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단 두 가지 사례를 먼저 얘기해볼까 합니다.
오세근이 농구를 늦게 시작(중 3 때)했음에도 센터로서의 기본기가 그 누구보다 탄탄해진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입니다.
오세근 본인이 예전의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농구를 처음 시작하면서 슛과 드리블을 하루 빨리 향상시키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물포고 김영래 코치는 로우포스트에서의 포지셔닝과 볼키핑, 위치에 따른 볼 잡기 전의 플레이, 잡은 후의 연속 동작과 외곽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고집스럽게 기본기를 강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 1때까지만 해도 이름이 안 알려져 있던 오세근이 2년만에 07학번 전체랭킹 1위가 되었고, 이 밑바탕에 코트 전체를 읽는 부단한 연습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최근 강병현의 활약도 주목할만 합니다.
강병현은 대학 때 슛이 상당히 안좋던 선수였습니다. 2005년 1차연맹전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경희대 신명호와 대회 3점 성공률 19%를 찍은 적도 있었죠. 그러나 최근 경기에서 강병현의 3점슛 성공률은 50%를 훨씬 상회합니다. 팀의 인사이드가 워낙 강해진 덕도 있지만,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돌파 후 2대2 패스 등으로 수비를 최대한 흔들어 놓은 뒤 인사이드에 수비가 몰릴 때 집중적으로 3점슛을 던져 상대방의 의지를 아예 꺾어놓는 장면이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에이스 모드로 일관하다가 도리어 스코어 조절가 역할을 하던 대학 3학년 시절보다 훨씬 좋은 모습이죠. 그러나 요즘에도 무리한 플레이를 하면 허재 감독에게 가장 혼나는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2.
감독들의 주입식 교육은 분명한 폐단입니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어느 위치에 있을 때 어떤 플레이를 해야하는지 선수들에게 팀 전체적인 입장에서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주력했다고 합니다. 오세근을 지도한 김영래 코치의 기본적인 생각도 비슷했다고 보고요. 반면, 대부분의 현재 아마추어 농구 지도자들은 패턴에 선수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고, 선수들의 개성을 전술에 활용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오히려 대학리그에서 방종형 지도자나 전술은 없는데 착하기만한(?) 감독들이 득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문제고요.
더군다나 KBL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에도 센터농구를 제대로 구사하는 감독이 없다보니 (센터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코트를 넓게 활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공격루트를 익혀가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3점 라인이 멀어지고, 용병이 1명으로 줄었음에도 넓어진 하이포스트 부근을 활용하는 공격전술이 안나오는건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10여년간 아마추어 농구에까지 뿌리내린 타성이 몇 달만에 고쳐지는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국내선수 공격력의 저하는 소극적인 마인드라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으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3점슛 라인이 멀어지고, 용병이 1명으로 줄어들었음에도 하이포스트 공격(포스트맨이 컨트롤 타워가 된다든지 포워드들이 점퍼를 주요 공격 옵션으로 사용하는 식의)을 거의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핸드볼도 아니고, 용병 2인제였을 때와 거의 차이 없이 코트 활용 폭이 상당히 좁죠. 윤호영과 같은 선수가 요즘 2점슛만으로도 20득점 이상을 하는 경우가 꽤 됩니다. 용병 2인제 하에서 3점슛 없는 포워드의 20득점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죠.
국제대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아시아선수권 결승에서 이란은 하다디의 페인트존 장악을 중심으로 니카의 무한 돌파 & 패스 모드로 중국을 대파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왕즈즈를 제외하고는 이치엔리엔이나 (이전까지의 대회에서 그렇게나 지능적인 플레이로 상대편을 농락하던) 두펑이 모두 중거리슛, 외곽 난사만 하면서 이란에 대량으로 속공을 허용하며 자멸했고요. 이치엔리엔이나 두펑이 소극적 마인드로 일관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보다는 공격에서 얼마나 다양한 공간을 활용했느냐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3.
어제 조성원 해설위원이 하프타임에 KCC의 전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골자는 하승진의 인사이드 공간 장악을 중심으로 나머지 4명이 활발하게 움직이다 보니 제2, 제3의 공격루트가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나게 되고, 수비가 어느 한 쪽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눈 뜨고 당하는 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동준, 강은식이 자신있는 드리블 공격과 슛을 할 수 있었던건 그와 동시에 3점 라인과 베이스 라인으로 동시에 움직여주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포인트가드와 팀플레이어는 공격의 실패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최적의 루트라 하더라도 100% 성공률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상대편이 수비 리바운드를 잡고 역습하는 것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죠. 조던이 클러치슛을 던질 때 피펜만큼은 이런 실패 가능성을 대비했고, 역대 최고 포인트가드 중 한 명인 스탁턴은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도 센터 스크린까지 걸면서 동료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동시에 스크린 건 상대편 센터에게 곧바로 박스아웃을 하면서 리바운드까지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슛을 던지는 선수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건 그 자신의 슛터치 자신감 + 이런 동료들의 움직임이고요.
