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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행 4:5-12; 요 10:11-18 본문 : 욘 2:1-10 제목 : “요나의 노래” |
요나의 노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요나서 2장은 ‘시’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된 후 하나님께 노래하는데, 그 노래의 내용을 성경은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문학적 방식은 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적 진술과 같은 담백하고 사실적인 문체도 있고, 이야기체, 보통 내러티브라고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어떤 성경은 지혜, 곧 잠언과 같은 방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도 있습니다. 시편처럼 전체 성경이 시인 책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성경에는 군데 군데 시들이 등장합니다.
요나서에서는 문학적으로 보자면 그 이전과 이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갑자기 2장 부분에서 시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주경학자들은(단순히 이 시가 편집되어 들어갔다는 자유주의 진영의 주장은 제외하고) 이 시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나서가 요나의 급진적인 방향 전환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 시를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서 전체에서 이 시의 부분은
한편으로는 요나서 전체의 핵심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요나가 급진적 회심을 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 부분은 요나서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은 이 시의 중요한 면모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주시는 복음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 속의 내용들을 면밀히 살피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전체를 열기 위한 질문
먼저 이 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시 전체를 열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1)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분명히 2절에서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맞는 말인가요? 먼저 요나가 말하는 “내가 받는 고난”은 무엇이었습니까? 물고기 뱃속에 갇히기 전에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도망치던 때의 고난입니까? 그렇다면 2절이 말하는 “내가 받는 고난”이란 하나님을 벗어나려 할 때 그가 무언가 고통 중에 있었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물에 빠지고 물고기에게 먹힌 일이 고난입니까?
아마도 추측컨대 둘 다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1차적으로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갇힌 것”이 고난입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다 훑어보고 나면, 사실은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것’이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내용을 다 살펴보고 나면 명확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뭘 대답하셨습니까?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즉 그는 지금 ‘여호와께로부터 도망치는 고난’이라 보아도 고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물에 빠지고 물고기에게 먹히는 고난’이라 보아도 고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얼 “주께서 대답하셨다”는 말입니까? 사실은 누가 보더라도 요나는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지, 고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데, 과거형으로 “주께서 대답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2)
다음 구절 역시 같은 주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그 다음 구절에서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보고 있다고 하면 요나는 전혀 구출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스올의 뱃속에서 여전히 부르짖고 있는 상황이죠. 진행형입니다. 그런데 왜 요나는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 합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3)
그리고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들었지만, 요나의 시는 ‘애가’가 아닙니다. 심지어 ‘회개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통회하는 내용 자체가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나의 시는 ‘찬양시’, ‘찬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을 바라는 노래”가 아니라 “구원하셨고, 그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나의 시는 굉장히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누가 보아도 구원받지 않은 상황에서 구원받았음을 찬미하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닫게 되는 바
이렇게 질문하고 나면, 우리는 지금 요나가 노래하고 있는 정황이 ‘단순히 현재의 형편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요나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고난’과 ‘그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어려움을 당했다”, “거기서 벗어났다” 이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노래하고 있는 정황은 두 가지 정도 핵심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이 노래는 단순한 자신의 고난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 부가설명을 붙이자면 우리가 지난 주일에 들었던 대로, 요나의 시는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복음서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노래는 단순한 삶의 한 단면,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런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 설교들에서 요나가 ‘패역한 이스라엘 전체를 예표하고 있음’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즉 우리는 요나의 노래를 들을 때, 단지 ‘일개인이 어려움을 당해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는’ 방식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요나는 훨씬 더 큰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미 구원받았음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으로 보면 요나는 여전히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습니다. 요나는 육지에 토함을 받은 후에 이 시를 노래한 것이 아니고 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그 “훨씬 더 큰 광의적 의미”에서의 구원, 그러니까 단지 자기 삶의 문제, 자기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크고 포괄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 안에서 이것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직 무덤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 노래의 두 핵심 : 홍해와 성전
이 시 자체로 들어가서 내용을 찬찬히 읽어볼 때, 우리는 중요한 두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홍해”와 “성전”으로 잡았습니다. 이를 살펴보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3절의 “깊음”(히. 메촐라)
먼저 3절을 봅시다.
요나는 2절에서 자신이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말한 후에 3절에서 이 양상을 설명합니다. 이 양상의 제일 첫 묘사는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다”입니다.
3절의 “깊음”과 5절의 “깊음”은 단어가 다른데(5절은 뒤에서 다시 설명), 3절의 깊음은 히브리어로 ‘메촐라’이고, 5절의 깊음은 ‘테홈’입니다. 3절의 깊음은 “바다의 깊은 곳”을 의미하고, 우리는 시편 68편 22절에서 이 “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 68:2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이 “바다의 깊은 곳”은 출애굽기 15장에서가져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부른 ‘승리의 노래’인데, 이 승리의 노래에서 ‘애굽의 군대’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출 15:5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이 말씀에서 앞의 “깊은 물”은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5절의 ‘테홈’입니다. 그리고 “깊음 속에” 가라앉았다는 것이 3절에서 살피고 있는 ‘메촐라’입니다.
