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종*
내 가슴에 종각이 한 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종도 없이 텅 빈 종각이 세워져 집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소주를 마시며 비를 피하곤 하더니 어느 날 보신각종 같은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내 가슴의 종소리를 듣고 싶었다
종소리에 내 눈물을 실어 멀리 수평선 너머로 보내고 싶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찾아와 종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제자들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해마다 제야[除夜]가 되어도 종을 치러 오는 이가 없어 누군가가 종을 치러 오기를 평생 기다리다가 나는 그만 눈 멀고 궈먹은 노인이 되고 말았다.
종각은 단청이 벗겨지고 지붕과 기둥이 뻐걱거렸다. 지금 종을 치지 않으면 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이 종을 치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힘껏 종을 쳤다 종소리에 가슴이 와르를 죽음처럼 무너졌다 내 가슴의 종각에 매달린 종의 종소리를 한번 울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에밀레종 *
어릴 때 에밀레종 속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에밀레종이 경주 시내의 옛 박물관에 있을 때였는데, 마침 외갓집이 그 가까이 있어 여름방학에 놀러갔다가 에밀레종을 보러 갔다.에밀레종은 외벽이 없고 기둥만 있는 기와집 같은 종각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어린 내 눈에는 크기만 집채만 했을 뿐 어떤 감흥으를 느낄 수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디서 고위직 관리가 와서 에밀레종 소리를 직접 듣기를 원한 모양이었다. 박물관 관리인 한 사람이 그 사람 앞에서 직접 종을 쳐 보였다. 열쇠로 종각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몇 번이고 힘껏 종을 쳤다. 덕분에 나도 에밀레종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에밀레종 소리를 직접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은 에밀레종 소리를 직접 들을 기회란 거의 없다. 종신에 균열현상이 나타나 더 이상 종을 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에밀레종 소리는 장중했다. 깊은 골짜기에 낙뢰와 폭풍이 메아리치는 것처럼 격정적이었다가 차차 잦아든 여운의 끝은 한없이 길고 부드러웠다. 그쳤는가 싶으면 또 계속 가늘게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는가 싶으면 또 어느새 그쳐 있었다.
쇳물에 어린 소녀 한 명을 집어던져 종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들은 탓인지 종소리가 가늘어질수록 그 소녀가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에....' 하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려 또한 신기했다.
관리인은 두 팔로 종매를 길게 뒤로 빼내었다 힘껏 내려치곤 했는데, 한 열댓 번 치고 나서 그대로 종각 출입문을 열어놓고 고위직 관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종각 문이 열린 것을 보자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크게 밍설일 것도 없이 같이 간 사촌에게 망을 보게 하고 얼른 에밀레종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종은 바닥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져 매달려 있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종 속에 들어가자마자 공포에 휩싸였다. 얼마나 무서운지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른 손가락 두어개 굵기만 한 쇠줄에 종이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내가 종 안에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종이 쿵 내려 앉아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다. 만일 종이 쿵 내려앉는다면 나는 영원히 종 속에 같혀 죽어벌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공포감도 차차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종 속을 살펴보았다. 종 안쪽 면에 온갖 낙서가 쓰여 있었다. 먹으로 이름을 한자로 쓴 것도 많이 있었지만, 분필로 이름을 쓴 것이 가장 많았고 여자 나체 그림을 조잡하게 그려놓은 것도 있고, 그러니까 나같은 개구쟁이가 그 이전에도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뒤 에밀에종 소리에 대한 나의 관심은 남달랐다. 그무렵에는 해마다 제야에 라디오에서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사찰의 종소리를 다 들려주었는데, 맨 마지막으로 에밀레종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연말이면 끝까지 기다렸다가 그 에밀레종 소리를 꼭 들었다. 에밀레종 소리는 해인사나 낙산사등의 종소리와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다른 사찰으 종소리가 가볍거나 둔탁한 소리라고 한다면, 에밀레종 소리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다루는 어떤 절대자의 손이 부드럽게 종을 쓰다듬는 듯 신비로운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에밀레종 소리가 메아리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노을 진 아침 하늘을 뒤흔들어놓을 듯이 장엄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다가 차차 맑고 가는 소리가 연잎에 이슬 구르는 소리로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치고, 그칠 것 같으면서도 이어진다. 나는 내 가슴속에 하나의 종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늘 기쁘다.
내 가슴이 종각이라면 그 종각 안에는 에밀레종이 매달려 있다. 언젠가 에밀레종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던 경주 외삼촌의 말씀을 나는 늘 잊지 않고 있다. "에밀레종은 사람의 새끼손가락으로 쳐도 소리가 난다는 신비의 종이다,
에밀레종 소리는 우리 인간의 마음의 소리이자 영혼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에밀레종 소리를 귀로 듣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호승이 니는 앞으로 마음의 귀를 가지고 에밀레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라
그리고 종도 소중하지만 종메도 소중하다는 것을 늘 잊지 않도록 해라.사람들은 종만 생각할 줄 알지 종메를 생각할 줄 모른다. 종메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종이라 할지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다 종이 되려고만 하지 종메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왜 그런지 아니? 그건 종메가 되면 종을 칠 때마다 제 몸을 쇠붙이에 아프게 부딪쳐야 하는 고통이 늘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승이 니는 종메의 고통을 소중히 생각할 줄 아는사람이 되어야한다. 앞으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종보다는 종메로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섦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
첫댓글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종보다는 종메로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깨닫게 하는 글이네요
정호승 님의 글 감사합니다
장마로 습도가 높은 날이에요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