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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2월 촬영한 현매초등학교 1회 졸업사진, 이 사진속 주인공들도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배운 게 많은 사람은 좌익이 많았다는 것이 해방정국을 기억하는 많은 안성사람들의 기억이다.
배운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해방된 조국의 미래로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을 선전하는 좌익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배운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좌익활동에 연루되었고, 그 중에는 북한으로 가서 고위층이 된 사람도 있다고 했고, 최근에는 중국 등에서 이산가족이 서로 만났다는 이야기도 했다.
현매리도 마찬가지 였다.
해방정국에서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도 좌와 우로 나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서로 약속하기를 “이념을 떠나서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즉 좌익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좌익으로부터 피해보는 것을 막아주었고, 우익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좌익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해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또 보도연맹에 가입해서 문제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미양면 소머리 고개가서 학살 당한 사람이 있다는 증언도 들었다.
그 어머니는 입은 옷을 보고 아들임을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이념도 결국은 혈연과 지연으로 상징되는 천륜과 공동체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다 더불어 잘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현매리 사람들이 기억하는 근현대 인물중에는 매향마을 출신으로 정우규 면장이 있었고, 송죽마을 출신 정상규 면장도 서운면장을 역임했다.
백로 날아 들고 집집마다 머슴 두고 살던 동네
주민들이 기억하는 현매리의 풍경 중 빼 놓을 수 없는 풍경이 백로가 노니는 풍경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현매리는 밀양 박씨의 종중산이기도 한 산을 중심으로 그 기슭에 마을이 흩어진 모양인데,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다.
그 산에는 백로가 많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운초등학교 등지에서 소풍을 오기도 했지만, 수종을 잣나무로 바꾼 뒤에는 더 이상 백로가 찾아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백로가 많을때는 청룡천 물고기를 이 백로가 잡아먹어 사람이 잡아 먹을것이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는데, 백로가 오지 않는 지금은 이를 아쉽게 생각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해방되던 즈음 전기가 들어오고 기차가 동네 옆을 지나가는 동네이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던 마을이라는 것이 현매리 사람들의 기억이다.
농사지을 땅이 많아 집집마다 머슴두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정석규씨 혹은 정행성씨가 파 놓은 소류지도 농사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금은 공장이 되었지만 마을 곳곳에 있던 수렁논들은 ‘흉년 밥그릇’노릇을 톡톡히 했다.
주민들 스스로 집수정 만들어 농사 지어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동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현매리도 역시 다른 마을처럼 농사는 하늘을 바라보고 짓는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가물면 농사지을 물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현매리 주민들의 대응은 송정리 주민들처럼 집수정을 통한 해결을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그랬던 주민들의 노력은 지금까지도 현매리 농민들의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들의 기억을 종합하면 집수정은 1977년 무렵 만든 것이다.
송정리 집수정이 1976년 마무리 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청룡천 인근에 집수정을 만들고 멀리 2.2km떨어진 곳까지 주민들이 힘을 모아 관을 묻어 관개시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977년 1개를 완성하고 1978년에 1개를 추가로 완성해 당시 약 19만평가량되는 현매리 구역의 농지에 물을 댔다고 한다.
이 때 앞장선 사람이 당시 이장이었던 정용문씨, 정용택씨 등이었다고 하고 주민들도 약 45일가량 나와서 관을 묻는 일을 함께 했다.
이 때 만든 집수정과 관은 지금도 현매리 사람들의 농사물을 책임지고 있다.
30마력짜리 모터를 이용해 6맘8,000여평에 물을 대고 있다.
가마니 공장 세워 운영한 맹근너 사람들
송죽촌 사람들이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집수정을 이용해 농사지을 물을 공급했다면, 맹근너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그럴 전답도 부족했던 동네였다.
농지가 부족하다 보니 장리쌀을 얻어 먹는 것은 예삿일이고 돈을 미리 끌어다 쓰고 나중에 일을 해주고 먹고 살던 동네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웠던 동네지만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무렵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노력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때 앞장선 것이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도 역임한 정동욱씨.
당시 새마을 운동과 관련해 낙후마을에 대해서는 특별히 시멘트도 지원하고 대통령 하사금도 지원되었는데, 이것을 이용해 가마니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막상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기술을 몰라 당시 보개면 구사리에 있던 가마니 공장에 가서 배웠다.
주민들의 노력의 결과 먼저 시작한 구사리 가마니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맹근너 마을 가마니 공장은 1970년대 내내 운영되며 마을 살림밑천 노릇을 톡톡히 했다.
가마니 공장을 통해 1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당시 이들의 월급은 남의 집 머슴 사는 것보다 괜찮았다.
하루에 150-200장 가량을 만들었는데 돈 모이는 재미에 힘드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 덕택에 너도 나도 빌려쓰느냐고 모자랐던 영농자금은 남아 돌았고 정동욱씨는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추억이 살아 있는 현매 초등학교
정동욱씨는 현매초등학교 설립에도 앞장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학교를 유치했다는 것이 현매리 주민들의 기억이었다.
현매리를 비롯해 인근 7개 마을 아이들은 학교가 멀어 불편했다.
이에 주민들은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에 앞장서 학교를 유치한 것은 물론이고 학교를 지을때도 삽과 괭이를 이용한 학교 부지 평탄작업에 적극 나섰다.
현매초등학교는 1968년 서운초등학교 현매분교로 설립되어 지난 1972년 현매국민학교로 승격되었고 지난 2월 42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누적 졸업생은 1,220명이다.
마을 주민이면서 현매초등학교 4회 졸업생인 이인동(52세) 한농연 안성시 연합회 감사는 자신이 다닐당시에는 한학년에 70-80명 가량되었고 전교생이 400-500명 가량되었다고, 그 때가 가장 학생수가 많았다고 추억했다.
현매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정동구씨는 처음에 분교시절 빵배급이 나오면 서운초까지 가서 빵을 받아왔는데 비가 온후 물이 불은 청룡천을 건너다가 물에 젖어 빵이 불어 아주 커졌지만 친구들이 그 커진 빵을 보며 좋아했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배 과수원이 많은 동네
현매리 사람들이 해결했으면 하는 문제 중 하나는 오랫동안 물 분쟁을 겪고 있는 법전리 사람들과 화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같은 물을 농업용수로 쓰다보니 물이 부족할때는 서로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에서는 자매결연 맺은 회사에서 매년 와서 일손을 도와준다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매리 사람들은 그렇게 순박하고 선한 사람들이다. 그런 현매리 사람들이 요즈음 표정이 어둡다.
지금도 현매리는 웬만큼 근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면 옆을 지나가면서도 마을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을의 위치가 현재의 도로 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인데,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는 마을 주변을 온통 포도밭과 배 과수원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배농사를 짓는 집이 많아 16집 가량 된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런 현매리 사람들이기에 요즈음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안성을 휩쓸고 있는 화상병 때문이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옛 이야기 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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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아 보려 노력했던 맹근너 주민들이 운영했던 가마니공장,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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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만평에 이르는 현매리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주민들이 만든 집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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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우 이장(왼쪽)과 정창식 총무가 집수정 내부를 안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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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농사를 짓는 이인동씨, 현매초등학교 4회 졸업생이다. 화상병 때문에 걱정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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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 전 안성시 의회 의원, 현매리 송죽촌이 고향이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지만 자신은 현매리 사람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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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매초등학교 전경, 작은 학교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학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