약(略)하고, 간단히 말씀드리면 오늘 말씀 3절과 시편 68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 “깊음”, 곧 요나가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저 깊음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애굽의 군사들을 에워싸고, 또 그들을 돌처럼 가라앉게 만든 바로 그 “깊음”입니다. 요나가 노래하고 있는 저 3절의 말씀을 유의하여 읽는 사람들은 이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는 마치 홍해 때의 애굽 군대들처럼, 깊음 속에 잠겨서 돌처럼 가라앉은 애굽 군대들처럼, 그렇게 깊음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이라고 지금 이 노래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성전
동시에 유의해야 할 점은 이 “깊음”이 등장하는 시편 68편과 출애굽기 15장의 승리의 노래에 동시에 ‘성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
시편 68편은 방금 그렇게 “바다 깊은 곳”을 노래한 다음에 ‘왕의 행차’를 말하면서 그분의 성소를 이야기합니다.
시 68:24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곧, 시편 68편의 방향은 “바다 깊은 곳”에서 끌어내어진 주의 백성들이 왕의 성소로의 행차를 기뻐하고 축하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68편의 주석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시적인 화자는 전쟁의 승리 후에 성소를 중심으로 축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2)
그리고, 이 주제를 모른다면 너무나 뜬금없게도, 홍해 도하 다음에도 하나님의 성전이 나온다는 사실은 못내 충격적입니다. 출애굽 승리의 노래는 5절에서 “애굽 군대가 돌처럼 깊음에 내렸다”고 이야기한 후에 10절에서는 그들이 “납 같이 잠겼다”고 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놀랍죠! 놀랍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의 홍해 도하를, 애굽 군대를 깊음 속에 내던지신 후에, 그 주의 백성을 “주의 거룩한 처소”, 곧 성전으로 데려 들어가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뒤에 한 번 더 반복됩니다.
16절에서 애굽 군대를 수장시킨 일을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다”고 쓴 다음에,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즉 우리는 시편 68편과 출애굽기 15장을 통해서, “깊음”이 “성전”에 가서 닿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하나님의 대적들을 깊음 속에 수장시키시고, 자기 백성을 성전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3. 5절의 “깊음”(히. 테홈)
그리고 더불어 5절의 “깊음”도 생각해 봅시다.
5절 말씀은 요나가 “깊음이 나를 에워쌌다”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때 요나가 사용하고 있는 말 ‘테홈’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태초의 혼돈 상태의 깊음’입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토후 와 보후) 흑암이 깊음(히. 테홈)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즉 요나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나는 깊음 속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태초의 혼돈, 하나님이 세상을 조성하기 전의 상태......그것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테홈’ 역시 홍해와도 연관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출애굽 승리의 노래에 또한 이 ‘테홈’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 15:5 깊은 물(히. 테홈)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출 15: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히. 테홈)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이 ‘테홈’이 홍해 도하와 연결된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 51:10 바다를, 넓고 깊은(히. 테홈)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사 63:13 그들을 깊음(히. 테홈)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시 106: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히. 테홈)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 우리 말로 “바다를”이라고 했지만 “깊음을”이다.
즉 요나가 지금 자신이 “깊음이 나를 에워쌌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증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깊음은 주로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기 전의 혼돈이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의 혼돈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요나는 단순히 “내가 물에 빠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인해 빠지게 된 그 혼돈과 어려움의 상태, 하나님께로부터 배척당하거나 하나님의 손길이 제거된 상태......거기에 빠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더불어 5절의 “바다 풀”
더불어 이 5절의 “바다 풀”은 매우 강하게 홍해를 연상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은 그냥 이것을 아무런 뉘앙스도 주지 못하게 “바다 풀”이라고 번역했지만, 여기 “풀”은 ‘갈대’입니다. 그리고 이 갈대는 요나의 상황에서는 ‘바다’에 있는 ‘갈대’입니다.
‘갈대’와 ‘바다’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은 ‘홍해’입니다. 왜냐하면 홍해는 영어나 우리말로나 red sea, 곧 ‘붉은 바다’이지만,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얌 수프’, 곧 ‘갈대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왜 요나가 갑자기 자신의 처지를 말할 때 “스올의 밑바닥”,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할 때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다”라고 말했을까요? 요나는 순간적으로 미역이나 해초가 떠오른 것일까요? 이 시의 특성상, 이 문구는 분명히 ‘갈대 바다’, 곧 홍해를 떠올리도록 의도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하고
자, 이렇게 하고 요나가 이 시에서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1) 2절에서 요나는 자신의 형편을 “스올의 뱃속”이라고 표현합니다. 단순히 물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단순히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정도의 문제도 아닙니다. 요나는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
2) 3절에서 그는 자신이 “깊음, 곧 메촐라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다”고 합니다. 이 “깊음”은 현저하게 홍해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홍해의 “깊음”은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홍해에 수장된 애굽 군사들’이 빠져든 곳입니다. 요나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어디에 빠져들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5절에서는 ‘테홈’의 깊음, 곧 혼돈의 바다 혹은 홍해의 바다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때의 “바다 풀”은 ‘얌 수프’, 곧 갈대 바다, 홍해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요나가 바다 속에 빠지고, 물고기의 뱃속에 삼켜지는 일련의 일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요나는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 “깊음”속에, 그 “스올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깨닫습니다.
