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년시절
*군번 없는 학도병이 되다.
남북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1951년 1월 4일 UN군은 서울을 빼앗기고 다시 남하하였다. 이른바 1.4후퇴 이다.
우리 집은 다시 용인군 원삼면 학일리로 피난하였다. 그런데 피난한 곳이 중공군과 국군이 대치하고 있는 중간이었다. 중공군은 지금 영동선상에 위치하는 양지까지 내려왔고, 국군은 원삼면의 안성 미리내와 경계를 이루는 우리고향 쌍령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쌍령산 북쪽에 해당하는 학일리는 전쟁완충지대로서 인민군과 국군이 수색전을 펼치는 공간, 중간지대이다.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
나는 1월 중순 큰댁 형근씨네 마루에 앉아 건너 마을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참 먼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안성군 고삼면에서 넘어오는 쌍령이 고개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편인지 1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철모를 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흰 천을 덮어 위장하고 2명씩 짝을 지어 일자로 늘어서서 마을농가로 차례차례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 이곳에도 드디어 정찰하려고 수색 나온 군인들이 닥쳤구나!’ 하는 순간, 내가 앉아 있는 큰댁에도 군인들이 들어와서 총을 겨주고 덜그럭 탄환을 장전한 후, 내 가슴에 대고서 ‘일어서! 손들어!’ 한다. 나는 아이쿠~ 이제 죽는가보다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일어서서 손을 들었다. 내가 손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자 ‘왜 피난 안갔노?’하고 묻는다. 나는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했다. ‘남쪽으로 피난 가는 길인데 어머니께서 아기를 안은 채 지금 수원에서 내려오시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더디 오십니다. 눈길을 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한 군인이 내게 ‘신분증 내놔’하였다. 나는 학생증을 보여주고 따라오라는 명령에 따라 대문을 나서니 북쪽으로 대열이 움직인다. 나는 생각하기를 ‘인민군인가보다. 큰일났네’라며 따라가다 돌꼬지(石花地)지에 이르렀다.
*사촌형 총살되다
군인들의 차림새를 보니까 여자들의 흰색 행주치마를 머리로부터 내려 걸치고 농촌 농가의 장롱을 뒤져 흰 바지저고리를 껴입고 총대는 홑이불을 찢어 몸체를 하얗게 감았고 다리도 흰 천으로 칭칭 감았다. 나는 이들 수색대가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분간을 못했다. 처음 듣는 지방사투리이기 때문이었다.
이 군인들이 돌꼬지(石花地)에서 큰일을 저질렀다.
내 사촌형 달영(達泳)이가 아랫마을에서 나처럼 잡혀 끌려가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망을 간
것이다.
끝까지 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혼자 생각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달영이 형은 어느 큰집 장독대 빈 항아리 속에
숨었다가 끌려나와 바깥마당 구석에 세워져 총살을 당했다.
뒤따라서 분대와 같이 가던 나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총살된 사촌형의 시체를 묻어주려고 들것< 당가>으로 앞뒤에서 잡아들고 운반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찌 그 겨울을 잊을 수 있을까.
돌꼬지(石花地)에서 내 사촌형을 사살한 수색대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남쪽,안성 방향 쌍령이 고개로 되짚어 넘어간다. 이때 나는 ‘살았구나, 국군이었구나!’하고 한숨 섞인 작은 소리로 외쳤다. 우리 군인들은 쌍령산 산마루에 요새(要塞)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나는 중대장 연락병들이 기거하는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이 부대는 저 유명한 육군 제6사단 9861부대 11중대였고, 중대장은 정성영(鄭星永) 중위였다.
