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피난 간 아이
수원세류국민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미야모토(宮本)선생이었는데 검도(劍道)를 하셨던 50대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쯤 아버지는 목수 일을 잘 하셔서 일본인 청부업자 아오끼(淸木)의 신임을 얻어 강원도를 비롯하여 각지의 신사(神社)건축 하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경쟁자였던 이은무(李殷武)라는 사람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아버지를 관청에 허위 고발하여 일본으로 징용(徵用)을 가도록 일을 꾸몄다. 아버지는 징용영장을 받게 되자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집을 팔아 고향으로 이사를 가셨다. 이때가 1944년 일제가 망해가던 가을이었다. 하늘엔 미국비행기 B29가 꼬리에서 분무(噴舞)선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이때도 나는 늑막염이 재발하여 시골학교도 못 다니고 학일리 고초고을에 살면서 일 년을 지낸 후에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다시 수원으로 나오게 되었다. 늑막염은 수원으로 나와서 오주부에게 약닭을 지어먹고 나았다. 여기서 잠깐 일제강점기 고향에서의 우리 집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1944년 초가을 시골집에서 마을 할머니, 아주머니들을 따라서 쌍령산으로 바구니를 옆에 끼고 올랐다. 비온 뒤 국수버섯을 따려고 간 것이다. 얼마나 헤맸을까? 산에서 점심을 먹고 한참 버섯을 따서 바구니에 넣었는데 거의 한 바구니가 찰 무렵 발을 헛디뎌 국수버섯 바구니가 떽떼굴떽떼굴 굴러 내려가며 버섯이 쏟아졌다. 간신히 내려가 나뭇가지에 걸린 바구니를 내려서 다시 국수버섯을 주어 담아 내려왔다. 산 속에 있는 버섯도 아무나 따는 것이 아닌 것이었다. 이 해 가을에도 어머니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도토리를 주우러 쌍령산에 갔다. 상수리나무 군락지를 며칠 다니시더니 한가마니 넘게 주어 와서 껍질을 까내고 물에 불려서 맷돌에 갈아 도토리묵을 쑤셨는데 자백이로 몇 자백인지 모른다. 달밤에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카바이트[간드레] 불을 왼손에 들고 바른 손에는 작살을 움켜잡고 계곡을 더듬어 올라가며 큰 돌덩이를 함마로 두들기고 돌을 옮기면 더러 큰 민물뱀장어가 나왔는데 작살로 찍어 잡아다가 석쇠 위에 올려놓고 구워먹곤 하였다. 낮에도 계곡을 따라가며 가재를 잡기도 하였다. 밤에는 반딧불이가 어둠에 수를 놓곤 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악랄하게 한국의 미곡을 공출(供出)로 빼앗고 젊은이는 전쟁터로 끌어가고 하는 와중에 나의 8촌 형님의 아들 오광근(吳光根) 씨가 히로시마에 끌려가 원폭피해자가 되어 8.15 광복을 맞아 살아 돌아왔다. 한국의 농민은 순수하였고 농촌의 자연환경은 맑고 깨끗하였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고향살이는 그러하였다. 고향이란 사람마다 자기가 출생한 곳이라고 알고 있으나, 나의 고향은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 선조들의 뼈가 묻힌 나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나는 수원에서 출생하였지만 누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학일리라고 대답한다.
