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과 우리말 / 경기도 여주시 왕대리
왕터와 능터
풍수적으로 왕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터에는 풍수적으로 좋은 터가 있고 좋지 않은 터가 있다. 그래서 어느 터가 좋고 나쁘냐를 보게 된다. 임금을 내는 땅이 있는가 하면 도적을 내는 땅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사람이 묻힌 땅을 음택(陰宅)이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양택과 음택 중에서도 좋은 터가 있고 그렇지 않은 터가 있다고 믿어 왔다. 그만큼 풍수(風水)를 보는 관점이 컸다.
대통령을 낸 땅
조선시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경상도 선산조를 보면 선산 땅의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쪽에 있는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맑다. 전해 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경상도)에 있고 영남 인제의 반은 일선(선산)에 있다고 한다. 까닭에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임진년에 명나라 술사(풍수설 또는 사주나 전설 따위의 능통한 사람)가 나라의 인재가 많은 것을 시기해서 군사를 시켜 고을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서 뜸질하게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서 땅에 정기를 눌렀는데 그 후로는 인재가 나지 않는다.'
선산 땅은 이처럼 예부터 인재가 많이 나는 고을로 잘 알려져 왔다. 이것은 터가 좋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좋은 터는 좋은 산수를 지난 지녔다. 바꿔 말하면 좋은 산수를 진 곳에 좋은 터가 있다. 그런데 좋은 산수도 좋은 이름이 붙어야 그 텃값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문장가나 문필가가 많이 나온 것을 보면 그 곳에 대개 문필봉(文筆峯)이 자리해 있다. 문필봉은 봉우리 끝이 붓처럼 뾰족하고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험해 보이지 않는 산이다.
경북 구미시와 칠곡군 사이에 위치한 금오산(金烏山.976m)도 문필봉이다. 이 산을 북쪽의 선산 땅에서 보면 붓같이 보여 문필봉이라 하는데 줄여서 필봉(筆峰)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개 구미의 금오산으로 알고 있지만 예전에는 선산의 금오산이라 했다. 선산 땅에서 문인과 같은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것은 위 문필몽의 기운이 작용한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금오산은 고려 때에 불가에서 숭산(崇山) 또는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숭산과 견줄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황해도 해주에는 이 남숭산과 상대되는 이름의 북숭산이 있다.
금오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이 달리 보여 여러 이름이 나왔다.
칠곡군이나 구미시의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높이 977m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산등성이가 마치 하늘을 응시하며 누워 있는 사람의 옆얼굴 모습과도 같다. 그래서 그쪽 지방에선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부른다. 이 거인의 시선이 하늘에 북두칠성을 향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금오산을 옛 인동군 읍내쪽(지금의 구미시 인의동)에서 보면 곡식을 쌓아 놓은 노적가리와도 같아 '노적봉'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지역에선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 여기서는 금오산이 탕건을 쓴 것같이 보여 귀봉(貴峰) 또는 탕건봉(宕巾峯)이라고도 하였다. 이 지방에서 옛날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이 봉우리 덕택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편 이 산을 김천시 개령면쪽에서 보면 무기를 든 도둑처럼 보여 적봉(賊峯)이라고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지방에선 길삼봉(吉三峯) 같은 이름난 도적이 나오기도 했다.
또 도성쪽에서는 이 산이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처럼 보인다고 하여 음봉(陰峯)이라고도 했다. 여기서는 젊은이들이 바람을 많이 피웠다고 전한다.
조선 초의 무학대사는 이 금오산을 보고 임금을 나올 기운이 서려 있다고 했다. 뒤에 인동장씨들이 금오산 기슭의 칠곡군 북삼면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은 것은 이 무학대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동장씨들의 임금 등장의 꿈은 한낱 꿈에 머물러 어느 세대에도 임금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유당 시절의 국무총리가 나왔다. 바로 이곳 출신인 장택상(張澤相) 씨였다.
