는 한국 가요계에서 발라드의 중흥을 이끌며 골든디스크 대상을 한 차례 수상했습니다. (이문세 이전에도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간다면 1960년대의 패티김, 1980년대 초반의 이용 등이 발라드의 기틀을 다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발라드’라는 장르 이름을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계기는 역시 이문세의 등장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문세는 주옥 같은 히트곡들을 남겼고, 후배 가수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있는데, “광화문연가”(이수영), “깊은 밤을 날아서”(조성모), “붉은 노을”(빅뱅)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1988년에 발표되며 이문세의 대표곡으로 널리 알려졌던 “붉은 노을”은 20년의 세월이 흐른 2008년에 인기 아이돌 그룹 빅뱅에 의해서 리메이크되면서 또한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문세의 존재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한번 주목을 받았고, “2008 KBS 가요대축제”의 엔딩 무대에서는 이문세와 빅뱅이 함께 “붉은 노을”을 열창하는 특별무대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승철은 1986년에 ROCK 밴드 “부활”의 보컬로서 데뷔한 후, 솔로가수로 독립하기까지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마약사건에 연루되면서 이승철은 오랜 공백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승철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했고, 그의 라이벌인 변진섭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당대의 가요계 역사를 조명할 때도 “발라드 황제”의 계보가 이문세-변진섭-신승훈으로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의 가요계 전체 판도를 살펴봤을 때도 중장년층에게 폭넓은 인기를 누렸던 “트로트 여제” 주현미와 신세대 팬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둘리” 변진섭의 양강구도로 회자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이승철과 변진섭은 한시대를 풍미한 라이벌 관계로 회자되고 있으며, 그들의 선배가수인 이문세와 함께 당대를 풍미한 “발라드 3인방”이라는 표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승철은 자신의 최대 라이벌인 변진섭보다 먼저 이름이 알려졌지만, 마약사건으로 인해서 좌초하면서 전성기 시절의 라이벌 구도에서는 열세에 놓였습니다. 오랜 슬럼프를 겪었던 이승철은 2000년대 들어서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데뷔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ROCK 밴드 “부활”의 재결합 성공 이후 다시 솔로가수로 독립해서 성공하는 수순을 되풀이했습니다. 이승철의 가치는 전성기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2000년대 이후에 재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승철은 “라이브의 황제”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선배가수 이문세의 명성에 버금가는 가요계의 전설로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트로트와 발라드에 밀려서 비주류 장르로 존재했던 댄스음악은 1980년대 후반부터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남자 솔로가수인 박남정, 여자 솔로가수인 김완선, 댄스그룹인 소방차 등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박남정과 김완선은 각각 “한국의 마이클 잭슨”,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을 얻으며 높은 인기를 얻었고, 오늘날 가요계에서 댄스음악이 주류로 자리잡게 된 초석을 다지면서 “원조 아이돌”로서 그 존재감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가요계 판도가 아이돌 그룹 위주로 재편되면서, 소방차는 “한국 최초의 아이돌 댄스그룹”으로서 그 존재감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편 1980년대 들어서는 대중가요의 팬층이 30대 이하의 젊은층은 발라드와 댄스, 그리고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은 트로트에 성원을 보내면서 양분되는 조짐을 보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양대 톱스타로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조용필과 이용의 팬클럽은 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오늘날의 아이돌 그룹 팬클럽들간의 신경전 못지않은 대립구도를 보여줬습니다. “가왕” 조용필이 군림하던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그렇게까지 노골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이 모든 가요대상 수상을 사양하고 본격적으로 라이브 콘서트 활동과 매니아층에 주력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는 더이상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가요계는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양분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1990년대로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가요계 판도가 “10대 청소년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아이돌 스타”, “20~30대까지 골고루 인기를 얻는 발라드 가수”,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는 트로트가수”로 나뉘게 됩니다.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고, “신세대” 팬들은 다시 “대중 vs 매니아”로 양분되며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20~30년대의 윤심덕, 이애리수, 이난영, 고복수”, “1940~50년대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와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과 나훈아”, “1980년대의 조용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시대별로 한 명씩만 대표적으로 거론할 경우 “남인수(40년대)->현인(50년대)->이미자(60년대)->나훈아(70년대)->조용필(8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가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과 이미자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으며, 광복 이전까지 포함할 경우에는 “광복 이전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이후의 