용병 2인제 KBL에서 퓨어가드보다 공격형 듀얼가드가 강점을 보인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용병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가드 본인의 외곽 득점과 용병 2대2에만 매달리면 되던 과거에 비해...
용병 한 명이 줄어든 올시즌 들어 가드들의 어시스트는 줄고, 포워드의 어시스트가 늘어난 것은 어찌봐야 할까요? 심지어 용병이 없는 아마추어 무대에서도 퓨어가드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문규 해설위원이 고교리그를 중계하면서 말했듯이 단신, 장신 할 것 없이 공격지향적인 성격과 드리블링, 슛터치는 더 좋아졌고요. 그러나 코트 전체적인 활용도와 공격루트 다변화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죠. 공격의 대담성이나 공격 지향성만으로 고득점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다득점 혹은 공격 농구가 개인기량과 분명한 연관성이 있지만,
그것이 아이솔레이션이나 인유어페이스와 같은 1인 쇼타임 농구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코비의 81득점, 방성윤의 42득점, 김민수의 37득점 경기가 산술적으로만 계산한다면 모두 압도적 점수차의 대승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심지어 방, 김의 경기는 연장전 접전 끝 승리였습니다. 공격 제한시간 24초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팀오펜스의 균형성이 깨지면 나머지 4명으로부터 파생되는 효과(위에서 말한 KCC의 유기적 흐름과 반대되는)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잡설이 길어졌습니다만, 결국 장기적으로 공격력을 살리는 방법은 감독이 과감한 슛 기회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병제 때문에 10여년 째 줄어든 코트 활용폭을 넓히고, 선수들이 팀플레이의 각 부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받는게 더 본질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공격 위주의 단조로운 경기운영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는걸로 압니다. 그리고 지금 논의의 핵심은 "용병 1인제 전환 이후 저득점 현상이 나온 것에 대한 분석"입니다. 제가 국제대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국제대회야말로 국내선수들의 기량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고, 국제대회 성적 향상 = 국내선수의 공수 기량 향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국제대회 경기 결과가 KBL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늘릴 수 있느냐를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기력 향상은 어느정도 보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프로축구를 언급하셨는데, 분명한 것은 2002년 이후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이 과거에 비해 확연히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K리그 인기도 단번에 확 늘어나지는 않았느나, 지속적인 안정성을 보이고 있고 무엇보다 90년대 뻥축구와는 질적인 차이가 크죠. 더군다나 축구는 국내선수의 기량이 매우 좋아져서 해외리그에 진출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졌습니다. 해외로 좋은 선수를 보내고도 리그 인기가 어느정도 유지되는게 더 중요한 포인트 아닐까요? 농구는?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떨어졌다는 것이 국제대회 성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데, 단지 국내선수들의 리그내 득점 고집을 높이는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거라 보십니까? 김승현 말씀을 하셨는데, 김승현의 테크닉은 송도 시절 故 전규삼 옹의 기본기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OJ님이
말씀하신 "공격지향적인" 마인드를 가져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팀에 가더라도 김승현은 김승현이죠. 그의 기량이지 마인드나 전술적 자유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신장(단신가드)이나 3점슛 능력만으로 평가받던 시절에는 국내선수 중심의 경기운영이나 코트의 넓은 활용,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슛셀렉션과 공격의 다변화는 (단신포가, 슈터가 아닌 한) 요원하기만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용병 1인제가 되었으니 국내선수들이 좀 더 공격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감독들도 과거의 핸드볼식 공간 활용에서 벗어나 코트를 모두 쓰는 전술을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국내선수 중 리그탑인 선수가 과거처럼 가드 아니면
슈터였던 비정상적 구도에서 벗어나 팀마다 주전 파워포워드의 기량이 중시되고 나아가 아마추어에서도 장신 선수들의 활동폭과 플레이 성향이 유지되는게 필요한 것이죠. 단순히 "슛"의 과감성만 강조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버슨이나 코비는 많은 팬도 있지만 볼호그적 기질로 비난도 받습니다. 반면 래리버드나 피펜은 다방면에서 포가 이상의 경기운영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죠. 모든 선수가 공격지향적 마인드를 가질 필요도 없고, 더 본질적으로... 우리나라가 미국식 개인기 농구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운동능력의 한계를 생각했을 때 과거 유럽식 토털농구나 뉴질랜드 등의 장신농구가 더 어울릴 수 있죠.
경기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사항입니다. 저득점에 대한 대책도 마찬가지고요. 국내 스코어러의 양성이 농구 붐을 일으키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프로스포츠에서 농구의 비중을 생각해도 그렇고, 몇 시즌동안 인기를 가져오다가 다시 식을지도 모를 일이죠. 오히려 3점슛 아니면 용병 1:1이던 것에서 벗어나 팀마다 확실한 컬러를 갖추고 지역연고 내실화를 장기적으로 다지는게 낫지 않을까요?