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안자)는
춘추시대의 제(濟) 나라 경공(景公= 제후, 왕) 때의
명재상(名宰相)으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긴 하나 공자보다 나이가 많아 (아버지뻘)
공자에게 깍듯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
그러나
안자(안영)은 공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눈(가치기준)이 그와 달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 출신인
공자가 유세차 제나라 경공을 찾아오자
경공(왕)은
당시
유교계의 큰 인물로 이름난 그의 내방을 기뻐한 나머지
네기 지방의 대부(大夫)로 봉하려 했으나
안자는
단호하게 반대하며 그 불가한 까닭을 조목조목 따져
왕(경공)에게 말했다.
첫째
공자의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불가합나다.
한번 타고난 천명은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숙명론으로
귀착하며
숙명을 운위하는
세상에선 사람들이 그에 의탁하여 일을 게을리하므로
근검 역행의 기풍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둘째
공자의
예의 중시가 불가합니다.
예의란
형식이며 형식은 실질을 담는 그릇인데 실질보다
형식을 따지는 것은 본말 전도이며
그래선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내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번문욕례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셋째
공자의
후장(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것) 중시가
불가합니다.
장례는
형편에 맞게 치러야 하는데도 그의 주장대로
후장 풍습이 생겨나면
과도한 치상(治喪) 비용으로
가계가 파탄하고 복상기간이 길어 생업에 지장을 주니 그래선
백성이 가난해 지고 국력도 따라서 허약해 진다는것이다.
안자는
이처럼 백성의 利用厚生)을 앞세운
실용 주의자였다.
백성을 그토록
존중하는 정책을 폈던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대단히 인색했다.
그는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탈속 미(현미)로 지은 밥을
먹고 채식을 했다.
탈속미(脫粟米)는
벼의 겉껍질인 왕겨만 벗겨낸 쌀로 지금에
현미에 해당한다.
안자가
탈속미를 먹은 것은 쌀을 백미(白米)가 되게 찧을 경우
부수러지는 쌀의 허실을 아끼느라고 현미를 먹었고
가축(家畜)일
지언정 함부로 살생하지 못하게 막느라고
채식을 했다고 한다.
경공(왕)이
재상인 안자가 실림이 궁색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식읍을
넓혀 주려고 했으나
안자는
거절했고 정승의 집이 비좁다는 걸 알고 큰 저택을
지어주려 했으나
역시 거절했으며
정승의 거마가 초라한 것을 보고 하려 한 거마(車馬)를
내주려 했으나 또한 거절했다.
그는 물건을
얼마나 아 겼던지 여웉철 갓옷이 호구 단 한 벌로
서른 해의 겨울을 지냈다.
이를 두고
공자의 제자 유약이 "호구 하나로 30년이라니 안자가
어찌 예를 안다고 하랴" 라고 비아냥 그렸다.
유약의 생각인즉
30년 동안이나 입어 누더기가 다 된 옷을 걸치고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려니와
바로 거기에
체면치레하려는 유가와 남의 이목에 구애하지 않고 물건이란
아껴야 한다는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안자의 다름이 있었다.
안자가 굳이
그런 생활을 한 것은 그의 성품이 검소한 탓이기도 하지만
사물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삶의
바탕인 자연을 덜 훼손하는 요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훗날 묵적이란
사람이"안 자야 말로 道를 알았던 사람이다"라고
탄복했지만
유가(儒家)을
호되게 비판한 묵가의 숙명론 부정과 검약 사상은
그 연원이 그 안 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
제나라 대부 양 거구가 물었다.
<그대는
세 임금이나 섬겼고 임금마다 심사(心思)가 다를 터인데도
그대는 거기에 순응했소
신하라고 해서
임금의 마음을 쫓아 자기 마음을 바꿔도
되는 겁니까?>
안 자는 대답하기를
<신하는
한마음을 지녀야만 세 임금이 아니라 백이 모금도 섬길 수 있지 두마음
지녀선 한 임금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안영(안자)이
난세 속에서도 오래 살아 영공, 장공, 경공의
세 임금을 섬겼던 이유이다.
장공을 시해한 최저가
대신들을 불러들여 그의 달여가 되도록 강박했을 때 거의
모든 대신이 승복했으나 않자만 은 당당히 그를 성토했다.
최저는 그런 안 자를
죽이려 했으나 충신을 죽여선 안된다는 그의 수하들의
말을 듣고 추방하기만 했다.
원래 최저는
장공을 옹립한 권신이었으나 장공이 그의 후처인 당간을 겁간하자
반역을 저질렀던 것이다.
최저는 미구에
멸문지화를 당했고 경공은 안 자를 불러
재상으로 임명했다.
안자는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경공을 온갖 말로 간(諫) 하여 임금 다운 임금이 되게 했으므로
경공은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이라면 다 들어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임금이 자청해서 주는 것까지도 고사하는
절개를 보였다.
그가
초나라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다.
초나라 영왕은
승벽(지기 싫어하는 기질, 괴벽 습관)이 있어 명성이 높았던
안자의 기를 초장에 꺾도록 하라고 신하들에게 분부했다.
한 대신이
안자의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도성 정문 곁에 다섯 자쯤 되는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자는 이를 꾸짖어
"초나라가 개의 나라라면 그럴 수 있으나 사람의 나랏일 진 데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들어가게 하라"
안자를 욕보이려다
되레 욕먹은 꼴이 된 초나라 군신은 다른 조롱거리를
준비했다.
안자가 초나라
왕을 배알하는 전각아래로 한죄수를 끌고 가게 하고
초왕으로 하여금 압송하는 옥리에게 짐짓 묻게 했다.
" 그 죄인은 무슨 죄를 지었느냐?"
"절도죄를 지었나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고?"
"제나라 사람이나이다."
초나라 왕은
안자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오?"
안자가 대답했다.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을 할 줄 모르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이 되었다면
초나라 풍토가 사람을 도둑으로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회수 이남(강남)에
심은 귤 나무를 회수 이북(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되는 이치와
진배없는 일이 줄 압니다"
남쪽 귤 나무를
북쪽에 옮기면 탱자나무가 된다는<귤화위지>란
고사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안자(안영)은
중국 제나라의 정치가로 시호 평중(平仲). 통칭
안자(晏子)라고 한다.
제나라의
영(靈)·장(莊)·경(景)의 3대를 섬기면서 근면한 정치가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고, 관중(管仲)과 비견되는 훌륭한 재상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난
독서가였으며, 합리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고 한다.
《안자춘추(晏子春秋)》는
그의 저서로 전해지나 후세에 편찬된 것이다.
동양 5성의 하나이다.
[출처] 재상 안자(안영)|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