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정전(便殿:사무공간)내부 御座(중앙)와 日月五峰圖(뒷편)
옛 궁궐을 찾아서2..창덕궁 인정전ㆍ낙선재 그리고 운니동 운현궁
2014.3.25.화요일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을 이용해 창덕궁과 후원을 둘러 보기로 한날이다.
홈에서 지하철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도 옛궁궐은 시선을 두지 않아
찾아 가 본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면 기억이 별로 나질 않았다.
아마도 40년넘게 잊고 살았던 곳이기도 했는데 이번에 참 잘 다녀왔다.
해설가의 위트있는 명쾌한 해설을 들으며
약 1시간정도 후원관람을 마치고 이어서 창덕궁 인정전의 자유로운 관람이다.
인정문(仁政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가운데문은 좌.우보다 조금 더 크다.
왕이 드나드는 문이며 동쪽문은 문관이 서쪽문은 무관들이 드나들었다.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이다
창덕궁의 正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정면 5간, 측면 4간 해서 20간 바탕에
팔작지붕이 두 층으로 되어 높이도 우뚝 높다.
다포식에 용마루 양끝에 鷲頭(취두-망새기와)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龍頭를 놓고 추녀마루끝에는 雜像을 아홉 개씩 놓았다.
겉에서 보기에는 지붕이 2층이지만 속은 한 층으로 터져 있어 넓고도 높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조정(朝廷)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넓은 마당,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朝',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朝廷을 말한다.
정일품~정구품 관원들이 자기 품계에 따라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이
도열하도록 표시해주는 品階石이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조회만이 아니라 큰 잔치나 마지막 단계의 과거 시험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적 공식 행사를 치렀다.
용상(龍床)
왕이 앉는 용상 뒤에는 日月五峰圖이라고 하는 해와 달이 떠 있고
다섯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바위와 소나무, 물결이 그려진 屛風이 있다.
해와 달은 음양을 뜻하며 다섯 봉우리는 우리나라의 오봉을 가리킨다.
그 위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닫집(寶蓋)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 천장에는
목각으로 만든 두 마리의 봉황새가 날고 있다.
모두 왕을 상징하는 것들이요, 왕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드므
방화수(防火水)를 담는 용기로서,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큼
*아래글은 네이버 지식백과 - 창덕궁의 청와대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에서
1479년 6월 2일.날이 밝자마자, 성종은 정승급 고위 관료들을 선정전으로 긴급 소집한다.
왕비를 폐출시키자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날 왕비가 폐출돼 사제로 돌아가니, 이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다.
이 날의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궁궐은 단지 왕과 왕비가
사는 집이 아니다. 창덕궁에는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고 기록되던,
조선판 청와대가 있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그 동쪽을 보면,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푸른색 기와를 얹은 건물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선정전이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의 공식집무실이다.
인정전이 주로 의식을 치르는 ‘상징적 공간’이라면,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실질적 정치를 펼치던 곳이다. 왕과 신하들이 앉아서 정사를 논할 수 있도록,
선정전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왕이 중앙에 자리하고 양쪽으로 문무 대신들이
줄지어 앉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내린다.
연산군조의 비극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 하나하나는 예문관에서
파견된 사관과 승정원에서 파견된 주서에 의해 빠짐없이 기록됐다. 전세계 유례가
없는 왕실의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선정전이 ‘공적 정치공간’이라면 선정전 동쪽에 자리한 희정당은
왕의 ‘사적 정치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이 먹고 자고 쉬던 곳. 공적인 장소에서
나눌 수 없는 이야기나 은밀히 만나야 할 인물이 있을 때, 왕은 희정당을 사용했다.
가장 많은 정책 결정이 내려진 곳이요,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 중 하나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가 머물렀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이렇듯 공적 사적으로 만나며 활발한 정치를 펼 칠 수
있었던 것은 왕 가장 가까운 곳에 해당 관청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정전 동남쪽에 자리한 빈청은 왕을 만나기 전후, 고위 관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던 곳이다.이른바 언관들이 모여 왕에게 옳고 그름을 아뢰고자 대기하던 대청,
그리고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역시 인정전과 선정전 가까이 자리했다.
언관들의 회의실인 대청이 있던 자리다. 왕이 바른 정치를 펴도록, 때로는 목숨을
걸고 ‘전하,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던, 조선의 언로가 살아있던 현장이다.
옛 자리에 흔적만 남은 빈청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원들 가운데 가장 고위관리들의
공간이었다. 이 외에도 이 일대에는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정청, 그리고 내시들의
관서인 내반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인정전 서쪽 역시 많은 관청들로 빼곡하다. 의정부와 육조 등 주요 행정관청들이
궐밖에 있다하여 궐외각사라 불린데 반해, 이렇듯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기 위해
궁궐내 자리한 관청을 궐내 각사라 한다. 서쪽 궐내각사의 대표적인 곳으로는,
왕의 말이나 명령을 기록하는 관청으로 사관이 소속돼 있던 예문관과 왕의
자문기관으로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들과 함께 언관으로 활동하며 활발한 언로를
열었던 홍문관 등이 있다.