가왕 조용필”이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가요 시상식을 정착시킨 196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오늘날의 어르신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이 대표적인 국민가수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4인방은 어르신 세대뿐만이 아니라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가요계의 불멸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30대 이하의 젊은층과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극명하게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그래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에 좀더 주도권이 있었기 때문에 젊은층의 사랑을 받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를 대표적인 “빅3”로 꼽고 있습니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5명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은 모두 가요계의 대선배이자 전설로서 후배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우열을 비교해서 대표주자를 가려내려고 한다면 “빅3”(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압축되고, “빅3” 중에서는 다시 서태지와 신승훈이 1990년대의 대표적인 전설로 압축되며, 그 중에서도 단 한 명만으로 압축할 경우에는 서태지가 그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은퇴 후 또는 사후에도 수십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와 "국민가요"가 존재했었는데, 그러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80년대의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광복 직후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총망라해서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들은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40년대와 남진, 나훈아가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70년대는 가장 뜨거웠던 라이벌 시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0~50년대를 휩쓸었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 1호 가수”로 등극했던 현인, 1960년대를 휩쓸었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1980년대를 휩쓸었던 "가왕"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전설의 계보에서도 사실상 "왕중왕"에 해당되는 존재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의 100년 역사를 무조건 10년 단위로 끊어서 도식화한다는 것에는 그만큼 불합리성이 작용할 수 있고, 또한 1980년대 이전 세대간 단절현상이 없던 시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과거의 “진정한 국민가수”들을 1990년대 이후의 신세대 가수들과 단순 비교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10년 단위로 단 한명씩의 이름만 순차적으로 나열할 경우”에는 “1980년대 조용필의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조용필 이전 - 나훈아, 조용필 이후 - 서태지”의 구도가 설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10년 단위의 대표주자를 한명씩만 나열하면서 인위적으로 리스트를 작성할 경우에는 "윤심덕(1920년대) -> 고복수(1930년대) -> 남인수(1940년대) -> 현인(1950년대) -> 이미자(1960년대) -> 나훈아(1970년대) -> 조용필(1980년대) -> 서태지(1990년대) -> 조성모(200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를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성모를 1990년대 가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비(Rain) 또는 보아(BOA)를 20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분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지기도 합니다. 팝음악계에서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역사에 회자되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에서도 그러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 1950년대의 남인수 vs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 vs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로서의 상징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는 그야말로 라이벌의 상징 그 자체로 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가수는 오직 남진과 나훈아뿐이다”는 평론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전설로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중장년층 이상의 기성세대들이 가요계의 팬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가운데, 신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의 젊은층이 가요계의 팬문화의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과거와 같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의 명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세대"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3인방이 오늘날의 신세대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존중을 받는 전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 신세대 중에서도 10대 청소년과 아이돌 팬덤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이나 매니아층이 서서히 가요계의 팬덤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국내 가요시장 자체도 최악의 침체기를 맞이했고, "전설"이라 불릴만한 톱스타의 부재현상도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전설"의 이미지에 근접한 가요계의 톱스타로서는 "마지막 국민가수" 조성모와 "한류스타, 월드스타"로 부각되는 보아(BOA), 비(Rain)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고착화되면서 