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ㆍ『승만경』을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담제(曇濟)ㆍ담종(曇宗)
당시 장엄사에는 담제ㆍ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 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