*수원으로 돌아와서
1945년 8월15일 일제 강점기로부터 한국이 광복된 후, 아버지가 수원으로 돌아와서 먼저 찾은 집은 목공장을 경영하는 일본인 미키다(石田) 집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미키다(石田) 집에서 줄곧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으로 쫓겨 가는 일본인 미키다(石田)씨에게 무사히 귀국하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패망한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테러를 염려하던 처지였는데,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이 있으나, 아버지는 차라리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신념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 전에도 미키다(石田)는 우리 집에서 고추장을 꽤나 얻어먹은 집이다. 어머니가 담근 고추장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자주 고추장을 달라고 하니까 어머니는 귀찮아서 나중에는 고추장이 떨어졌다고 하고 주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집과 미키다(石田)네 집과는 정(情)이 들었다. 그래서 미키다(石田)는 자기 집을 아버지에게 거저 주고 일본으로 갔다. 덕분에 우리는 목공장도 얻고 살림집 걱정도 덜게 되었다. 이때가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내 나이 열 두 살이었다. 나는 다시 세류국민학교에 복학을 했고 5, 6학년을 다니면서 한글을 새로 배웠는데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라는 식으로 배웠다. 받침 글은 ‘각 간 갈 감 갑 갓 강’ 이라는 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의 노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고 우리는 언니뒤를 따르렵니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샘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수원세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수원농림중학교에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을 먹었다. 사촌형이 서울에 있는 성남중학교에 다녔는데 앞으로는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서울시 수송동에 있는 {조선전기공업학교}에 시험을 보라고 해서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6.25가 터지기 직전까지 4년간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통학하였다. 열 네 살 되던 해 봄에 조선전기공업학교(6년제)에 입학하였는데 조선전기에 같이 다니던 친구로는 수원신풍국민학교를 나온 곽성근(한국공군대령으로 제대, 대한항공 연수원 교수 역임) 형이 있고 고(故) 최규동(崔奎東)선생님이 조선전기공업학교와 함께 설립한 중동중학교에 병점에서 기차 통학하던 엄태영(한국 농촌 개발 연구소 이사) 형이 있다. 엄태영 형은 나와 [한국수리시설의 변천과 문화유산]이라는 농림부 과제를 맡아 같이 연구해온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조선전기공업 2학년 때 1948년 가을, 학교에서는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그 때 개성의 송악산도 보았고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 포은 정몽주 선생이 돌아가신 선죽교도 돌아보았다. 당시 개성은 북위 38º선 이남이었다. 그래서 개성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吉再선생의 詩>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吉再-
*잃어버린 짝사랑
바야흐로 때는 조선전기공업학교(6년제) 4학년 봄인가 한다. 수원에서 서울로 기차통학 할 때 눈에 띄는 내 또래의 한 여학생이 있었다. 배화여자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영화배우 최은희와 흡사한 외모를 지녔고 볼수록 아름다웠다. 당시에는 모든 중학교가 6년제이므로 지금 같으면 고1학생이다. 나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성(姓)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 마음이사로잡혔다. 하루는 귀갓길 저녁에 서울역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따라 천안행 열차에 승차하였다. 나는 먼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차가 수원역에 도착하자 그녀를 따라 하차하여 뒤를 밟기 시작하였다. 나의 집 교동을 지나서 그녀가 가는대로 따라 잡았다. 수원시 중동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수원천(水原川) 지동교를 지나 큰길가 한옥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웬 아저씨 한 분이 나와 나를 맞으셨다. “누구요” “아, 저는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인데 이 댁의 배화여중 다니는 여학생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아 그러신가, 사랑방이 누추하나 들어가 잠깐 기다리시게”하고 들어가더니 잠시 뒤에 옷을 정장하고서 사랑방에 드시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자네는 어디에 살며 용건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리고 나서 “실례하옵니다만 배화여학생과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나 말인가, 자네가 말하는 여학생 오라비일세”
나는 다시“그러십니까? 저는 교동에 사는 오두영이라 하옵고 서울에 있는 조선전기공업학교 4학년생이올습니다. 저는 이 댁 여학생을 사모하여 그녀의 부모님께 저를 장래의 사위로 받아주시고 이 댁 여학생과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 청하려고요” 하니 그녀의 오라버니는 말씀하신다. “내 누이동생을 그리도 잘 보아주었다니 고맙네.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공부중이 아닌가. 자네도 아직 중학생이고 하니 중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둘 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 성년이 되었을 때 만나보는 것이 좋겠네. 어떤가? 내 말에 잘못이 있는가? 그 때엔 쾌히 승낙할 것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나중을 기약하시겠는가?”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단 시간상의 문제일 뿐 둘이 교제해도 좋다는 승낙으로 알고 다시 일어나 큰 절을 드리고 “감사합니다. 승낙하신 것으로 알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대학 들어간 연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하고 흥분되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감과 반승낙을 받은 것이라는 기쁨과 미래의 신부 감을 얻어놓았다는 기대 속에 잠을 못 이루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서로간의 공부를 위하여 그녀를 아끼고 나 자신도 채찍질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보냈다. 그러나 누가 예측이나 하였으랴. 6.25 남북전쟁으로 말미암아 두 집안이 피난길에 올라서 그 이후로는 영영 만나보지 못하고 지금 내 나이 80이 되었다. 6.25가 사랑을 잃게 만들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뜻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그녀의 오빠 되시는 분의 점잖은 태도와 사춘기 젊은이의 희망을 꺾지 않으면서도 올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 그분의 현명하심에 새삼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프로에 신청하면 80전후의 그녀를 찾아주겠는지. 학교이름과 집 주소지를 가지고 배화여고에 가면 수원에서 다니던 그 여학생이 누구며 지금은 어디 사는지, 혹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있으련만 방송국에서는 이름 있는 연예인의 사랑을 찾아줄 뿐 6.25라는 이름의 비극으로 인한 짝사랑을 찾아주기나 하겠는가? 또 아내와 60년을 함께 살아 왔는데 지금 다시 그녀를 찾아 만난다 해도 어찌할 것인가?