선정전과 희정당, 그리고 궐내각사를 잇는요동치는 정치의 현장. 그 하나하나는
낱낱이 기록되어 <조선왕조 실록>이라는,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남았다.
조선의 건국시조인 태조에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왕, 472년에 걸친 기록.
창덕궁에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던, 조선판 청와대가 있었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이다.
이처럼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선정전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지금의 선정전(宣政殿)은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사관이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했으며 이를 사초(史草)라고 한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며 473년간의 분량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선정전과 희정당에서 수시로 신하들과 만나 정치를 논하고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해당 관청들 즉
‘궐내각사’를 두었다. 조선 왕조 500년의 무대가 되었던 요동치는
정치의 현장, 조선시대판 청와대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선정전(宣政殿)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便殿(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세조 7년(1461)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선정전으로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지붕은 서울 궁궐에 남아 있는 건물로서는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이다.
뒷편의 희정당으로 편전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보물 제814호로 특이하게 복도각(複道閣)이 있어
선정전 扁額(편액)이 복도각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희정당 내부 양식 탁자
희정당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창덕궁 희정당 앞 행각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815호
왕이 먹고 자고 쉬고 또 일상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는 왕의 침소를
燕居之所라고 하는데 이 연고지소가 바로 희정당이다. 서울 한양은
나라의 중심이며 그 한양의 중심은 궁궐이다. 이 궁궐의 중심은 창덕궁,
창덕궁의 중심은 근정전과 희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국보 제249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가로 576cm, 세로 273cm, 16폭의 비단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모두 활용하여 1826~1830년사이에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림)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1917년 대조전에서 일어난 불이 희정전을 태워 순종이 낙선재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1920년에 복구가 완료됨. 이 때 일본인이 복구공사를
맡으면서 희정전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경복궁의 康寧殿의 목재를 옮겨 지은 것이다.
대조전(大造殿),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왕비의 侍御所,즉 寢殿이다.
왕비는 궁궐에서 활동하는 여자들, 內命婦라는 체재로 편제되어 있던
후궁과 궁녀들을 治理하는 공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공인이다.
그래서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곳 九重宮闕 깊은 곳,
中殿, 中宮殿이다. 1917년 불이 나서 모두 타 없어진 뒤에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다.
그 이유는 왕은 용으로 상징되는데 용이 깃드는 집에 또 용-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하므로 용마루를 만들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대조전의 대조란 크게 만든다는 뜻이다.
즉 왕자, 다음 대의 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곧 왕과 왕비가 동침하여 아기를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경복궁의 교태전의 태는 주역의 '泰' 괘로서 음과 양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남녀가 화합하는 상이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던 온돌방
이 온돌방의 내부가 다시 우물 정(井)자로 칸막이가 되어 아홉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는데 왕과 왕비는 가장 가운데 방을 쓰고
그 주위의 여덟 개 방에는 궁녀들이 두명씩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부 형태가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 뒤뜰에 있는 굴뚝
온돌로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 건물에서는 굴뚝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러한 굴뚝을 집에 붙여 짓지 않고, 땅밑으로 연기를 내어 후원 으로 뽑아
내었다.
연기가 잘 나가게 하고 미관을 해치지 않게 굴뚝을 세우고 그 면마다
돌아가며 十長生, 四君子, 鬼面이나 鳳凰 등의 辟邪像을 박아 넣었다.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 지붕
후원으로 나가는 문
궐내각사(闕內各司),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은 다른 이름으로 內閣 또는 이문원(摛文院)이라고도 한다.
정조 즉위초에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 처음에는 후원에 2층 누각으로 지었으나(규장각,宙合樓)
너무 후미져서 불편하여 1781년(정조5)에 이곳으로 옮겼다.
서얼출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정약용, 이서구등 초계문신들을
활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쳤던 곳이다.
규장각의 서고인 冊庫
내의원의 약방
네 이름이 뭐니? 말해 주렴.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뜰에서 만난 하얀 봄꽃이다.
낙선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승화루(承華樓)
승화루는 본래 정조가 첫아들이었던 문효세자를 위해 세웠던
중희당에 딸린 건물이었다. 그러나 중희당은 사라지고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란 이름으로 바뀌어 남아 있다.
낙선재 후원 일대
올해 4월1일부터 금단의 구역이었던 창덕궁 낙선재 뒤뜰이 개방되었다.
낙선재뜰로 들면서 만난 풍경같은 외국인의 모습
사진 오른쪽에 위치한 장락문으로 든다.
'길이 길이 즐긴다는 문', 장락문의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썼다
현판에 '大院君章'이라는 落款이 새겨져 있다.
솟을 대문 너머 멀리 육각형정자인
상량정(上凉亭)의 편액이 걸려있는 平遠樓가 보인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는 조선 24대왕 憲宗의 사랑채이다.
헌종은 그의 어머니 神貞王后 趙氏의 평가대로 책을 좋아해서 서첩 등 진귀한
서적들을 이 낙선재에 가득했다고 한다.
낙선재의 현판도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고,
평원루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글씨이다.