인동장씨 집안에선 국무총리가 나온 곳에 머물렀지만 이곳 금오산 근처 박씨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출생지가 바로 이곳 금오산 기슭이다. 결국 임금 나올 기운이 서렸다던 무학의 예언은 적중했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생지가 지금 금오산 구역상으로 짚어 보면 구미시 상모동이다. 이곳은 금오산의 동쪽 능선이 완만하게 낙동강 방향으로 뻗어 내리다가 용이 물을 만나 머리를 푹 숙인 듯 급경사를 이룬 그 아래쪽에 펼쳐진 마을이다. 출생지 마을인 상모동 중에서도 ‘웃모로’로 불리는 곳인데, 일단 이 이름은 지금의 말로는 ‘윗머리(우두머리)’에 해당해서 나라의 가장 어른인 대통령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구미시의 한 동으로 들어가 있지만 전에는 선산군 하고면 상모리였다.
영남의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금오산은 수려해서 예부터 일명 소금강으로 불려 왔는데 지금은 경북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산은 예부터 많은 사찰과 암자가 골짜기마다 가득차 있었다. 불교의 번성을 말해 주는 이곳은 승려의 힘으로 왜적을 막던 요새로 이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약사암, 해운사 등의 사찰,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등이 남아 있다.
산 위쪽에 금오산을 울리는 폭포라는 뜻으로 이름붙은 명금폭포(鳴金 瀑布)가 있고 그 오른쪽 절벽 중턱에 도선굴이 있다. 도선굴은 너비 5m 높이 4m의 자연 동굴인데 신라 때의 고승인 도선이 이 산을 찾아와 동굴 속에서 도를 닦았다 하여 도선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금오산(金烏山)’이란 이름은 옛날에 이 산으로 금까마귀가 찾아들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 전설의 금까마귀처럼 이 산에 몰래 찾아든 현인이 있다. 고려 충신 야은 길재(吉再)이다.
야은은 물 좋고 바위 좋은 이 산의 골짜기에 들어와 여생을 마쳤다. 그래서 이 산에는 길재의 얽힌 사연이 깃든 땅이름이나 유적이 많다. 그는 고려 말 공민왕 2년(1353)에 태어나 13년에는 성균관 학정(學正)이 되고 또 박사(博士)에 이르러 공직에서는 국자감의 학생들을, 집에서는 양반 자제들을 공부시켰다. 고려 창왕 1년(1389) 나라에서 문하주서의 뱌슬을 내렸으나 늙은 어머니가 있음을 핑계로 다음 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뒤인 1,400(조선 정조 2년) 전부터 친교가 있던 이방원이 불러 태상박사를 내렸지만 야은은 두 임금을 성길 수 없다 하여 끝내 자리를 지켰다. 그는 자신의 호를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 하고 도학에 힘쓰면서 고향에서 영남 땅의 후진들을 교육하였다. 세상에서는 그의 높은 충절을 기려 도은(陶隱) 대신에 목은, 포은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고 했다.
고려의 멸망은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겨 주었다. 고려를 그리는 그의 간절한 마음은 그가 지은 시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천하 명당으로 임금을 모셔 오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능인 여주의 영릉은, 여주읍내에서 북서쪽으로 3.5㎞쯤 떨어진 곳에 있다. 행정구역상의 위치로는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수목이 울창한 봉미산 품 안 62만5천여 평의 터에 성군(聖君)의 능답게 잘 가꾸어져 있는 이 능은 사적 195호로 정해져 있다.
이 여주 땅 중에서도 영릉이 천하 명당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관심 있는 이들은 이곳의 영릉을 찾아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氣)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한겨울의 영릉은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눈이 쌓여 있는 법이 없는데, 이것은 이곳의 땅기운으로 인해 눈이 녹기 때문이다.
여주에는 북쪽으로 북성산(北城山)이 있고, 동북쪽에는 양평과의 경계에 용문산이, 동쪽으로는 원주와의 경계에 치악산이 있다. 북성산의 맥은 용문산에서 한강을 건너 왔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사실은 남쪽의 속리산에서 뻗어온 것이다. 따라서 북성산의 맥은 영릉쪽으로 와서 뒤편 남한강의 삿갓바위에 부딪쳤다가 북성산을 향해 되돌아보는 셈이 된다. 즉 영릉 일대의 지형은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할 수 있다. 회룡고조형이란 용이 처음 떠났던 곳을 되돌아오는 듯한 형국을 말한다.