*6.25 피난길 다시 고향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꼭두새벽 4시에 일제히 남침을 감행하였다. 한국군은 이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 외출 나가고 부대 내에는 소수 병력만 남아있었다. 북한군은 탱크 수백 대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침하였다. 6월 26일은 문산, 파주, 철원, 포천으로 물밀듯이 내려오는데 6월 27일 나는 학교에 등교하였다. 조금 있자니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이라 하고 비상시국임을 알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서울역으로 내려왔다. 서울역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역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걷기로 하였다. 용산을 지나 노량진역에 가보니 화물차 마다 피난민이 산처럼 올라 타고 앉아 있었다. 다시 영등포역으로 내려가니 영등포 구내에 소형폭탄이 터졌다. 인민군 비행기에서 소형폭탄을 내려 쏟은 것이다. 다시 시흥역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나는 덮게 없는 화물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수원역에 닿으니 저녁 8시쯤 되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 날 저녁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모님은 피난 준비에 바빴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이튿날 6월 28일 새벽에 용인 고향으로 향했다. 수원시 교동에서 권선리로 하여 서그네(書川里)로 접어들어 바사리고개를 넘어서 하루 종일 걸어서 해질 무렵에 고향에 닿았다. 이날 아침 서울은 벌써 단장의 미아리고개 너머로 인민군이 들이닥쳐 함락되었다. 우리 식구는 작은아버지 오철선(吳撤善)씨 집에 들었다.
*동족상잔(同族相殘)
고향마을에도 분단의 잔혹함은 극에 달했다. 인민군이 득세하여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인민군 치하의 고향도 그야말로 거꾸로 바뀐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 천덕꾸러기 머슴 하던 사람들이 노동청년동맹 간부가 되었고 인민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군인, 경찰, 군청 읍면에 다니던 면 직원을 수색하여 잡아다가 안골 금광구덩이에서무차별 사격하고 몰살시켰다. 경찰가족, 국군가족이 수난을 당하였다. 경찰가족과 군인가족은 일찌감치 피난하였는데, 돌꽂이(石花里)에서는 한의사 안광현 씨의 아들이 경찰인데 미쳐 피난가지 못해 잡혀갔다. 안골 금광구덩이 앞에 세어놓고 따발총으로 갈길 때 그는 먼저 굴속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지고 이틀 만에 나무꾼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는 다시 군에 입대하여 북한괴뢰군을 무찌르다 전사해서 시신은 유골로 돌아와 고향에 묻혔다고 한다. |
첫댓글 첫사랑이 퍽 고풍스럽습니다. 당사자를 제켜두고 그집 대문을 두드리셨다니.
내 가슴 속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강물에 조약돌처럼 던져 버린 첫사랑이 있다.
신석정 선생의 아름다운 시가 문득 생각납니다.
저는 다분히 조선시대 사람 같습니다.이왕에 그 여학생 뒤를 따라가서 그녀의 집을 알았으니까
부모님에 허락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그녀의 대문을 두드렸습지요...ㅎㅎ..^^*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같아라 교산선생님의 자전적 이야기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게 이어지길 바라며
글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접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 만같습니다. 세월은 훌쩍 80년이 흘러갔는데....
만년에 시인화가님을 만났군요.
아픈 현대사와 교산 오시인님의 삶을 오버랩하며 감상합니다. 읽을수록 빠져들게 합니다. 후편을 기다립니다.
청향님~~! 글을 쓰는데 까지 써서 200쪽 내외의 문집을 내려합니다.
자서전 글이 모자라면 내 시선집을 첨부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의 삶은, 굴곡진 우리네 역사의 한 page를 제대로 관통하시고 계시네요. 그리고,
집을 알아내시고 대문까지 두드리신 용기는 정말 대단하셨던것 같습니다^^. 저도 후편 기대됩니다~
그녀의 뛰를 따라가서 그녀의 집을 알았으니만큼
그녀의 부모님께 내사람으로 규수를 달라고 승락을 받고자 했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