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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전라남도 담양군 출생인 이승기는 중앙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의 마츠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진학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교토 제국대학 화학 연구소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던 이승기는 1939년 사쿠라다 이치로(櫻田一郎) 등과 함께 비날론 합성에 성공, 아시아 최초로 합성 섬유를 만들었다.
월북 후 北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지내
그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공대학장을 지냈으며, 월북 후 1962년~1990년까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맡기도 했다.
이승기는 비날론 개발로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1959년 제1회 과학부문인민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리던 레닌 상까지 수상했다. 김일성은 이승기가 잠시 병으로 누웠을 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북한은 비날론의 상용화를 위해 1961년 5월 흥남에 ‘2.8비날론공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북한 정권의 선전과 달리 생산과정에서 막대한 전력과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나일론 등 다른 합성섬유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졌다.
‘2.8비날론공장’은 (주)삼화출판사 발행 고교 역사 교과서가 서술한 것처럼 북한의 의복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꾸기는커녕 70억 달러를 투자한 ‘남포갑문’, 40억 달러를 투자한 1989년의 ‘세계청년학생축전’과 함께 북한 경제를 파탄시킨 대표적 상징물로 전락했다.
이승기는 또 1967년 영변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초대 연구소장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했다. 북한은 이승기의 연구소장 재직시설 소련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원자로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1979년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착공해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핵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으로 이승기는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루토늄 추출 기술은 핵공학 기술이라기보다는 화공학 기술이기 때문에 이승기의 역할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승기 후손, 대대로 北정권에 충성바쳐
이승기를 통해 북한에서는 자체 양성된 핵개발 인력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 가운데 특출한 인재들은 연간 수십 명씩 소련의 드브나(Devuna) 핵 연구소에 파견되어 현장 실습을 통한 기술을 습득했다.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 탈북자 김대호 씨는 자신의 저서인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은 피지 않는다’에서 이승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3년 여름, 본인은 평양 101 핵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간부로부터 북한이 저폭뇌관(低暴雷管)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핵탄두 폭발 시 통상 3만도 이상의 고온에서 핵분열이 일어나지만 그보다 훨씬 낮은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황장엽 씨도 북한 고위관료로부터 들은바 있다고 본인에게 최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연구사들 사이에선 ‘만약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승기 박사는 그 전범자의 한사람으로 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승기는 생전에 함흥과학원 근처 2층 고급빌라에서 살았으며 사망과 함께 남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대를 이어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
북한의 대외 홍보잡지 ‘금수강산’(2008년1월호)은 이승기의 맏아들인 이종과(교수)가 ‘공훈과학자’로 화력발전소에 촉매법에 의한 발전기냉각용 수소정제체계를 도입했으며, 항일투쟁 구호가 새겨진 ‘구호나무’ 보존에 기여하는 등 중견 과학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과의 맏아들 이승일은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사, 둘째 아들 이명일은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교수이며, 딸 이옥이는 김책공대 교수로 알려져 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관련 글] 북한 핵무기 개발사
■ 북한의 核개발은 역사가 매우 길고, 舊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으며, 이들 국가의 核협력 관계는 非공식적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55년 核物理연구소를 창설한 북한은 1956년 소련과 ‘核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북한은 核物理학자 30명을 소련의 ‘드브나(Dubna) 核 연구소’에 파견해 연수를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110㎞ 떨어진 드브나 시(市)에 세워진 이 과학기지에는 소련 최대 核실험실이 있었다.
1964년 중국 최초의 核실험을 성공시켜 ‘중국 核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核물리학자 왕감창(王淦昌) 등 중국의 주요 核과학자들도 이곳에서 길러졌다.
1956년 연구소의 설립 이후 1990년 북한과 러시아의 과학연구 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모두 250여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후 1960년대부터 북한은 核物理學 연구진을 자체적으로 길러냈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에 核物理학원을 설립해 核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련의 도움으로 IRT-2000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核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1979년에는 자체 기술로 실험용 核반응로 건설에 착수해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영변 核시설에 사용한 核 연료봉을 써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 건설에 착수했다. 북한은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영변 核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고폭 실험을 130여 차례 실시했다.
■ 북한의 초기 核 연구는 도상록(都相錄), 한인석(韓仁錫), 이승기(李升基) 등 越北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理論물리학을 전공한 도상록은 해방 후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 주임을 맡았다.
한인석은 해방 후 연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월북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고급 교사를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核物理學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이승기는 1939년 교토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현재 核개발 핵심고급인력 200명을 포함, 전문 인력 3,000명, 기술인력 6,000명 등 총 9천여 명의 核과학 인력(2006년 기준)을 보유하고 있다. 核物理學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성이과대학이다. 평성이과대학은 核物理學, 化學, 數學 등 다섯 개 학과로만 구성된 특수대학이다. 이외에도 평양고등물리학교, 김일성고등물리학교 등도 물리학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주요 교육기관이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정말 核武器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核武器 기술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50년대 이미 모든 원리가 밝혀진 기술이다. 원자로 기술과 核武器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분열 핵물질을 사용해 원자로는 3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核分裂이 일어나도록 작동시키는 반면, 核武器는 짧은 시간에 核分裂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분열시간의 조절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核武器 개발 시 설계된 모형에 대한 核계산을 현대와 같은 대용량의 슈퍼컴퓨터로 계산하지 않고 수기식 계산으로 개략적인 계산을 하여 설계했으나 특이한 문제점은 없었다.
북한도 이미 1980년대부터 자체 기술로 영변의 5MWe 원자로를 설계했다. 그러므로 어떠한 모형의 핵물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 계산 가능한 核계산 코드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核武器 개발에 필요한 기술상의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 한다.
여러 가지 異說이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核실험의 필요성은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으며,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을 가지고도 核무기를 유지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 적지 않은 核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정리/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