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박 3일의 춘천에서 합숙 훈련을 받고 2005년 말레이시아 캠퍼스 개척단으로 Exciting Evangelism이라는 즉 E2라는 주제를 갖고 7월 3일부터 15일까지 11박 12일 동안 말레이시아를 다녀왔습니다.
말레이시아 가기 전에 저희 부모님께서 제가 교회를 다닌다거나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을 모르시기 때문에 집안에서나 이런저런 일들로 많은 갈등이 있어 망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야합니까 말아야합니까 하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부터 가야겠다는 강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 순간부터 갈등과 걱정보다는 기대감으로 차 있었으며, 선교활동에 조금이라고 관심이 있었기에 갔다오게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는 말레이계 60%, 중국계 31.5%, 인도계 8.6%, 기타 0.7%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레이 계를 제외한 다른 인종들에 대하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자유로운 종교활동이 적용되어 오고 있지만 말레이는 헌법상 반드시 회교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종교의 굴레를 갖고 초등학교 이후의 모든 교육에 이러한 회교교육은 필수로 이수되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교도가 자신의 종교를 바꾸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러한 경우 심각한 법적인 제재와 가족들의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말레이 회교도들의 개종을 종용하고 유도하는 것은 국가 반역죄와 상등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말레이 회교도들과 이곳에 사는 다른 종족들은 이러한 면에서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꺼려합니다.
국가 내부를 관찰하게 되면 각 종족간의 심각한 견제와 불간섭과 특별히 크리스찬을 누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50여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가 있지만, 이들 크리스찬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에 사는 회교도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존권의 문제가 달여 있어 거의 터부시되어 오고 있습니다.
저는 콸라룸프루에 있는 KL한인연합교회에서 보내고 왔습니다.
2박 3일 동안 현지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였는데, 저는 이런 나라들을 보면 테러가 많고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2박3일이라는 몇 일 안되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사회가 많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많이 보여지고 있는데 비록 말은 잘 안 통했어도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정과 내면 속에서는 많은 갈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생활 면에서의 여우로움과 우리들에게 밥은 맛있었는지 아픈곳은 없는지 잠자리는 불편한데 없었는지 하며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그들의 친절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입가에 미소가 끊일지 않았는데 한 가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말 할 수 있었고 밥 먹을 때 기도를 할 수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말하면 큰일나기에 왜 왔냐는 물음에 문화 체험하러왔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파티마라는 아주머니 집에서 저를 포함하여 4명이 지냈는데 숟가락이랑 포크를 주셨지만 그곳 주민들의 생활을 배우기 위해 손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어색하고 쉽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 현지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날 밤에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원주지구 춘천지구 강릉지구 이렇게 3지구에서 80여명의 사람들이 6개의 공연을 준비해 갔었습니다. 저는 꼭두각시를 맡았는데 이 나이에 이것을 하다니 그런 생각이 들기고 하였지만 잊을 수 없는 밤이였으며 공연하는 내내에도 우리의 본 임무를 잊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하루빨리 이곳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전통의상과 두둥을 썼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게 다 현지인 같았습니다. 그곳 분들도 공연을 보여주셨는데 처음에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잘 몰랐었습니다. 나중에 알라에 대한 내용의 공연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안타까울 따름이었고 함께 찬양하는 날을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랍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렇게 말하면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에 마음과 기도로만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우리가 떠날 때 그곳 분들이 우셨는데 그것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하면서 떠나기 싫었습니다.
홈스테이 일정을 마치고 도심 전도 및 대학 방문 및 대학생 교류라는 이름으로 이틀동안 우리나라 서울대랑 비슷하다는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좋다는 um이라는 대학과 넓고 전경이 아름다웠던 upm이라는 대학에서 전도를 가졌습니다. 연습 중에 잡혀가면 나 모른다고 할꺼라고 서운해하지 말라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던 정부장님의 말씀에 조금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깊이 있게 종교이야기는 못하고 리서치로만 끝나기도 하였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현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을 갖고 다음날 조별로 2박 3일동안 시골 outing 및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저희들이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들 스스로 갔다오는 것이라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흥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지역이 있었는데 저희조는 조호루 바루라는 지역에서 껄루앙으로 메르싱으로 서가맛 해서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이슬람 문화 회교도만 빼면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길을 걸으면서 눈뜨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지만 밥을 먹으면서 잠들때까지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체험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또한 많은 강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회교여성사역이라는 강의를 떠올리면 이 말레이시아 땅에는 여자가 살 곳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두둥을 집안 남자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안 쓸 수 있고 외간남자한테는 자기의 모습을 보일 수 없으며 일부다처제라 남자는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으며 집안에서 여자가 잘못하면 집안 식구들이 돌로 쳐죽일 수 있는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믿기지 않았으며 먼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들어와서의 이야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상 상상을 초월한 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있으며 말레이시아 있는 많은 여성들이 핍박받고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말도 조심하고 어디를 가면 그곳에 크리스찬의 흔적을 남겨서도 안되고 십자가 목걸이라던지 옷도 잘 골라서 입어야 할 정도로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호칭까지 바꿔 부르며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해서 갔는데 그곳 분들과 자유롭게 깊이 있는 종교 이야기를 못해서 아쉬운 점이 있지만 언더우드의 조선에 향한 바람처럼 언젠가 말레이시아에서도 모스크가 아닌 교회가 세워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이 더운 날씨에 타국에서 그것도 2주라는 긴 시간동안 어떻게 버티고 잘 하고 올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서는데 돌아오면서 그 시간들이 짧게만 느껴졌으면 잘 갔다왔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또다시 이런 기회가 저한테 주어진다면 망설임 없이 가고 싶으며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성장하다보면 우리 가족들도 언젠가 교회에 나오겠지 하는 바램도 가져보며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소감문을 마치기 전에 여러분께 한가지 부탁 드릴께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 3백명의 사역자들과 3만명의 기도후원자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순종하는 사역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죽어가는 말레이 영혼들을 위해서 매일매일 기도를 못 드려도 1주일에 단 한번만라도 기도해주시 는 한 영혼이 되어달라고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회교도 발전 속도가 우리 기독교보다 4배가 빠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에 있는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비롯하여 5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30만여명의 이슬람 신자가 있다고 하는데 많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와 도와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비롯하여 감사드리며 이상 저의 소감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늘 기도하는 미형이가 되라.ㅋ
아니! 미형이잖아!!!!!!!!!!!!!!!! 왠일이야~ 반가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