아! 나는 지금,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 군대로구나!
그렇습니다. 요나는, 그리고 요나가 대표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은 바다 괴수와 싸우시면서 길을 내신 하나님, 용과 라합을 저미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자신의 편의 장수’가 아니라, ‘상대 진영의 장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제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홍해를 도하한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깊음 속에 돌처럼 잠긴, 애굽 군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아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장의 무시무시한 장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1. 아들의 특권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때 요나는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2절과 3절에서 자신이 “스올의 뱃속”, “깊음 속 바다 가운데” 있었던 요나는, 여기에서 즉시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아들의 특권’이 있습니다. ‘탕자였어도 아들이기 때문에 가진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셔서, 아들이 자신을 거역하였어도, 호적에서 파버리지 않습니다. 그 아들이 쥐엄 열매로 연명하였더라도, 그래서 “우리 아버지 집에 가서 종이라도 되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저기 멀리서 오고 있는 그림자라도 보이면, 날마다 창문을 열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셨던 우리 아버지는 맨발로 달려나와 맞아주시고, 이 패역한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요나의 말은 ‘아들의 특권’입니까? 왜 요나의 이 선언!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가 탕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특권입니까?
2. 성전을 바라봅니다.
왜 요나의 기도가 ‘아들의 특권’인가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자기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스올의 뱃속, 곧 지옥 밑바닥에 있더라도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말할 때, 무엇이 발동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성전을 완공한 후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왕상 8장).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거늘, 어떻게 겨우 이 전이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 우리 가운데 거하시겠다, 내 이름을 거기 두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이 전을 주야로 보옵시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범죄하였더라도,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 맹세하거든 용서하옵소서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적국에 패하더라도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간구하거든 용서하옵소서
만일 주의 백성이 패역하므로 하나님이 그 벌로 하늘을 닫히게 하고 비가 없게 되는 때가 있더라도, 주의 백성이 이곳을 향하여 빌고 그 죄에서 떠나면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리고 마지막 부분입니다.
왕상 8:46-51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원근을 막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그들은 주께서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주의 소유가 됨이니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요나가! 지옥에 있었더라도, 하나님께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건져주신다는, 그 ‘아들의 특권’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네가 어떤 처지, 어떤 형국에 있더라도! 네가 거기에서 이 성전! 곧 성전이신 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도하면! 내가 너의 어떤 형편도 고려하지 아니하고, 너를 다시 받아주고,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겠다! 그렇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그들에게는 ‘회복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록 그가 처한 형편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내쫓겨난 “바다의 끝에” 있다고 할지라도(시 139:8-9) 하나님게서는 다시 거기에서! 주의 백성 우리들을 ‘아들로’, ‘딸로’, ‘자녀로’ 받아들여주시겠노라! 그렇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요나가 여전히 지옥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주는 응답하셨고, 주는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기 백성의 어떤 죄악도,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들의 특권이 회복됩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만 더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왜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나요?
제가 앞에서 설명드릴 때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왜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이 바라본 그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성전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여기에서 이 말씀의 울려퍼짐을 듣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죄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많고, 우리의 반역과 어리석음이 극심하더라도, 우리의 맏형님, 큰오빠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어느 곳에 우리가 있더라도, 심지어 바다의 끝에 있더라도, 바라볼 방향이 되시는 성전이 되십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여 있어도, 그분을 향하여 빌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놀라운 구원의 근거가 되십니다.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요나가 이처럼 지옥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과 결별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태도를 보였고, 이러한 맥락 안에서 그는 버려짐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 없는 자가 되었던 분,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과 선지자이다. 그는 사람들의 지옥으로 내려오시기 위해, 자신의 우월성을 포기하신 예수의 겸비와, 지옥에까지 가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버려짐에 대한 선지자이다.
우리는 요나가 단순히 ‘반역한 이스라엘’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요나는 ‘패역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패역한 우리’이지만, 동시에 ‘패역이 없으시지만 패역한 자가 되어 지옥으로 걸어내려가신 분’을 거기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솔로몬의 기도를 보았지만, 그 솔로몬의 기도가 효력이 있는 이유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반역 속에서도 우리가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까? 우리의 지옥을 대신 겪으신 분, 우리의 지옥을 대신 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깨달음은 깨달음 자체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대한 찬송으로 귀결지어지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