이 낙선재에서 英親王 李 垠의 비 李方子여사가 1989년 까지 생활하였다
보소당(寶蘇堂)
창덕궁 보소당(寶蘇堂)은 낙선재의 동쪽에 걸린 편액이며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란 뜻이고 낙선재를 건립한 헌종의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청나라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이 소동파(蘇東坡)를 사모하여
보소재(寶蘇齋)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옹방강과 최초로 만난 조선 문인은
박제가로 이 관계는 박제가의 제자인 김정희로 이어졌으며
추사 김정희 또한 같은 당호를 썼다.
낙선재의 내부
낙선재 안에서 본 솟을대문 장락문과 행랑방
석복헌(錫福軒)
헌종이 총애하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
순종의 비 純貞孝皇后 尹氏가 1966년까지 생활하였다
수강재(壽康齋)
헌종의 대왕대비 23대 순조의 비인 順元王后 金氏를 위한 처소였다.
낙선재의 외부모습, 우물이 보인다
참고로 건물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 명칭을 다음과 같다
殿- 堂- 閤- 閣- 齋- 軒- 樓- 亭
낙선재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앞다투어 핀 봄꽃들을 만난다.
창덕궁 회화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창덕궁 정문을 나와 출출한 속부터
채우기 위해 주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후 1일 마지막 일정으로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운현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운현궁은 지하철 3호성 안국역에서 4번출구로 나와 50m거리에 위치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12세에 즉위한 어린 고종을 대신해 10여 년간
섭정을 하면서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서원철폐, 법률제도 확립 등을 통해
조선 말기의 흐트러진 정치를 일신했으나, 쇄국정책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과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서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것은 국운을 기울게 만든 과오로 꼽히고 있다.
운현궁의 중심 건물인 노락당은 고종과 명성왕후가 가례를 치른 곳이고,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거처한 곳으로 섭정 당시 국가의 주요정책을 논의한 곳이며,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채다. 매주 월요일 휴궁.
수직사(守直舍)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의 건물이다.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군복을 입은 경비병 모형을 전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이곳에서 인사정책·중앙관제복구·서원철폐·복식개혁 등 나라의 주요 정책들이
논의되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납치됐다 환국한 후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하고, 임종을 맞은 곳도 이 건물이다.
1994년 5월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노안당(老安堂)의 당호는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글귀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다는 의미이다.
몸채가 정면 6칸·측면 3칸 규모인 ‘T’자형 구조로, 4칸의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이어진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李昰應은 친척인 秋史 金正喜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墨蘭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평상시 복식인
원정관(圓程冠)에 도포(道袍)를 착용하고 추사의 글로 만든 병풍앞에서
묵란을 그리고 있다
봉사식(奉嗣式)
고종의 봉사식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고종은 복건(幅巾)에 청도포(靑道袍)를 입고 백사대(白紗帶)를 착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흑단령(黑團領)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朝服)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靑團領)을 착용하였다
사진 설명
1.김좌근의 조복,2.민치상의 청단령,3.흥선대원군의 흑단령,4.고종의 청도포
破邪政令似光風
(파사정령사광풍 : 간사함을 없애는 정령은 밝은 바람과 같고)
顯正經綸如霽月
(현정경륜여제월 : 바르게 나타나는 경륜은 비개인 맑은 달과 같다)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짓게 한 노락당기(老樂堂記)에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안 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몸채는 정면 10칸·측면 3칸이고 건물 왼쪽으로 1칸,
오른쪽으로 2칸이 더 있으며 남쪽의 행각과도 연결된다.
운현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을 때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다고 하며, 잔치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삼간택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으로 전해진다.
사진 설명
1.명성왕후의 연두색 당의,2.부대부인의 송회색 마고자,
3.세자의 사규상,오방장 두루마기, 4.이준용의 전복,오방장 두루마기
사진 설명
1.상궁의 청녹색 당의,2.부대부인의 분홍색 당의,
3.철종비의 연보라색 당의, 4.조대비의 황금색 당의
경송비(慶松碑)
경사스런 소나무를 기념했던 비석이다.
뒷면 글씨의 일부이다.
1864년 영의정 조두순(조두순)이 지문을 쓰고 김병기(金炳冀)가 썼다.
조두순의 글에서
'운대(雲臺)의 남쪽은 언덕으로 높이 솟아 있는데, 이곳은 고종이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그 정원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었는데
심히 울창하게 번성하여 그 그늘만 10여무(畝)가 될 정도였다.
고종이 1864년 9월 이곳에 잠시 들렸는데 그 소나무를 보고
"내가 놀고 쉬고 오르던 옛 모습 그대로구나" 하고 소나무에게
2품을 내려주고 아꼈다'고 한다.
태극무늬 홍살문
하룻동안의 관광동선을 그려본다.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연경당▶인정전▶낙선재▶중식▶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수도권 지하철을 이용한 알찬 궁궐답사길이었다.
봄꽃들이 기지개 켜며 피어나는 새 봄의 옛궁궐에서 조상들의 삶과 멋을 보았다.
이로써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 된 창덕궁이야기를 2편까지 모두 마친다.
출처:창덕궁홈페이지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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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