연령대별로 나타나는 “세대차이”도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로 넘어갈수록 특정 세대에 의한 가요시장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대중적인 공감대가 점차 약화되어가고 스타급 가수들이나 히트곡의 수명도 점차 짧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10대 청소년들의 관심사는 주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소위 “1세대, 2세대 아이돌”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한류스타”, “월드스타” 등의 키워드에 관심사가 집중되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청소년 팬층은 특정 스타를 지지하는 “아이돌 팬덤”은 상당한 결집력을 보이는 반면에 나머지 대중들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경향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는 같은 10대 청소년 팬들 중에서도 이들 아이돌 가수와 팬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드러내는 안티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20~30대 청년층에게는 1990년대 당시의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빅3”가 여전히 가요계의 대표적인 전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들 “90년대 빅3”와 함께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조성모까지 포함한 빅4가 여전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가요계의 최강자로 인식되고 있고,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신세대의 영웅 4인방”도 기존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외면을 받는 뚜렷한 한계점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역시 과거의 “트로트 국민가수”들이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 사람들은 10년만 지나도 엄청난 세대차이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어르신들의 시대에는 세대차이가 오늘날처럼 극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1930~50년대에 사랑받았던 “국민가수”와 “국민가요”들이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르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꾸준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마감하고 201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 40대 이상의 연령대를 차지하는 중장년층의 “기성세대”는 주로 1960~80년대의 가요계의 팬문화를 향유했던 세대의 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을 좀더 세분화해서 나눌 경우에는 “7080 추억세대”와 “어르신 세대”로서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기성세대”들에게는 여전히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배호,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가수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들보다 더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원로급 국민가수”들의 존재감 역시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가요계 팬문화의 주도권이 “신세대”에게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들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송대관, 태진아로 대표되는 트로트 가수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신세대”와는 별도의 영역에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
조용필은 굳이 설명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매니아층과 평론가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뮤지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상대적으로 1980년대 이전의 전설적인 국민가수들이 부당한 폄하를 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지만, 조용필만큼은 여기서도 예외로 통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단순히 남녀노소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얻으며 국위선양을 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매니아층과 평론가 집단에서조차도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뮤지션”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국민가수”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동시에, “매니아층과 평론가 집단의 인정을 받는 뮤지션”으로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가수는 조용필이 거의 유일합니다. 또한 조용필은 작곡가의 노래를 받아서 최고의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르는 “보컬리스트”로서의 면모와 함께, 작사와 작곡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싱어송라이터”의 면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찬사를 얻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용필은 이미 “한류열풍”이라는 키워드가 생겨나기 20여년 전인 1980년대 당시에도 “사실상의 한류스타”로서 일본 무대에서 국위선양을 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레전드” 중에서도 조용필과 함께 “왕중왕”으로 거론될 만한 인물들로서는 선배 가수들 중에서는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등의 가수들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조용필 이전에 존재했던 전설들의 면면을 꼽을 경우, 원로가수급 인물들 중에서는 채규엽, 강홍식, 장세정, 고운봉, 황금심, 박향림, 심연옥, 이화자, 한복남, 백설희, 안다성, 송민도, 명국환, 권해경, 박재란 등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이며, 1960~70년대에 걸쳐서는 한명숙, 윤복희, 현미, 이금희, 최희준, 배호, 하춘화, 김추자, 신중현, 송창식, 양희은 등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입니다.
