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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지요.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습니다.
▥ 제1독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창세기의 말씀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 복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시자 요한의 어머니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세례로 다시 태어난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어머니를 얻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계가 물질적, 가시적 차원에서만 형성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박병규).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 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 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루카 2,34-35)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루카 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요한 2,4)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마르 3,33-35)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이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어머니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도 신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너노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제 우리는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다시 연중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8년 2월 11일 루르드 성모 발현 축일(160주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날인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날 거행되는 이 기념일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새롭게 탄생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
이를 교황청 경신성사성 장관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교령”을 반포하면서,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시고 교회의 자애로우신 어머니가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는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 되심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참으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는 당신 아들이 남기신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셨으며, 모든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들딸로, 사랑하는 제자로 각각 맞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맡기신 영이 있는 교회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셨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안에서, 모든 제자들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어머니를 향한 자녀로 선택하셨고,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맡겨 그들이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 이후 탄생한 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셨습니다.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기도하시고, 오실 성령을 기다리며 이미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4―2,4 참조).
프란체스코 교종께서는 바로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호칭은 이미 교부 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절>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 3,20)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음”을 전해줍니다. (사도행전 1,14)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의 죽음과 함께 서 계시는 성모님에게서는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고, 그지없이 비통하고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
(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을 받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믿고 응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아, 어머니! -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어제의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저를 어버이처럼 여기는 44년 전(1977년) 당시 13세 신림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이, 지금은 57세로 노년을 향해가고 있는 남녀 제자들 7명이 저를 찾아 와 하루를 참 즐겁게 지낸 날입니다.
지금 저는 73세 노년이지만 당시는 29세 열정과 순수한 사랑의 29세 청년교사였습니다.
싸온 도시락도 한 집안 식구처럼 함께 먹은 후 집무실에서 ‘스승의 노래’에 이어 몇 동요도 열정과 순수의 마음을 다해 열창을 해줬습니다.
새벽에 전해 받은 동영상을 열어보니 더욱 감동입니다.
“숲속의 합창소리에 이끌려서요.--- ㅎㅎㅎ”
집무실 앞을 소리없이 지나던 자매님에게 후에 조용히 사유를 물어보니 울려퍼지는 ‘스승의 은혜’ 노래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찾았다는 것이며, 또 노래도 불러주고 떠났습니다.
언제 들어도 정다운 노래, ‘스승의 은혜’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라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 대신 ‘주님’을 넣어도 ‘어머니’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스승의 은혜를 들을 때, 부를 때마다 생각나는, 눈물짓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바,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생각나는 성모 마리아같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불렀던 ‘어머니’ 호칭인데 이젠 가장 많이 생각나는 어머니입니다.
지금은 매일 미사 봉헌하기에 가장 많이 부르는 호칭이 미사경문에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하교하여 집에 돌아오면 우선 찾는 어머니였습니다.
간혹 어머니 안 계실 때의 그 허전했던 분위기의 기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예전 형님댁에서 머물며 공부할 때 형님도 퇴근하면 “수철아, 형수 어디 갔니?”물으며 우선 찾는 사람이 형수였습니다.
집안의 ‘해’라 하여 ‘안해-아내’, 혹은 ‘집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집안의 중심과 같은 어머니나 아내가 없는 집안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까요.
그리하여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자매도 누구의 소중한 어머니이자 아내일 거라 생각하면 저절로 귀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우리 자모이신 가톨릭 교회에 마리아 성모님이 계시지 않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요!
완전히 빈집같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어머니가 안 계셔도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영원히 함께 계시니 얼마나 고맙고 반갑고 기쁜일인지 모릅니다.
참 고맙게도 5월은 어머니달, 성모성월이요 미사 중 가장 많이 부르는 성가가 성모님 노래인데 코로나로 인해 노래 못한 지가 2년째입니다.
“한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라가시며,
지극한 고통중에 기도드렸네.
주님의 뜻을 위해 슬픔도 삼키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가톨릭 성가 248장 가사와 곡도 생각납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8년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성모님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란 호칭은 교부시대부터 쓰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새삼 가톨릭 신자들의 깊고 고요한 심성도 끊임없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과 하나된 모성애의 표현이란 생각도 듭니다.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지녀야 하고 부단히 함양(涵養)해야할 성모님의 모성애입니다.
예수님은 새 아담이요, 마리아 성모님은 새 하와라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부부는 얼마나 무지의 철부지들인지요.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도 모르고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를 말끔히 극복한 새 아담인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시고 새 하와인 우리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이 영적 이등변 삼각형을 연상케 합니다.
이등변 삼각형의 윗 꼭지점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고 아래쪽 오른 편 꼭지점에는 마리아 성모님과 몇 여인들, 그리고 왼쪽 꼭지점에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애제자 요한이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 애제자 요한이 상징하는 바 우리 가톨릭 신자들 모두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마리아님의 자녀들임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애제자 요한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마리아님이 교회의 어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심을 천명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임과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녀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날로 닮아가야 할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의 깊고도 깊은 모성애의 사랑입니다.
아마 하느님의 가이 없는 사랑에 가장 근접해 있는 분이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일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 Ecclesia Mater> 교령이 반포된 다음해 오늘 기념일에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재미있는 강론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는 여성적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교회가 이런 정체성을 상실하면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이 되고 맙니다.
남성적인 교회가 될 때 슬프게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여성 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의 태도는 마리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에 끊임없이 미사예물과 봉헌금을 바치는 마리아 성모님을 닮은 자매들이, 이어 즐거이 주방 봉사를 하는 자매들이, 때 되면 기쁜 마음으로 아름답게 제단을 꽃꽂이로 장식하는 자매들이 생각납니다.
집무실을 찾는 남성 형제들은 거의 대부분 빈손이지만 여성 자매들이 빈손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닮은 이런 자매들의 모성애에 도저히 비교할 바 못되는 부성애입니다.
철부지같은 거친 남성뿐들이었다면 교회는, 수도원은 벌써 문닫았을 것입니다.
성모성월 5월 어머니달에 맞이하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 참 고맙고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교회의 자모(慈母)이신 마리아 성모님의 모성애를 날로 닮아가게 합니다.
“주님을 낳으신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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