나는 일주일간 연락병들이 자는 방에서 기거하며 중대장이 잠자는 방에 땔나무를구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기도 했다. 연락병 하나가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중공군 누비저고리 뒤에 총구멍이 뚫린 방한복 한 벌과 아랫도리는 일본군복 하의(下衣) -'당꼬바지'를 주어서 그것으로 겨울을 나게 되었다. 군화는 얻지 못했다. 나는 추울 때 손발이 시려서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고 중대장 방 아궁이 당번이 되었고 연락병이 각 소대로 명령암호를 전달하러 나가면 그 방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우리 부대는 쌍령리에서 1주간을 주둔하다가 임무교대로 인해 충북 진천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농촌마을마다 수색하여 한우가 있으면 끌어내어 잡아가지고 수레에 싣고 등에도 지고 내려갔다. 하루에 열아홉 마리의 한우가 희생된 날도 있었다. 엄동설한에 잘 먹지 않으면 군인들은 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진천 허허벌판 막사에서 한 달을 지내고 다시 부대는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북진명령이었다. 우리 부대는 다시 행군하여 내고향 원삼면 고당리를 지나서 금광구덩이가 있는 안골에서 하루를 묵었다.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용인탄환전에 참전하다.
안골에서 하룻밤을 쉬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큰곱둔고개 넘어 범왕굴을
지나 용인에서 4km
밖에 있는 삼삼리에 도착하였다.
삼삼리에 접해있는 북쪽 산 너머는 용인과
양지간이다.
이틀을 쉬었다가 용인탄환전에 투입된 우리부대 군속과
함께 나도 뒤따랐다.
용인 읍내에 도착하자 내게도 기관단총이
지급되었다.
하늘에는 호주비행기(비행기 날개 끝에 날개와 직각이 되게 폭탄을 장착한 것으로 보이는
비행기)
4대가 날아와 연속으로 용인 김량장을
폭격한다.
양지쪽 하늘에는 미 공군의
제비비행기(새 날개처럼 뒤쪽으로 갈수록 삼각형 모양을 띄는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하면 천지가 으르렁거렸다.
삼삼리에서 이틀을 지내고 우리 부대는 중대장님의
지휘 하에 용인 읍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멀리 중공군이 산발적으로 퇴각해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군인 한 사람에게서 나는 총 쏘는 법을 배웠고 군속
한 사람과 함께 패잔병 수색에 나섰다.
용인 태성중학교를 끼고 있는 산 중턱에 일제말엽
방공호로 파놓은 굴이 상당히 깊다.
우리는 플래시를 켜들고 숲속으로 기관단총을 발사하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굴속에서는 신음하는 소리가 나더니 중공군 한 놈이
단검으로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동물적 본능의 반사행동으로 총잡은 쪽 주먹으로
놈의 칼 든 팔을 막는 동시 오른발로 사타구니를 내질러 차니 ‘캑’하고 주저앉았다.
중공군을 생포하고 보니 나보다 더 어린
15~16세나 되었을까.
붉은 홍안의 애송이 군인이었다.
멀리 울려 퍼지는 아군의 M1
총소리와 함께 중공군은 북으로 북으로 쫓겨
갔다.
*鄭星永 중대장을 잊지 못함
육군 9861부대 즉 6사단 11중대 정성영 중대장을 잊을 수 없다. 용인탄환전에 참가하면서 내가 이대로 이 부대를 쫒아간다면 전쟁 통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왕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울 거라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당당히 군번 있는 대한민국 장교로 참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용인 읍에서 고향까지는 30리 길인데, 더 멀리 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중대장님이 머무는 숙소에 찾아갔다.
“중대장님, 저도 대구로 내려가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번 있는 장교로 정식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하니까 중대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군번 있는 군인으로서 장교가 되고 싶다?
그래?”
하시더니 귀가증을 써주셨다. 나는 곧바로 고향으로 향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중공군 방탄복을 입은 채 고향을 향하여 가는데 요소요소의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귀가증을 보여주고 통과해서 집 떠난 지 달포 만에 작은아버지 집에 갔다.
그런데 그동안 부대를 따라다니며 쇠고기를 얼마나
먹었던지 얼굴에 살이 쪄서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얼른 알아보시지 못하다가 ‘이게 누구야,
두영이 아닌가?,
잘 왔다.