풍수가에 따라서는 영릉 일대를 모란꽃이 반쯤 핀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왕릉이 있는 혈과 주위의 산세를 볼 때, 이곳의 형국은 봉황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도 있다. 혈의 좌우에 있는 청룡과 백호는 모두 비단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이라는 것이다. 혈(穴)) 앞의 안산은 혈보다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 너머 조산(祖山)은 바로 이곳의 주산인 북성산이 맡고 있다. 그 형상은 한 마리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고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에 혈 자리는 암컷이고, 조산은 수컷이라고 볼 수 있어 결국 자웅봉황상락형(雌雄鳳凰相樂形)이라는 것이다. 즉 암수 두 봉황이 마주 보고 즐기는 형상이라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본다면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주위의 물 흐름 또한 좋다.
백호가 길게 내려가 청룡을 품은 듯이 수구(水口)를 막고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의 물이 혈의 뒤를 감싸고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명당 안의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반해 외당수인 남한강과 반대로 흘러 명당 안이 습기가 마르는 것을 적절히 조절해 주고 있다.
왕의 거듭된 청에 명당 내 주어
당초 이 영릉은 광주(廣州) 서강(西岡, 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자리)에 있었다.
세종 28년(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이곳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그 우실(右室)은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그러나 세조 이후 영릉이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1)에 다시 옮기자는 주장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명당에는 명당임을 강조하는 신비성이 가미된 일화가 많다. 노사신의 지석(誌石) 일화도 그렇고, 천하명당이라는 이 영릉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영릉은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선산을 빼앗은 곳이어서 풍수지리설의 흥미는 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사실과는 다르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주 인근의 노인들에게 전설처럼 이씨 가문의 묘를 권씨네로, 그것도 이미 쓴 묘가 아니라 이제 막 이장하려는 순간에 빼앗겼다고 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유포가 아닌가 느껴진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릉의 자리는 원래 광주이씨 3세조인 이인손(李仁孫)의 묘소였다. 이인손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우의정에 이르렀던 인물. 그의 부친은 청백리로 유명한 이지직(李之直)이요 그의 조부 또한 고려 말에 절의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집(李集)이다. 이집의 묘소는 경북 영천 칡고개에 있었는데, 후손에 문장가가 나온다는 야자(也字) 형국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정승(이인손)이 나왔다고도 전해지는데, 이인손 또한 이 여주의 명당에 묻혔었다.
그러나 정승 정도로서는 감히 묻힐 수 없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예종 때 세종의 이장 능터를 찾아다니던 일행의 눈에 띄어 이인손이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세종의 능자리를 잡으러 다니던 일행이 이인손의 묘를 보고 돌아와 이렿게 예종에 복명하였다.
“천하 명당이 있기는 하오나, 이미 그 곳엔 이인손이 묻혀 있습니다.”
예종은 이 터가 욕심나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는 이인손의 장남 이극배를 불렀다. 그러나 차마 묘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은 못하고, 애원 비슷하게 이렇게 심중을 토로했다.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 그토록 좋은 명당을 잡아 아버지를 모셨느뇨. 나는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나, 할아버지의 능침을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이 부럽기만 하오.”
왕이 여러 번 같은 말을 거듭하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결국 내주게 되었다. 후손들이 묘를 파자, 그 속에 비기(秘記)가 나왔다. 비기대로 연(鳶)을 띄워서 떨어진 곳에 이장했다. 이 때문에 그 곳의 마을 이름은 연줄의 이름을 따서 ‘연줄이(鳶注里, 현재는 신주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인손의 묘에선 도선(道詵)의 비기가 나왔다고도 하는데, ‘단족대왕(短足大王)이 영원히 눕게 될 자리’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세종대왕은 다리가 하나 짧아 별명이 단족대왕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광주군 대모산(大母山) 남쪽 기슭, 지금의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었던 세종의 능은 예종 원년(1469년) 3월에 이곳 여주로 이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광주이씨가 하도 번성하여 기(氣)를 꺾으려는 계산된 음모로 묘자리를 빼앗았다는 반대설도 전해진다. 어떻든 풍수가들은 그 좋은 명당에 능이 옮겨짐으로써 조선 왕조가 1백년은 더 집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영릉이 위치한 곳은 오래 전부터 ‘왕터’라고 불리던 곳으로, 한자로는 ‘왕대(王垈)’였다. 이 이름이 붙게된 것은 고려 32대 우왕이 이성계에게 쫓겨 머무르다가 태조 3년(1394) 4월에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왕이 죽은 곳’이라는 뜻의 땅이름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붙여진 왕터는 그 후 세상 떠난 세종임금이 이곳에 납심으로써 또 다른 의미의 ‘왕터’가 되었다. 생존한 임금은 아니지만, 세종임금의 납심은 ‘왕터’가 이미 예언 지명이었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땅이름은 처음엔 그 나름대로의 연유로 붙여지지만, 언젠가 뒷날엔 그 이름대로 되어가는 신비성을 지니고 있다.