조용필 이후에 등장한 가수들은 사실상 그와 견주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지만, 굳이 라이벌 또는 비교대상을 찾을 경우 동시대의 라이벌로서는 이용, 전영록, 김수철 등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이고, 199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린 후배 가수들 중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 조성모 정도의 가수들이 그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조용필의 시대를 전후해서 흔히 “7080 세대” 또는 “추억세대”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며 가요계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로서는 조영남, 김세환, 혜은이, 이은하, 최헌, 이문세, 이승철, 변진섭, 주현미, 현철, 산울림(김창완), 들국화(전인권) 등의 이름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편입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난 20세기의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통틀어서도 “사의 찬미”(윤심덕), “황성옛터”(이애리수), “타향살이”(고복수), “목포의 눈물”(이난영),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나그네 설움”(백년설),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신라의 달밤”(현인), “동백아가씨”(이미자), “님과함께”(남진), “고향역”(나훈아) 등의 노래와 함께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불멸의 히트곡이자 “국민가요”로서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활약한 가수들 중 “레전드(전설)”이라는 칭호를 듣는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조용필, 전영록, 이용, 김수철, 김창완(산울림), 전인권(들국화), 이문세, 이승철, 현철, 주현미, 심수봉, 김연자, 윤시내, 인순이, 이정희, 이은하, 정수라, 이선희, 김범룡, 나미, 현숙, 민해경, 윤수일, 최성수, 최백호, 함중아, 방미, 남궁옥분, 최진희, 김현식, 유재하, 이광조, 유열,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 이지연, 이상은, 양수경, 김흥국, 홍서범, 한영애, 방실이, 김지애, 문희옥, 이치현(벗님들), 신형원, 해바라기, 봄여름가을겨울, 송골매(구창모, 배철수.....), 백두산(유현상, 김도균......), 시나위(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부활(김태원, 이승철, 김종서......) 등의 가수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왕” 조용필의 존재는 가히 독보적입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곡은
“창밖의 여자”(조용필), “단발머리”(조용필), “고추잠자리”(조용필), “못찾겠다 꾀꼬리”(조용필), “비련”(조용필), “친구여”(조용필), “나는 너 좋아”(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조용필), “여행을 떠나요”(조용필), “허공”(조용필), “모나리자”(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조용필), “서울 서울 서울”(조용필), “Q”(조용필), “추억 속의 재회”(조용필), “강원도 아리랑”(조용필), “한오백년”(조용필), “미워 미워 미워”(조용필), “눈물의 파티”(조용필), “잊혀진 계절”(이용), “못다핀 꽃 한 송이”(김수철), “젊은그대”(김수철),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전영록), “불티”(전영록), “내 사랑 울보”(전영록), “저녁놀”(전영록),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전영록),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현철), “봉선화 연정”(현철), “잃어버린 30년”(설운도), “신사동 그 사람”(주현미), “짝사랑”(주현미), “비 내리는 영동교”(주현미), “J에게”(이선희), “열애”(윤시내), “옥경이”(태진아), “바람 바람 바람”(김범룡), “남행열차”(김수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심수봉), “밤이면 밤마다”(인순이), “환희”(정수라), “어쩌다 마주친 그대”(송골매), “희나리”(구창모), “풀잎사랑”(최성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패티김), “빈잔”(남진), “사랑”(나훈아), “무시로”(나훈아), “잡초”(나훈아), “대동강 편지”(나훈아), “울긴 왜 울어”(나훈아), “화개장터”(조영남), “사랑의 미로”(최진희), “열정”(혜은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은하), “빙글빙글”(나미),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민해경), “호랑나비”(김흥국), “집시여인”(이치현과 벗님들), “아파트”(윤수일), “사랑으로”(해바라기), “개똥벌레”(신형원), “담다디”(이상은), “얄미운 사랑”(김지애), “널 그리며”(박남정), “리듬 속의 그 춤을”(김완선), “어젯밤 이야기”(소방차), “난 아직 모르잖아요”(이문세),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이승철), “새들처럼”(변진섭),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양수경),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방미), “포장마차”(현숙), “서울탱고”(방실이), “몇미터 앞에다 두고”(김상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조덕배), “이 밤을 다시한번”(조하문), “한동안 뜸했었지”(사랑과 평화), “행진”(들국화), “불놀이야”(홍서범), “나 어떡해”(센드페블즈),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조정현), “여름날의 추억”(이정석), “스잔”(김승진), “경아”(박혜성), “아침의 나라에서”(김연자),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남궁옥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광조), “세월이 가면”(최호섭), “토요일은 밤이 좋아”(김종찬), “꿈의 대화”(이범용, 한명훈), “바다에 누워”(높은음자리), “그대에게”(무한궤도), “젊음의 노트”(유미리), “내게도 사랑이”(함중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 “사랑이란 말은 너무 흔해”(임병수), “춘천 가는 기차”(김현철), “가시나무”(시인과 촌장), “풍선”(다섯손가락), “누구 없소”(한영애), “울고 싶어라”(이남이), “달빛 창가에서”(도시의 아이들), “비오는 날의 수채화”(김현식, 권인하, 강인원), “내가”(김학래), “촛불잔치”(이재성) 등의 노래들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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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대중가요 역사 - 1980년대|작성자 JOHN C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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