너 나간 이후로 죽은 줄
알았구나.’
하시며 감격해 하셨다
*내 사랑하던 두 친구
우리 가족은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상할 때 고향에서 수원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목공장을 다시 열었고 나는 수원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다음해 봄에 6년제 중학교가 3.3년제 중·고등학교로 학제가 변경되어 수원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승격진학 되었다. 서울의 조선전기공업학교는 문을 열지 않았고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은 수원에 있는 각 급 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원중학교로 들어갔다.
수원시 교동에서 한 반에 같이 다니던 친구로는 김한식(金漢植), 홍익선(洪益善) 두 친구가 있는데 김한식은 학년에서 1~2등을 하는 수재(秀才)로 그 부친이 향교(鄕校) 옆에 살면서 향교 고지기이므로 늘 신분상의 열등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서울농대 서무과에 취업해서 봉급생활자가 되었다.
홍익선은 학교 밴드부에서 스라이를 불고 있었는데 음악교사 자격증을 따서 초등학교 음악교사로 들어가 평생 음악교사로 교육계에 헌신하고 정년퇴임하였다. 두 친구는 선하고 정이 많아 나는 늘 학교에서 집에 오면 두 친구와 향교에서 놀았다. 향교에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는데 김한식과 홍익선은 피아노를 잘 치고 김한식은 노래도 잘 불렀다.
우리는 <드리고의 세레나데>를 좋아한 김한식의 노래에 맞추어 같이 불러보곤
하였다.
김한식은 서울농대 서무과에 근무하면서 대학 못간
죄절감 때문인지~ 퇴근 후면 2차 3차 술집을 전전하였고 그러다 60대에 중풍이 들어와 얼마동안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다.
또 한 친구, 홍익선은 지금도 수원에서 거주하며 수원고등학교 동기모임의 총무일을 보고 있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함
나는 수원시 교동 20번지 일본인 미키타(右田)가 아버지에게 주고 간 집에서 살았는데 이웃으로 있는 이순호 장로께서 현재 수원시 교동에 있는 중앙침례회(당회장 김장환 목사) 자리에 미군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차렸다. 나는 매주일 이 교회에 다녔다. 내 나이 18세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열심히 다녔다. 이순호 장로는 당초에 우리 집 목공장에서 주일예배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건너 마을 동산위에 천막을 치게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 생계가 달린 목공장을 교회로 내줄 수는 없다 하시며 거절하셨다. 어머니는 이순호 장로의 아우님인 이우호 목사가 예배를 주관하는 성결교회에 다니고 계셨는데 성결교회는 집 뒤쪽 팔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새삼 우리 집에 교회를 새로 낼 필요가 없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부를 때가 제일 좋았고 찬송가 중에도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과 78장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제일 좋아했다. 죄의식을 강조하는 설교나 노래에는 거부감을 가졌다. 그럼에도 이순호 장로님은 설교할 때마다 인간은 본래부터 죄인임을 강조하시고 성경도 죄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구절만을 주로 인용 설교하였다. 젊은 나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는 성경대목이 걸림돌이 되고 죄의식에 시달리곤 하였다.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경위는 별도로 <나의 종교 입문>에서 다시 서술하기로 한다.
*고향생각
처음 내가 아버지 고향에 가보기는 초등학교 사학년도 채 못 마친 열두 살 때
일제말기 왜놈의 앞잡이 첩자놈 때문에
아버지가 보국대 끌려가는 것 피하려고 도회지에서 집 팔아 가지고
고행으로 이사한 때였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아버지 연세는 사십 삼세
거기서 나는 십리가 넘는 개울건너 산길 따라 책보자기 등판에 얼러 메고
아침,
저녁,
봄부터 가을까지 줄곧 다녔고
어느 날 『고추고을』 골짜기 깎아지른 산속에서 국수버섯 잔뜩 따 넣은 바구니를 놓치고서
떽떼굴 떽떼굴 궁글러 미끄러져 내려왔다.