터 관련 땅이름
터 관련 땅이름은 무척 많다. 텃골(터골)이란 이름이 무척 많은데, 이 이름은 턱골로 땅이름이 변한 것도 많다.
‘~터 ’식으로 ‘터’가 뒤에 들어간 땅이름도 무척 많다. 장터(시장터). 절터, 활터, 싸움터, 묵은터, 구억텨(구석터), 버린터, 너른터,
어학사전에 보면 ‘터’가 ‘건물이나 구조물 따위를 짓거나 조성할 자리’ 또는 ‘일을 이루는 밑바탕’이라고 나오는데, 땅이름에서는 대개 ‘장소’의 의미로 붙여진다. 절터라면 ‘절이 있던 장소’, 장터라면 ‘장이 서는 장소, ’활터라면 ‘활 쏘는 연습을 하는 장소’ ... 이런 식이다.
전국에는 ‘옛터’라는 땅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대개 옛 마을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의 구기동(舊基洞)은 토박이 땅이름이 ‘구텃굴’인데, 이는 ‘옛텃골’의 뜻으로 옛날에 마을이 있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땅이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 성평방의 구텃굴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4년, 가는골(세곡.細谷)을 병합하여 구기리(舊基里)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하였다. 그러다가 광복 후인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구기동이 된 곳이다.
텃골은 턱골로 변하기도 했다. 대개 ‘터(장소)’와 관련지어 이야기하지만 엉뚱하게도 ‘턱’과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턱골’은 이곳 산 언덕이 턱이 져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적은 글도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텃골’이 변한 것이므로 잘못 풀이한 것이다.
‘옛터’나 ‘구터(구기.舊基)나 옛날의 터란 뜻인데, 이를 묵은터나 낡은터 따위로 저속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전북 익산시 팔봉면 덕기리의 ’낡은터‘, 전남 신안군 비금면 구림리의 ’날근터‘, 경남 의령군 칠곡면 산북리의 ’묵은터‘, 전북 남원시 금지면 신월리의 ’헌터‘ 등이 그것인데 이들의 한자 이름은 모두 구기(舊基)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장기동(場基洞)은 장터가 있었던 마을이어서 ‘장터’라고 불렀던 곳이다. 장터라는 땅이름은 전국에 엄청 많다. 대개 읍내에 장이 서므로 읍내장, 읍내장터라고 부르는 곳이 많다. 그러나 이 이름은 땅이름이라기보다 일반 용어로 보는 것이 좋겠다.
‘~터’ 형식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땅이름은 ‘새터’이다. 이 이름은 전국에 무척 많다. 대개 새로 들어선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것이 많다.
1989년 말에 <전국 토박이 땅이름 조사>를 해 보았다. 토박이 땅이름 증 가장 많은 것이 ‘새터’, ‘새텃말’이고 그 다음이 ‘새말’이었다. 새터는 변해서 ‘새탄말’, ‘사탯말’이 된 것도 있었다. 한자로는 대개 신기(新基), 신대(新垈), 신촌(新村)으로 돼 있었다. 왜 이런 이름이 이렇게 많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 수밖에 없었다. 새로 된 마을은 늘 생겨 왔고 또 계속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집이 두서너 채만 되어도 마을이 되니 말이다.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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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말
-터 텃세 장터 옛터 따(땅의 옛말)
* 친척 땅이름
터골 【마을】경북 달성군 하빈면 기곡동
구터. 구기(舊基) 【마을】경북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 .
날근터.구기리(舊基里) 【마을】전남 신안군 비금면 구림리
옛터 【골】경북 예천군 하리면 율곡리 → 옛텃골.
텃골 [기곡] 【마을】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
공터거리 【들】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묵은터 【마을】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