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 / 서석조
남양산 로터리 횡단보도 소나기 속
우산 없이 허둥지둥 헤쳐 뛰던 한 여인
전봇대 부여잡으며 곱다시 젖어 들고
지나던 승용차 한 대 느닷없이 멈춰 서서
차창을 스륵 내려 우산 하나 툭 건네곤
휑하니 가던 길 그냥 미련 없이 가버린다
세상에 참, 구세주가 따로 또 있을까
화들짝 놀라 펼친 우산 위 빗줄기가
축포를 터트리듯이 은빛으로 퍼져난다
길 밖의 시간 / 서석조
가을비 추적이는 저물녘 전철 안
졸거나 폰을 보거나 앉았거나 섰거나
비로소 길 밖의 시간 나래 쉬는 사람들
빗물이 성호 긋듯 차창을 울다 가고
기계의 위력으로 길머리도 지워져
내릴 역 후딱 지나쳐 허둥지둥하려나
생이란 이름자와 사진 한 장 남기는 일
사람들을 톺아보다 눈자위를 닦는다
형님을 구천에 두고 집으로 가는 길에
사진첩 / 서석조
글자 하나 몰라도 나는 살아 팔순이다
공부깨나 해놓고 절름대기 일쑤라니
등짝을 내리치시며 서슬 퍼랬던 어머니
그날 그 고향 집에 감나무 가로 벋고
댓돌의 높이만큼 농민신문 쟁여져
문명文名을 바랐으랴만 묵향 머금은 주소
괜스레 헛간 뒤져 먼지바람 일으키자
댓잎에 베인 바람이 구석구석 파고든다
아뿔싸, 아닌 곳에 둔 입신양명 사진첩
마술이듯 / 서석조
아무리 긴 세월도 돌아보면 한순간
억 광년 먼 별빛에 하루살이 몸 누이듯
밤새운 이슬방울이 한번 반짝 햇살이듯
칠십육 세 연치에 일삼은 신문 배달
한때는 날쌘돌이 더딘 걸음 구슬땀에
빠뜨린 배달 신문을 공손히 내미는 손
과꽃 피고 호박 열고 까치 날고 매미 울고
분복의 삶이라도 발품 더운 여름 나절
눈 한 번 감았다 뜨듯, 마술이듯, 저 노년
그리운 시절 / 서석조
산정이란 음악실에 조여들던 목마름이
미화당 백화점 앞 노신사불쑥 세워
]칠십 년 전통이라는 회국수에 젖게 한다
이역이듯 에돌아 성마른 숨결들을
용두산 오름 계단 수를 세며 부려놓고
그래도 큰 소리 떵떵 허장성세 즐거웠다
너도 혹 저만치에 찾아와 서성이나
굽은 목 외로 돌려 첨탑을 바라보다
냉면집 원산면옥의 질긴 허기에 감긴다
국제시장 영화 어름 사무치는 우리 시절
]굵은 땀 한나절을 가게마다 흘려놓고
자갈치 간판 둥치에 햇살 칭칭 동여맨다
우리 하마 칠순 어름 영도다리 아래 주술
사십 계단 둘둘 말아 어디에다 또 펼칠까
사랑의 부산극장은 절찬 상영 중이다
벌교 꼬막 식당 / 서석조
어깃장 세게 놓고 삿대질로 펄을 질러
황혼도 제 길 잃고 서산에 걸렸겠다
숭숭숭 대파를 써는 팔뚝 굵은 아지매
터울터울 주름 잡힌 꼬막이 한 바가지
물을 잃고 뭍을 얻어 시장통 웁쌀로 앉아
귀갓길 아예 접어라 뜨거워지는 수다다
센 주먹 사내들이 곁눈질로 들락여도
-싱겁게 굴면 죽어, 나 시방 칼 들었승께
아지매 드센 기세에 코끝 아린 박장대소
- 『사진첩』(2024. 교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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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사진첩』_서석조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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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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