두 번째 내가 아버지 고향에 가보기는 중학교 사학년도 채 못 마친 열일곱 살 때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가 터져서 전쟁의 포화 속에 불태워 죽지 않으려고
도회지에서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려갔다.
어머니는 막내둥이 손을 잡고 팔십 리 피난길에 이불보따리 옷 보따리 이고지고
가로수 밑에 숨어있는 인민군 탱크 옆을 지날 때
호주비행기 나타나 기관총을 갈기는 바람에 논뚝길로 내튀다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해 가을 나는 쌍령산 중턱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내려오다가 헛디딘 발길에
목이 부러져라 거꾸로 곤두박질도 했다..
그 후에 내가 아버지 고향에 가보는 것은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갈 때마다
종중산 발치에 총살당한 사촌형 무덤을 보고 고조 증조 조부모 산소를 돌아다보고
예로부터 가난하게 살으신 조상들의 넋을 위하여 그 무덤 앞에 새로운 맹세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버스길이 뚫리어 고향마을 학일리를 지나서 승죽골을 지나서
청룔마을까지 버스가 다닌다
학일리 종가집 노인들은 다 돌아가시고 조카들과 종손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새로 만든 저수지에 발을 담그고 지난날을 돌아다보니 가슴에 눈물 고인다.
내 인생이 끝나면 이 몸을 내 아버지 발아래 묻으라 일러야하겠다.
그해 겨울을 어찌 잊으랴.
-1951.1.4.후퇴-
吳 斗 泳
온 들엔 하얀 눈이 덮혀있었다
홑이불 뜯어내어 온몸을 휘 감고 행주치마 찢어내어
총자루 칭칭 감은 구팔육일부대 수색중대 병사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남쪽으로 쌍령산 고개를 넘어 갔다
그 이듬해 정월, 홍안소년의 중공군 병사들이
쌕새기 호주비행기 미국의 제비비행기
그들의 폭격을 견디지못하고
패잔병 신세가 되어 북으로 사라져갔다
乙酉 十月 初 五日 甲午 (을유 시월 초오일 갑오)
七代孫 某某等 敢昭告于(칠대손 모모등 감소고우)
청정학일 알음마을 저수지에 무자맥질 하던 기러기떼들은
물안개 속을 뚫고 북녘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빈들에 칼바람 맞으며 돌아오는 길
도깨비 바늘이 바지가랑이에 달라 붙는다
지금도 돌꼬지(石花地) 안씨네집 마당에서
드르륵 갈겨대는 기관총 소리 들려온다
저 높은 산, 그 너머에 '미리내' 성지가 있다
그해 겨울을 어찌 잊으랴
-<1950년 6.25. 그해 겨울~1.4후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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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산:용인시 원삼면 학일리, 고향마을 뒷산.
*향수 * (정지용 작시/김희갑 작곡/ 테너 박인수 & 이동원*
첫댓글 아, 용인 전투에서는 중공군과 육박전도 하셨네요. 그게 1.4 후퇴 때쯤 되었겠네요.
용진 용진 어서나가세 한손엔 총을 들고 한손엔 사랑 ....... 이런 군가도 있었지요.
그런 어려운 체험들이 교산 선생님을 교회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고향으로 피란 가서 큰댁(오대환 댁)에서 1년에 열번도 더 제사를 지내는데 여자들만 고생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제사를 지내는데 남자들만 미리 와서 떠들다가 시간이 되면 젯상에 절 몇번하고
음복이라고 술잔을 돌려가며 안주와 술을 마시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더군요.
여자들만 쌔빠지게 일을 하고 녹초가 되더군요. 남녀불평등임을 발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청년 시절의 글을 읽으면서, 전쟁이란, 전화 속에서 전쟁을 겪었던 어느 가
족들에게라도, 몇 편의 장편 소설을 씀직한 파란만장히고 기구한 삶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발생되지 않기를 빌어봅니다.
네~! 다뉴브님^^*
다시는 이땅에 재앙의 날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셨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