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4.19혁명에 불을지핀 금지면 김주열 열사 기념관.........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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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4.19혁명을 불지핀 故 김주열(金朱烈)열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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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유랑자가 찾은곳은 故 김주열(金朱烈) 열사의 기념관이자 묘역 이었다. 사실 유랑자는 김주열
이라는 열사에 대해서 잘 몰랐던게 사실 이었다.
유랑자가 갓태어난 시절의 사건이었고 또한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여 오늘날 이렇게 친일파와 그 잔
재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득세하게 만든 주범인 이승만의 정권하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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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친일잔재, 토착왜구들이 보수우파라는 탈을 쓰고 교회니, 정치니, 또 당을 만들어 패거리가
되
어 대한민국을 유린 하면서 대한민국의 땅에서 기생충(寄生蟲)처럼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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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生)하면서 독립군의 후손들과 순수한 국민들이 낸 혈세를 축내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국민의 한사
람으로써 가슴치며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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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주열 열사 동상은 2018년 4·19 혁명 58주년에 맞춰 열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높이 3m
크기의 동상을 제작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추모공원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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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빨리 토착왜구들인, 친일잔재들의 청산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국민들의 염원(念願)이 신속히 이
루어 지길 바래 보면서....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6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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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로 이루어진 1차 평
화적 시위대가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인 '마산데모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 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는 남성파출소·북마산파출
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을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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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사상자(7명 사망)가 발생했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누
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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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 넷째로 태어나 1956년 금지 동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3년 뒤 1960년 남원 금지 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 ‘마산상고‘에 입학했던 미소년이
한사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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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바로 ‘김주열(金朱烈)!’,이었다, 당시 17세였던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 3.15의거 시위 중 행방불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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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960년 경남 마산 상업고등학교(현용마고)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마산에 왔다가 3월 15일 합격
자 발표를 하루 앞두고 형 김광열과 함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1차 의거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밤 8시 - 10시 사이 마산 시청 부근 남전 마산지점 앞에서 시위도중 최루탄에 맞아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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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 주임 박종표 등 경찰이 월남동 마산세관 앞 바다에 유기해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다. 다음 날 아
침 그의 형이 마산상고 합격증을 대신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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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인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행방불명된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마산 곳곳을 다니며 호소하
면서 마산은 물론 전 국민이 김주열 열사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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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여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들을 찾아 다니가 남편 병세가 악화됐다는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4월 11일 오전 8시 30분 버스로 남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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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사건발생 27일 후다. 그,러나 권 여사가 마산을 떠난 지 3시간 후인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
그의 시체가 창원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채 처참한 변사
체로 떠오른 것이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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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하수인인 경찰들이 3.15의거 현장에서 쓰러진 열사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 버
렸던 것이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 로 독재자의 만행
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마산 시민들에게도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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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참한 주검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고, 마산의 2차 의거가 시
작된 것이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연 3일에 걸친 격렬한 분노는 결국 민중봉기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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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시체를 검시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
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
4월 11일 마산 2차 의거는 부산, 광주등 전국적으로 불을 지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평화
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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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 깡패들이 이 시위대를 급습해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4월 19일 서울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마침내 4·19혁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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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곳 마산을 '4월 혁명발원지'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당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권총
에 의해 죽고, 4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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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이 시신을 빼돌려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하여 고향 땅 남원에 가족 동의 없이
묻은 이후 지금까지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가 4.19민주혁명과 4.11마산민주
항쟁 50주년을 맞아 추모사업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 장례위원회'를 발족해
사후 50년 만인 201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거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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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누나 김경자 씨는 "제 동생 주열이를 50년 전에 황급히 고향 선산에 그냥 매장하게 한 후, 어
느덧 세월이 흘러 50년 만에 범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주신 마산 시민 여러분들에게 눈물겹도록 깊
은 감사를 드린다"며 고개를 떨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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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오랫동안 주열이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늘은 기쁘다"라며 "이 장례에 참여해 주
신 모든 분들과 주열이를 잊지 않고 지금도 이렇게 애틋하게 생각해 주시는 국민여러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고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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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 김주열 열사의 묘는 고향 남원과 서울 국립4.19민주묘지, 마산 국립3.15민주묘지 등 3곳이
있으며 이중 실묘는 고향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선산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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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원 광장, 한쪽에 자리 잡은 추모각(追慕閣)과 기념관 태극문양 입구가 인상적이다. 유랑자는
이 문을 따라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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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대사, 그리고 '민주주의'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남원 출신으로 불과, 17세의 나
이로 당시 부정선거라는 불의에 항거하다. 최루탄에 맞아 제대로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산화한 그 이
름 ‘김주열’ 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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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죽음으로 시발점이 된 4.19혁명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생
각해 본다. 결국은 유신 독재가 또 들어서긴 했지만....
내.
가 태어나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때의 일이지만, 그분의 희생으로 인해 유랑자는 지금 대가(代價)
없이 민주주의를 아무렇지 않게 누리며,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고 있지는 않나 생각 하면서 무거운 발
걸음을 그의 생가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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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주열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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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여행기 이어보기 클릭
http://cafe.daum.net/b2345/9toB/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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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산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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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열사의 기념관을 엄숙한 마음으로
돌아 보았네요. 어린 나이에 민주화란 이름으로
일찍 꽃이되어 떨어진 열사의 희생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이겠지요, 그런데도 아직도 정신 못차린 토착왜구들이 많습니다.
어제 현대사를 그린 도시의 얼굴들이라는 연극을 보고와서 그런지 게시글이 더 와닿네요
ㅎㅎ 그러시군요.
이런한 분들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다.
이렇게 생각 합니다. 제아무리 일본놈들과 토착왜구들이
우리의 민주화와 개혁의 길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